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앙망하는 믿음 (사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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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앙망하는 믿음 /사40:27-31, 히12:1-3
주님 앙망하는 믿음 사40:27-31, 히12:1-3
우리가 인생길을 걷다보면 평탄한 길도 있고, 오르막길도, 내리막길이 있고, 산도 만나고, 강도 만나며, 절벽과 같은 막다른 곳에 이를 때도 있으며, 생각도 않은 비바람과 태풍으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재난에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현실을 인정하고 눈물로 인내할 때에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주 시리즈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진주는 땅에서 캐지 않고 바다의 속에서 나오는 보석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엄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때 진주를 얼어붙은 눈물(frozen tears)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진주란 바로 딸이 시집가서 흘리는 눈물을 상징하는 것임으로 진주를 준다는 것 입니다.
바다 속 조개의 연한 살 속으로 거친 모래가 들어오면 조개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한 종류는 들어온 모래를 인정하고 나카(Nacre)라는 눈물에 진액을 내서 모래를 코팅하기 시작합니다. 연한 살에 까칠까칠 한 모래는 얼마나 아픔을 주겠습니까? 그래서 조개는 모래를 향하여 열심히 나카라는 진액으로 덮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을 마치 진주의 눈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눈물로 모래를 코팅하다 보면 그 나카 라는 눈물이 얼어붙고 커져서 진주라는 아름다운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조개는 들어온 모래를 인정하지 않고 미워하고 무시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그러나 조개가 움직이면 까칠까칠한 모래가 진주의 연한 살에 상처를 내어서 살이 곪고 병들어 결국은 모래로 인하여 그 조개는 죽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도 이와 같이 모래처럼 불청객의 환난이 찾아 올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찾아온 고난을 인정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고난이란 상처로 인하여 자신의 속마음이 병들고 곪고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인정하여 받아드리고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인내하고 기다린다면 새 힘을 공급 받게 되고,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되며, 설령 원수 같이 미운 사람일지라도 내가 사랑으로 감싸고 눈물로 인내할 때에 믿음의 승리자가 되고, 후일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 앙망하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 앙망하는 믿음은,
1.주님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게 합니다.
구약 본문 사 40:31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본래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 범한 죄로 인해 멀리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세월이 흘러 50년, 60년, 7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포로생활에서 해방될 희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낙심하는 사람도 생기고 실망하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앙망한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내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내 힘을 의지하지 말고, 내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내 환경을 의지하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변하는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주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신약 본문 히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는 나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앙망한다.'는 말은 생각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골3:1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한 걸음, 두 걸음 풍파 많은 고해 같은 인생항로를 건너가야 하고, 태산준령과 사막이 많은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앙망한다는 말은 주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주님 닮기를 소망하면서 주님을 앙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앙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지, 그것이 향락이든지 영광이든지, 세상에 있는 지위든지, 세상에 있는 돈이든지 이런 것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오직 주님을 우리의 앙망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집갈 나이가 된 한 처녀에게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서 앞을 다투어 청혼을 해왔습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서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돈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모두 뛰기를 시작하여 한 청년이 처녀를 거의 따라와서 잡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에 이 처녀는 돈을 한 움큼 그 달려오는 청년 앞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줍느라고 그 처녀를 잡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 처녀가까이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돈 다발을 떨어뜨렸습니다. 역시 그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청년이 그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갔을 때 이때 처녀는 주머니에 남은 돈을 몽땅 길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그 구혼자는 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처녀를 단념치 않고 계속 달려 결국 붙잡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변에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온갖 보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주님을 붙잡게 되면 주님 안에 있는 온갖 보화가 나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쁘고 분주해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 가운데 모든 죄를 자연스럽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기도를 합니다. 주님께 모든 사정을 아뢰는 간구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교회와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주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친밀한 단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성도에게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인격적이고 의미심장한 힘으로 삶 가운데 생활화 되게 됩니다. 믿음이란 일주일에 한, 두 번 교회에서 경험하는 이벤트가 아닌, 일상생활이라는 삶 가운데 녹아지게 됩니다. 이런 성도는 신앙에 더 많은 것을 투자하고, 교회 문 안팎을 불문하고 나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지지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앙망하는 성도는 영적인 확신이 커지게 되고, 자신의 삶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신뢰성, 능력에 대하여 날이 갈수록 더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늘 주님을 앙망하며 주님과 교제하는 성도는 기도가 물처럼 흐르는 대화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기도하면서 친구에게 말하듯이 매일의 쟁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사람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미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우선순위 목록에서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앙망하면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히브리서 본문에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먼저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믿음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믿고, 어떤 사람은 우상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연을 신으로 믿고 숭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죽은 것들로 믿어서는 안 될 거짓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참 생명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친히 목자가 되시어 은혜를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도와 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앙망하면서 늘 주님을 생각하며 교제를 나누다 보면 주님의 삶과 모습을 본받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고 동경하는 대로 됩니다. 