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이르기 전에 (말4:1-6)
본문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말씀:말라기 4:1-6
오늘 말씀은 말라기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3:18절에 보면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리라고 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의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악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분별하는 날이 곧 의인은 구원받고 악인은 심판 받을 것을 보게 되는 날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그 심판의 모습은 4:1절에 보면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날이라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고 했습니다. 풀무불이란 쇠를 벼르는 대장간의 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용광로의 불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풀무불의 온도는 적어도 1000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런 풀무불보다 더 극렬하다면 그런 불에 소멸되지 아니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인 그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말라기서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라기서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나서 그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풀무불의 온도를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서 3:19-23절을 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단 3:19-23). 여기서 일곱 배란 완전한 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을 극렬한 불이라고 합니다. 그 불의 화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그 불에 집어 던져 넣던 사람들이 다 불에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불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불속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불에 탄 흔적도, 탄 냄새도 없도록 지켜주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 극렬히 타는 불에 던져졌을 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분명히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에 던져 졌는데 그들 외에 다른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곧 세 사람 외에 신들의 아들과 같은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불속에 거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3:24-27절을 보면 “때에 느부갓네살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극렬한 불이 악인과 의인을 정확하게 분리시켜 내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인 것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4:2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하시는데 어떤 자를 심판하시는가 하면 오늘 본문 4:1절을 다시 보면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4:1).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이 악인 것입니다. 잠언 21:4절에서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이 다 죄라고 합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 즉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시편 101:5절에 보면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형통한 자들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아주 강한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마른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그 이르는 날에 그 뿌리와 가지까지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 4:2절을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심판의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로운 해가 떠 오른다’라는 것은 이사야 60: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의로운 해란 하늘의 태양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는 의로운 해란 여호와가 영영한 빛이 되시며, 영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이 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메시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0:1-3절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고 했습니다. 특히 이사야 9:1-2절을 보면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일들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들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마태복음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12-17절을 보면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이 비치면(여기서 광선이라는 말을 날개로도 번역이 됩니다) 흑암에 앉은 자들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치료하는 날개 아래 거하게 되면 마치 외양간의 송아지가 풀려나서 기뻐 이리 뛰고 저리 뛰듯이 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나와서 뛰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에 많이 보았습니다. 외양간의 송아지는 아직 코뚜레를 꿰지 않습니다. 어미 소를 따라 문 밖에 나서기만하면 얼마나 펄쩍 펄쩍 뛰는지 네 다리가 다 공중에 펄쩍 펄쩍 거리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경외하는 자는 곧 예수님을 경외하는 자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기쁨은 놀라운 것입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도행전 3:6-10절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기쁨이 얼마나 컷던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극렬한 심판의 날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한 구원의 날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구원받은 자들은 외양간의 송아지가 풀려나와서 이리 뛰며 저리 뛰듯이 기뻐하며 주님을 찬송하는 기쁨의 날이기도 합니다.
3절을 보면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정한 날에 악인은 밟힐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발바닥 밑의 재와 같이 밟힐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이르기 전에 곧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장차 올 여호와의 날, 곧 그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키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기에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모세의 율례를 기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5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합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명한 율법과 법도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법도를 기억함으로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주께로 돌이키게 함입니다. 그 율법과 법도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율법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산 채로 하늘에 받아들여진 자이기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별세를 이야기할 때 나타났고 그것을 목격한 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습니다. 방금 본 4절과 5절에서도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예언이 나온 것처럼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7:9-13절을 보면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산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엘리야의 역할은 세례 요한이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3:1절 말씀에 근거하여 정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였지만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7절을 보면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제사장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세례 요한인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겉 모습도 세례 요한과 비슷합니다. 열왕기하 1:8절에 아하시야 왕이 병들이 바알세붑에서 자기의 병이 어떻게 될지 물으려고 신하를 보내는 중에 엘리야가 왕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 왕이 그 선지자의 모양을 물어보니 털이 많은 사람이며 가죽 띠를 띠었다고 보고하는데 그 털이 많다는 것은 다른 번역에서 털옷을 입은 사람으로도 봅니다. 그러니 가죽옷을 입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막 1:6).
이런 외모만이 아니라 사역의 배경도 엘리야의 활동 시에 악한 왕 아합과 더 악한 이세벨이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사역의 배경은 악한 왕 헤롯과 그보다 더 악한 헤로디아가 있었습니다. 이런 헤롯과 헤로디아를 공격하였다고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두 사이에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며 주께로 돌아오라고 외친 것처럼 세례 요한도 외친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외친 그 외침의 끝에 누가 오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이 임한 것입니다. 그 날이 닥친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3:18절 말씀처럼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외치면서 그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고자 한 세례 요한 조차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날이며, 캄캄하고 두렵고 어두운 날이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곧 선지자들의 예언에 기초해서 즉석에서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3:18-21절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6절부터 시작되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의 소식만 봅니다. 그러나 분명히 심판의 소식이 함께 있습니다. 그 심판이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정죄와 같은 말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의로운 해가 비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기에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죄와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벌써 두렵고 무서운 그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들이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양쪽으로 나누는 내용이며 그 기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는 오래전에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래라는 것은 많은 시간이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바로 오늘이라고 부르는 이 시점이 여호와의 크고 두렵고 무서운 날인 것입니다. 물론 재림이 있지만 재림은 구원과 심판이 확정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히브리서 3장에서 본 말씀대로 오늘이라 부르는 이 시간에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피차 권면하라는 것입니다(히 3:13).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그것이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어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마음이 돌이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그날 곧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구원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 시간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신과 이 세상을 더 사랑하는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고, 그 구원의 은혜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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