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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 (출21:1-36)

본문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 /출애굽기21;1-36



TS : 믿음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뿔과 다리로


 


꽃사슴이 냇가에서 물을 마시다가 물속에 비친 자신의 뿔을 보고서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매우 감탄하면서 자랑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가냘픈 다리를 보면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면서 한숨을 쉽니다.


그때 사자가 나타납니다.


깜짝 놀란 사슴은 볼품없다고 한숨 쉬었던 다리의 도움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만 그렇게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뿔이 가시덤불에 걸려서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이런 걸 사자성어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불행할 때도 있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축복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긍정적인 생각은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능력입니다.


더 나아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조차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신의 단점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점을 활용하는 능력을 보여줌으로 그 단점이 자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세상을 믿음으로 사는 성도님들에게는 단점, 결점, 약점을 가지고 즐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P4.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말씀을 주시면서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지침들과 제도들과 규례들을 가르쳐 주신다.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하여 합당한 제도와 규례와 지침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규례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1장에는 크게 3가지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자신의 집에 들어온 종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폭행함으로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소유권자가 져야 할 책임의 분량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실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에게는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가도록 말씀하시는 것일까?


 


D4.


 


①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종에 대하여 규례를 정해 주시는 하나님.


 


ⓐ 동족을 종으로 삼았을 경우


 


자기 스스로 종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종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방인을 종으로 삼았을 경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받고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인데,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서 같은 동족에게 종으로 들어가서 종살이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6년 동안만 종의 신분으로 충실하게 섬기고, 제7년 되는 해에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서 종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7년 되는 해는 안식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어서 자유인으로 안식하는 삶을 살도록 해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본래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종이 주인에게 종으로 들어올 때, 혼자서 들어와서 7년째가 되었다면 혼자서 해방 받으면 된다.


혼인하여 부부가 종의 신분이 되었다면 부부가 함께 해방받아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혼자 들어온 종에게 주인이 아내를 붙여주어서 그 아내로 더불어 자식을 낳았다면 그 종은 혼자서 해방받아야 하고, 그의 아내와 자식은 해방받지 못하고 주인의 종이 된다.


그런데 해방받아야 할 종이 해방을 받고 자유인이 되더라도 지금 종살이하는 삶보다 더 행복하거나 자유롭거나 해방된 삶을 살아질 것 같지 않고, 또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여 해방 받지 말고 계속 종의 신분으로 살겠다고 스스로 결정한다면 종의 주인이 재판장에게 종을 데리고 가서 문이나 문설주에서 귀에 송곳으로 박아서 구멍을 뚫고 ‘000는 000의 종으로 인정한다’라는 증표로 귀걸이를 걸게 되면 평생 그 주인의 종된 신분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송곳으로 귀를 뚫을 때 피를 흘리게 된다.


곧 주인과 종은 피의 언약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평생 죽을 때까지, 그의 후손들까지도 그 주인의 집에서 종으로 살겠다는 언약이다.


후손들까지 종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 언약이기 때문에 너무나 무서운 언약이 되는 것이다.


피의 언약이라는 것은 한쪽이 파기하게 되면 피를 흘려야만 되는 언약이다.


절대로 다시 환수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언약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남성들도 귀걸이를 많이 하고 다니지만, 많은 여성들이 귀걸이를 하는 것은 아름다워지고 예뻐지기 위해서 미모와 장식의 도구로 귀걸이를 하는 것이지만, 본래 귀걸이는 종과 주인의 관계를 형성하는 증표로 귀걸이를 했던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십자가 귀걸이나 목걸이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로 피의 언약을 맺은 관계임을 증명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 귀걸이나 목걸이와 같은 장식품들을 함으로서 자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라는 증표는 될 수 있지만, 십자가 장식품들을 함으로서 그 장식품들이 어떤 신적인 능력이 있어서 어떤 위기에서 건져주거나 힘이나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 십자가 목걸이와 귀걸이와 같은 장식품은 우상이 되고 만다.


우상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십자가가 우상이 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여인을 종으로 삼았을 경우


 


성경시대의 여성이란 존재는 남자에게 속한 존재로 인식하던 시대이다.


여성의 인권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다.


본래 여자는 혼인하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혼인하면 남편에게 예속해진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여인이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이스라엘 남성이 종이 되는 경우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남자 이스라엘 백성이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안식년이 되면 해방시켜서 자유인이 되도록 해야 하지만, 여자가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차별을 두고 있다.


어떤 아버지가 딸을 종으로 팔았을 경우이다.


딸은 아버지에게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딸을 종으로 팔 수 있다.


