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봐요 (출15:19-27)
본문
변화와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봐요/출애굽기15;19-27
PW : 믿음 BIW : 만나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치료와 회복의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자왕의 생일날에
어느 평화로운 숲속에서 사자 왕의 생일날이 되었습니다.
여러 짐승들이 모여서 사자의 생일을 축하하며 맛있게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입 큰 개구리는 음식을 먹어 본 지가 하두 오래되어서 자기 앞에 있는 음식은 물론 멀리까지 손을 뻗어가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늙은 너구리가 개구리에게 들으라고 큰 소리로 “땅에서도 살고 물에서도 사는 놈은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입 큰 개구리가 하마를 흘낏 보더니 “얘, 하마. 너 나가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뻔뻔한 개구리의 말에 신경질이 난 너구리는 또 개구리 들으라고 큰소리로 “눈이 큰 녀석은 자진해서 나가라!”고 합니다.
먹어대기만 하던 개구리가 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얘, 붕어야! 앞으로 너 못 보겠다!”
우리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소리를 들으면 우리들은 불행한 사람, 결과가 좋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좋은 소리를 들으면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이 되고, 결과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들의 삶은 결과가 좋은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P4.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정착하여 살던 애굽이라는 나라를 떠나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이제 홍해도 건넌다.
홍해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물론 멀리 육로를 따라서 돌아서 애굽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홍해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전제되는 것이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200여만 명이 되는데, 이들 중에는 분명히 애굽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이들도 있을 수 있다.
200여만 명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과 생각과 의지로 애굽을 떠나고 싶어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여만 명이면 생각이나 마음이나 의지가 제각각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0여만 명이면 생각이나 마음이 200만 개 되는 것이고, 입이 200만 개가 되는 것이다.
귀와 눈이 400여만 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서로 다른 생각과 마음이 있을 것이고, 보는 눈이 다르고, 듣는 귀가 다를 수밖에 없다.
200여만 명들중에서 굳은 의지와 각오로 출애굽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개중에 어떤 이들은 비록 종살이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았어도 지금까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데, 고향을 떠나서 어떻게 사냐? 하는 생각 때문에 애굽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이들도 있을 수 있다.
35000여 명의 새터민들이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이주하여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고 있다.
대략 북한 인구가 2500만 명이라고 가정할 때, 모든 북한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김일성 3부자의 노예로 살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과 핍박과 인권유린을 당하면서 살았어도 어떻게 고국과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느냐? 하면서 아직까지도 인간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북한 땅에서 살고 있다.
새터민들이 자유대한민국으로 넘어와서 북에 남겨둔 가족들이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서 자유 대한민국으로 모셔오려고 해도 고국과 김씨 일가를 배반할 수 없다고, 고향을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돈이나 보내달라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라산줄기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지긋지긋한 노예살이, 종살이하면서 살았지만, 지금까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어떻게 버리고 떠날 수 있느냐? 하면서 주저주저하면서 망설이던 이들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웃들이 급하게 서둘러서 떠나니까 어쩔 수 없이 덩달아 출애굽의 대열에 합류한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본래부터 출애굽을 떠나고 싶지 않았었기 때문에 사사건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왜 우리들을 이 험난한 곳으로 이끌어내어 이렇게 개고생시키냐?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무리들로 돌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건이 터질 때마다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 이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200여만 명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과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의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모세와 아론과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동조하는 것이다.
어쩌면 원망하고 불평했던 사람들보다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고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에는 출애굽과 홍해를 건너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요 행복이요 구원이요 축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불만투성이, 원망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과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광야 생활을 시작하고 적응해 나가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민족으로 세워나가실까?
D4.
①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
출애굽과 홍해를 건넘으로 완전히 애굽의 압제와 그늘에서 벗어난 이들은 자신들을 권능과 권세로 이끌어내시고 앞뒤로 둘려쌓여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막아주시고 건져주시고 지켜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다.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권능과 권세를 찬양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역사해 주심을 찬양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애굽제국을 징벌하시고 구원해 주심을 찬양한다.
이들은 400여 년 동안 애굽제국에서 지긋지긋한 종살이,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음을 찬양하고 경배드리고 있다.
이제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신 땅,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드리며 경배하고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심에 감사하며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려드리는 찬양과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과 대자연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의 찬양과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려드리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이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는가?
훌륭한 음악성과 탁월한 악기 연주와 모든 성도들이 한목소리로 하모니를 이루면서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일이겠는가?
그런데 과연 성경 시대에도 지금 현대인들의 추구하는 훌륭한 음악성과 탁월한 악기연주와 하모니를 이루면서 찬양대가 찬양하고 유능한 성악가가 부르는 찬양만을 추구하였을까?