선하신 주님을 본받아 죄와 악을 버리고, 죄악 된 성품과 습관을 버리고 주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게 되고 성결한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삽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본받아 말씀에 순종하여 살기를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영광으로 이르게 하는 길임을 믿고 기쁨으로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가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이 따르지만 우리 신앙을 더욱 값지게 만듭니다. 영국의 죠지 왕이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특별히 두개의 꽃병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꽃병들은 같은 원료로 만들어졌고 같은 스타일과 같은 무늬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있는 예술품이 되어 사랑을 받고 있는데 하나는 흐릿한 빛을 낸 채 아주 볼 품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묻습니다. 도대체 이 둘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그때 관리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윤기가 있고 빛이 나지만 하나는 윤기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저희가 이것을 특별히 여기에 전시해 놓은 것은 시련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꽃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 완성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과 같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는 그 믿음이 아름답고 빛나는 열매를 맺지만 고난을 모르고 늘 편하게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반짝거리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주님 닮기를 소망하는 성도로 삽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과 삶도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도자기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신앙으로 열매 맺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새 힘을 얻어 인내로 끝까지 견디며 믿음의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너무 힘든 때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구름 같이 둘러싼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과 주를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우러러본다는 것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바라본다는 의미보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인내와 오래 참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 본문 히12:2-3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참으심을 생각하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란 하나님의 정한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우리는 인내로서 기다립니다. 그 때가 언제쯤 이루어질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가는 것이 인내입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게 인내입니다. 사람들은 수없이 자기 생각들을 바꿉니다. 조금 하다가 못 견디고 떨어져 나갑니다. 그것은 인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하다가 하던 일들을 아무렇게나 바꾸어버립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7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렘25:11). 현재 그들이 힘겨운 생활로 볼 때, 70년이 언제 지나갈 지, 아니면 그 70년이 차기도 전에 그들이 죽을 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 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바벨론 왕의 다스림 안에 지내야 한다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가 멈추어져서도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표시로 행하던 할례가 중단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며,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할 일들을 다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임을, 하나님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구애를 받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영원하시고 무소부재 하심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피곤하거나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과 지혜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우리의 사정 다 아뢰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9절에 하나님은 명철이 있으시므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에게 나가 아니라, 앙망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앙망하는 자의 신앙의 모습을 독수리에게 비유를 하였습니다. 독수리는 어떤 새입니까? *독수리는 순결한 새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는 먹지 않으며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성도는 세상의 부패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성결한 삶을 사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앙망하는 주님이 성결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는 높이 날고 멀리 보는 새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앙망하면 신앙도 높이 나는 독수리와 같이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높은 산위나 비행기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시시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하여 아득바득 티격태격 싸우며 살다가 결국은 가진 것 없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높은 곳에서 바라 볼 때에 우리는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세계, 멀리 보는 안목으로 장차 들어 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우리의 삶에 목표로 설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힘이 세고 강한 새 입니다. 독수리 앞에 모든 공중에 새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들도 독수리와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사망 권세를 이기고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을 가지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 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하면서 담대하게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 앙망하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 앙망하는 믿음은,
◈.주님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게 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새 힘을 얻어 인내로 끝까지 견디며 믿음의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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