자기 딸을 종으로 팔아야 하는 아버지가 오죽 힘들고 어렵게 살았으면 딸을 종으로 팔겠는가.


어떤 연유에서든지 아버지가 딸을 종으로 팔았을 때, 남자 종처럼 7년째 되는 해에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그 여종을 샀는데 여종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고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여종에 대한 주인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그랬을 때 주인은 그 여종을 해방시켜 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아야 할 정도로 그 여종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속량해 주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 여종이 주인의 마음에 들어서 자기 아들에게 줄 수 있다.


아들에게 주는 것은 아내로 줄 수도 있고, 첩으로 줄 수도 있다.


아들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드리고 싶으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지만, 그 여종과의 동침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인과 동침하는 것은 아내와 첩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여종을 아들의 아내로, 곧 며느리로 삼고 싶으면 여종을 다른 여종들처럼 취급하지 말고 마치 자기 딸인 것처럼 대우해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 아들은 그 여인을 종으로 대우하지 말고 정당하게 아내로 대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아들이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도 가능해진다.


대신 그 여인이 기본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생활 대책을 세워주어야 한다.


과거 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여성의 권리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온갖 고난의 삶을 살아야만 되었었다.


지금 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여성으로 누릴 수 있는 여성의 인권과 권리와 권한과 혜택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② 폭행치사자에 대한 규례를 정해주시는 하나님.


 


ⓐ 살인자가 되었을 경우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한을 빼앗는 강탈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늘 아버지의 주권에 달려 있다.


하늘 아버지의 손에 달려있는 생명권을 사람이 임의로 빼앗는 행위는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명을 빼앗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전혀 그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나 계획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생명을 거두도록 허락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13절에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거든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인의 의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그 사람에게 맡겨서 거두어가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혀 죽을 상황이 아닌데도 그 사람이 죽을 수 있고, 얼마든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한 곳을 정하여 그리로 도망가서 그 살인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판을 받고 고의성이 없으면 형벌을 면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가 도망갈 수 있는 한 곳을 정해 주셨는데, 그 한 곳이 바로 도피성 제도이다.


도피성에 들어간 살인자는 재판을 받아서 고의성이 없다고 판정이 되었다면 대제사장이 죽거나, 희년이 되기 전에는 그 도피성에서 살아야 한다.


만약에 그 기간이 되기 전에 도피성에서 나왔을 경우에는 원수가 죽인다고 하더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하지만 도피성에 피해 있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그 살인자를 위협하거나 죽일 수 없도록 생명의 안전을 보장해 주신다.


살인자가 도망갈 수 있는 도피성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그 사람을 죽이려고 모든 준비를 갖추어서 살인의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살인자가 되었다면 도피성으로 도망갔다고 하더라도 14절에서 하나님은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제사드리는 제단뿔을 붙잡고 있더라도 끌어내어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 제자드리는 제단은 생명을 살리는 장치이다.


죄인을 대신하여 제물로 제사를 드리면서 대속하여 살리는 장치가 바로 제단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단은 살리는 사역을 감당하는 장치인데, 살인의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고의로 살인자가 되었다면 그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아무리 살리는 제단이라 하더라도 고의성을 지닌 살인자까지 살리는 것은 아니다.


살인자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의 생명을 죽임으로서 죄의 값을 치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 부모를 폭행하는 자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태어나는 통로로 그 부모를 사용하셨는데, 그 자식이 자기 부모님을 폭행하거나 저주하는 행위는 곧 하늘의 하나님을 폭행하고 저주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반드시 그를 죽임으로 그 죄의 값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천륜의 도리를 깨뜨리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젊은이들이 어르신들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어르신들을 존경하지는 못할지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젊은이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수없이 많을 수 있지만, 그래도 어르신들은 부모님세대, 할아버지세대이기 때문에 마치 아버지, 어머니를 대하듯,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하듯 하는 마음의 자세로 존중해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은 어르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존중히 여김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들이다.


그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들 세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납치해서 인신매매하여 팔았거나 자기 수하에 두었다면 그 사람도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군가를 납치하여 각종 장기를 적출하여 매매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기거나 자기 수하에 둔 사람은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늘 아버지의 생명권을 빼앗아 박탈하는 행위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생명을 거두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을 존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명을 마치 짐승처럼 취급하면 그 당사자도 그런 취급을 당해야 마땅한 것이다.


북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중국인들이 너무 많다.


북한 여성들을 인인매매한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징계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 다툼 중에 부상자가 발생했을 경우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다투고 싸우고 분쟁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의견의 분쟁이 없이 살아가는 성인군자가 몇 명이나 될까?