물론 할 수만 있다면 훌륭한 음악성과 탁월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찬양대원의 화음으로 올려드리는 찬양을 올려드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들이 골고루 갖추어져서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웅장한 찬양대가 찬양할 수 있는 교회가 몇 교회나 될까?
어쩌면 개척교회는 꿈도 꿔보지 못하는 상황이 아닌가?
훌륭한 음악성이 없더라도, 화려하고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아니더라도, 하모니가 제대로 갖추어진 찬양대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역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을 다하여 감사드리며 온 몸으로, 온 맘으로, 온 영혼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노래를 부르는 탁월한 기술로 노래는 잘 부를 수 있지만, 입으로, 기술로 찬양곡을 부를 수 있지만, 영성이 있는 찬송을 부르는 것은 쉽지 않다.
비록 노래를 부르는 음악성이나 기술이나 음정이나 박자가 서로 맞지 않아서 엇박자를 내더라도 찬송을 올려드리는 신앙인의 가슴으로, 심장으로, 예수님의 심정으로, 온 몸으로, 온 맘으로, 온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물론 음악의 음정, 박자, 리듬 등등 기술이 탁월하게 찬양을 부를 때에 영감과 은혜가 넘치는 찬양을 올려드리면 더 좋다.
미리암과 여인들은 소고를 들고 소리내면서 찬양하고 있다.
소고는 템버린과 비슷한 악기이다.
소고는 나무테두리에 소가죽을 입히고 20개 정도의 쇠고리를 달아서 흔들면서 소리가 나게 하는 악기이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릴 때 동원할 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어떤 악기든지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하는 악기들이 여러 종류가 등장한다.
그 악기들은 성경 시대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악기이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에서 사용하는 모든 악기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어떤 악기는 사용할 수 있고, 어떤 악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시키는 것은 없다.
유럽의 어떤 교회들은 악기 사용 자체를 금지시키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음성으로만 찬양하도록 하는 교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성경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미리암은 소고를 흔들어서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면, 다윗은 거문고와 비슷한 수금을 가지고 연주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드리기도 한다.
그러기에 어떤 악기든지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영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연주에 사용할 수 있다.
어떤 악기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데에 사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악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악기든지 사탄과 마귀와 어둠의 세력들을 숭배하는 일에 사용하면 마귀를 위하여 사용하는 악기가 되는 것이다.
누구를 높이고 찬양하고 경배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31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를 올려드리는 삶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인들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신앙인이다.
② 마라(Marah)의 쓴 물이라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를 지나서 3일 길을 행진한다.
그런데 3일 길을 행진하는데 마땅하게 마실 수 있는 식수를 찾을 길이 없다.
가까스로 식수를 얻는가 했더니 너무 써서 식수로 마실 수 없는 물이다.
그래서 이름을 마라(Marah)라고 붙인다.
마라는 쓴 것이라는 의미이다.
룻기에서 보면 나오미라는 여인이 베들레헴에 발생한 기근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건너가서 10여 년 사는 동안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게 된다.
청상과부가 된 모압 여인 룻이라는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구나.’ 하면서 환영한다.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라고 말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똑같은 ‘마라’라는 단어인데 출애굽기15장에서는 ‘쓰다. 쓴 것’이라고 설명한다.
룻기에서는 ‘괴로움, 쓰라림’이라고 해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쓴 것이나 괴로움이나 쓰라림이나 의미는 다 똑같다.
식수를 구할 수 없는 형편에서 겨우겨우 물을 찾았는데 너무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기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고 쓰라린 것이다.
이렇게 쓴 물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게 된다.
백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합니까?”라고 하면서 모세를 향하여 원망한다.
백성들의 원성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 어떤 나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한 나무를 가르켜 주신다.
모세가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써서 마실 수 없던 쓴 물이 순간적으로 단물로 변화되어서 백성들이 마실 수 있게 된다.
3일 동안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하던 백성들이 마음껏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는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3일 길을 행진해도 마실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목말라하고 있는데,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물을 주실 것이라면 마라의 쓰디쓴 물이 아니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시원한 단물을 주실 것이지 왜 마라의 쓴물을 주셔서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도록 인도하였는가? 라는 것이다.
‘마실 수도 없는 물을 주시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계획과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번째로 행하시는 이적이 바로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주는 이적이다.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신 이적은 곧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행한 이적과 같은 것이다.
가나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정결 의식을 위해서 사용하던 항아리에 하인들을 시켜서 물을 담았다가 곧바로 떠다 주었는데, 가장 맛있고 훌륭한 포도주로 바꾸어주시는 이적과 같은 성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적은 열왕기하4장에서 선지 생도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릴 때, 들에 있는 들호박을 따다가 죽을 쑤었는데, 독이 있어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이에 엘리사 선지자가 가루를 가져오라고 해서 죽에 넣었더니 해독이 되어서 먹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곧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주시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주시고, 맹독을 해독해 주시는 이적을 하나님께서 행해주시는 것이다.