사람의 본성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의 특성을 그대로 지닌 채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란 존재는 어디서든, 누구와도 다툴 수 있고, 싸울 수 있고, 분쟁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서 상처가 발생하고 부상자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치료할 수 있도록 배상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치료비를 배상해 주지 않으려고 하면 안 다투고 안 싸우면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덩어리로 싸움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면 배상해 주어야 할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집에 있는 종을 매로 때려서 죽였을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그 종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그 종의 근본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종의 생명을 빼앗을 자격은 없다.


신명기 25:3에 보면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매로 종을 40대까지는 때릴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때릴 수 없다고 때릴 수 있는 매의 숫자를 한정시켜 있다.


40대를 넘어서 더 많이 때림으로 종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그 대상자의 생명을 거두게 되면 그에 합당한 살인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1:24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40대까지만 때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39대를 때리는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들에게서 39대의 매를 5번씩이나 맞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종에 대한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이다.


세상 사람들, 이방인들은 종의 생명을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뜻대로 처결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그 종의 생명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정한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종의 생명도 존중히 여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종이 주인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곧바로 죽지 않고 하루 이틀 더 살아 있다가 죽었을 경우에는 주인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싸우고 다투다가 임산부에게 위해(危害)를 가해서 낙태(落胎)가 되었다면 그 남편은 가해자에게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고, 그 가해자는 남편에게 배상해 주어야 한다.


임산부뿐 아니라 누구든지 해를 입혔다면 그 입은 해에 합당하게 해를 입힘으로서 보상하라고 말씀하신다.


23-25절에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아울러 주인이 종의 여러 장기 중에 하나라도 침해함으로서 인하여 불구자의 삶, 장애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이미 종의 대가를 지불한 것으로 여기고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최소한 사람이라는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그 삶이 종의 신분으로 살고 있더라도 최소한의 인격체로 살아가도록 보장해 주고 계신다.


 


③ 임자가 책임져야 할 범위에 대하여 규례를 정해주시는 하나님.


 


ⓐ 소의 임자가 책임져야 할 규례


 


소는 가축이기 때문에 임자가 있다.


소가 사람을 쳐서 죽였다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소를 죽였으면 고기가 발생하지만, 그 소의 고기도 먹어서는 안 된다.


소는 본래 정결한 짐승이기 때문에 소의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을 쳐서 죽인 소는 이미 부정한 짐승이 되었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쳐서 죽인 소의 임자는 형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 그 소가 무언가를 들이받는 버릇이 있고, 그로 인해서 주변에서 소를 관리 잘하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를 방치함으로 사람을 쳐서 죽였다면 소도 돌로 쳐서 죽이고, 그 소의 임자도 마땅히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만 죽음 대신에 속죄금을 부과하여 납부하도록 하면 그 속죄금을 생명 값으로 내야 한다.


소가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를 쳐서 죽었을 경우에도 똑같은 규례로 적용된다.


소가 다른 사람의 종을 들이받게 되면 소의 임자는 종의 주인에게 은 30세겔의 몸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 소는 돌로 쳐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소끼리 서로 소싸움하다가 어느 한 소가 죽었을 경우에는 살아있는 소를 팔아서 반반으로 나누고, 죽은 소도 반반으로 고기를 나누어 가진다.


소가 본래부터 싸움질을 잘하고 받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잘 관리하지 않아서 소가 싸우다가 죽었으면 죽은 소 대신에 살아있는 소를 주고 죽은 소를 가지도록 한다.


 


하나님은 소의 경우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가축들을 대표하여 소를 말씀하는 것이다.


다른 가축들도 소의 경우처럼 배상하거나 죽이거나 하도록 규례를 정해주시는 것이다.


소의 경우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든 소유물을 대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동차의 경우를 이야기할 수 있다.


자동차를 잘 관리하고 운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 관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부지 중에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 차량의 주인이 배상하는 것이다.


차량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고에 대하여 주인이 배상해야 하기 때문에 그 주인을 대신하여 배상하기 위하여 자동차보험제도가 생겨나는 것이다.


보험회사에서 그 차량 주인을 대신하여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배상해 주는 것이다.


 


ⓑ 구덩이에서 참사가 발생하였을 경우


 


중동지역에는 물을 얻기 위하여 구덩이나 웅덩이나 우물을 파야 하는 경우가 많다.


비가 올 때 흘러가는 빗물을 가두어야 하기 때문에 지면과 같거나 낫게 우물이나 웅덩이나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는 평상시에는 커다란 돌로 막아두어야 한다.


돌로 막아두지 않으면 우물이나 구덩이나 웅덩이에 사람이나 짐승이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나 웅덩이를 팠는데, 커다란 돌로 막지 않고 잘 관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구덩이에 가축들이 빠져서 죽었을 경우에는 그 구덩이 임자는 가축의 임자에게 배상하고, 그 가축은 구덩이 임자가 가지면 된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공사를 하면서 생겨난 맨홀이나 하수구나 밭이나 논 뚝, 농수로, 제방 뚝과 같은 것들을 제대로 관리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각종 사고와 불상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사고가 발생하도록 원인 제공을 한 당사자가 그에 상응하는 배상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이런 규례들을 정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규례들을 정해 주시는 근본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와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따라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인정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L4 & B4.


 


흔히 인품이나 인덕이 많은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한다.


법(法)이 있으면 좋을까? 좋지 않을까?


전혀 법이 없다면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고 만다.


국가와 사회와 각종 공동체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헌법과 각종 법과 규례와 조례와 규칙들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인간의 누릴 수 있는 행복추구권, 자유권, 인권과 같은 보호를 받으면서 다양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과욕불급(過慾不及)이라는 말이 있듯이 뭐든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이다.


법은 있는 것보다 없는 편이 훨씬 좋다.


법이라는 존재는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켜주는 역할도 감당하지만,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구속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세상에서는 각종 법들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한다.


세상의 법은 계속 바뀐다.


세상의 법은 특 하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바꿔버린다.


법은 만들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 수 있다.


사람은 법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 법의 구속을 받으면서 불편하게 살아가게 된다.


이른바 민식이법이라는 도로교통법으로 인해서 대전 시내 주행속도를 50, 40, 30km로 제한시키고 감시카메라를 설치해서 운전자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운전하기가 얼마나 불편해졌는지, 곳곳마다 감시카메라를 설치해놓았기 때문에 조마조마해서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런 느낌은 저 혼자서만 느끼는 감정일까?


속도를 줄이면 그만큼 사고율이 떨어진다는 연구보고서가 있다고 한다.


계속 사고율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속도를 줄인다면 어디까지 줄여야하는 것일까?


아주 먼 옛날처럼, 아니 21세기의 북한에서처럼 11호차(두 다리로 걸어가는 차)를 이용하면 그만큼 사고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차량이 없는 집이 없는 시대에 차를 집에 세워놓고 11호차를 이용하여 사고율을 줄입시다라고 한다면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11호차를 이용하여 사고율을 줄입시다라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는가?


사고율을 줄이기 위해서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것은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회사에서 가장 합당하게 연구하면서 안전한 차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정부나 정권이나 어떤 단체에서 인위적으로 속도를 제한한다고 해서 사고율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빠르고 정확하고 안전하게 이동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000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법을 만들면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 법이 가진 특성 때문에 규제하고 통제하고 구속당하고 벌금을 내고 교도소에 들어가서 죄수를 만들어내는 것이 법이 가진 특색이다.


법은 은혜를 이기지 못한다.


우리가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받고 있는 모세5경이라는 성경은 사실은 계명, 율법을 만들어내는 성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5경을 통해서 만들어진 613개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 하는 게임의 법칙에 따라서 613개의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속을 당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613개의 율법에는 ‘000해야 한다’라는 긍정적인 율법이 248개이고, ‘000하면 안 된다’라는 부정적인 율법이 365에 해당된다.


부정적인 율법이 365개라는 말은 매일매일 ‘000하면 안 된다.’라는 부정적인 율법을 되뇌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법 앞에는 자유함이 있을 수 없다.


법 앞에는 정죄하고 통제하고 심판하고 구속하고 심지어는 귀중한 생명까지도 빼앗아갈 수 있다.


은혜는 법 위에 있는 것으로서 모든 법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15:10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말한다.


바울이란 사람은 바울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율법에 매진하면서 충실하게 지키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등등 많은 서신서에 보면 율법 때문에 좋았다는 기록보다는 율법 때문에 고통스럽고 통제당하고 구속당하며 산다는 기록이 더 많다.


결국 성경에서 갖가지 율법, 더 나아가 613개의 율법을 기록하면서 지키도록 말씀하시는 것은 그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과 은혜로만 구원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백성, 성도, 의인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나침판, 신호등,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복음과 사랑을 기초로 세워지는 기둥이다.


종에 대한 규례도, 폭행과 치사자에 관한 규례도, 소유물에 관한 규례뿐만 아니라 각종 계명들과 율법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본으로 기둥을 세우면 은혜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둥을 세우지 못하면 은혜는 사라지는 것이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형벌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는 생명을 빼앗기는 참사까지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법, 율법, 계명, 규례보다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최고로 우선하여야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생겨나지 않는다.


설령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이다.


신앙인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의 어떤 법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선되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이 찾아야 할 믿음은 십자가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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