쓴 물에 나뭇가지를 사용하는 그 나뭇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 때 사용한 물항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맹독이 가득한 죽 솥에 가루를 넣은 그 가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기적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말씀으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이미 다 만들어주셨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천지 창조하신 이후에는 이미 창조해 주신 것을 가지고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길로 인도해 가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쓴 물이라도 있어야 이적을 베풀어서 단물로 만드는 것이다.
항아리에 정결에 사용하는 물이라도 있어야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다.
맹독이라도 들어가 있는 죽이 있어야 해독하여 먹을 수 있는 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 갓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된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이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마라의 쓴물을 주시는 것이다.
마라의 쓴물이라도 있어야 단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신앙인이라도 있어야 그들을 전도하여 신앙인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새로운 변화의 길로 인도해 가시는 분이다.
③ 율례와 법도를 정하시고 치료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려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뭇가지를 가르쳐 주셔서 그 나뭇가지를 마라의 쓴물에 던졌더니 단물로 바뀌게 된다.
마라의 쓴 물을 마실 수 없었던 백성들이 단물로 변화된 물을 마시면서 목마름을 해결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 마라의 쓴 물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도와 율례를 정해 주시면서 시험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25-26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 대하여 율례와 법도를 정해 주셨는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당시 출애굽한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백성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합당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율례와 법도가 아닐까 싶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 되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선결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선결 조건을 잘 이행하게 되면 애굽에 내렸던 각종 질병, 재앙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선결 조건이라는 것은
ⓐ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잘 들으면서 사는 것이고,
ⓑ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 지키면서 사는 것이고,
ⓒ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를 행하며 의인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정결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결 조건이다.
이런 선결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은 애굽에 내렸던 각종 질병과 재앙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바로 지금 막 출애굽하여 수르 광야에서 마라에까지 이동한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곧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들을 가르친다.
우리 신앙인들을 치료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치료하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라파(Jehovah-Rapha)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 신앙인들, 성도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라파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공생애하시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두신 사역이 바로 치료하시는 사역이다.
예수님은 치료하는 사역, 라파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들 중에 하나도 치료하는 사역이 들어있다.
누가복음 9:1-2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전도를 보낸다.“라고 기록하고 계신다.
전도하러 나간 제지들은 누가복음9;6절에서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각종 병을 고쳤다고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치료하는 사역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치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부어주셔서 제자들이 직접 귀신도 쫓아내고, 각종 질병들도 고쳐주고, 불구자들도 고쳐서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회복되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각종 질병이나 악한 영들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시고, 정결한 백성으로 치료하고 회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
예수님의 이런 사역이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사야서61;1-3절에서 메시야가 오시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회복과 치유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마라와 같은 쓴 고통, 괴로움, 질고, 장애, 죄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라파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회복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하고 정결한 백성으로 세워가는 것이다.
④ 은혜의 샘물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 다시 출발하여 엘림에 이르게 된다.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라의 쓴 물을 지났을 때 하나님은 엘림이라는 은혜의 샘물을 허락해 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림에 장막을 치도록 하고 계신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쓰라진 고통, 고난, 시련, 역경 끝에 달콤한 내일이 온다는 말이다.
고통이 없으면 얻어지는 수확도 없다.
No pain, No gain이라 한다.
No Cross No crown이라고도 한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땀 흘림의 고통, 십자가가 있어야만 영광과 얻음과 소득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라가 없었다면 엘림이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라가 있었기 때문에 엘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싸구려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라는 것은 피 흘림의 고통, 십자가의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어야만 얻어지는 값진 대가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런 수고도 없이 주어지는 공짜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고통과 십자가의 수고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흘리신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예수님께서 대신 흘려주신 것이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신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면서 죽어주셨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과 죽으심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온 몸과 맘과 영혼으로 느끼고 인지하고 고백하면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고난과 고통과 역경과 시련과 십자가가 있을 때 더욱 더 값진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L4 & B4.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어떤 마라와 고통과 시련과 역경과 십자가의 모습들이 있을까?
지금 우리 신앙인의 삶에 마라와 같은 고통, 시련과 역경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곧 엘림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삶이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정말 견디기 어렵고 힘들어서 죽을 만큼 아픔이 있다면 곧 하나님께서 엘림의 하나님으로 찾아와 주실 것이다.
캄캄한 밤 시간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빨리 새벽이 찾아오듯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처지요 환경이라면 곧 하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물로 인도하시면서 평강의 은혜를 주실 것이다.
해마다 태풍이 불어온다.
태풍이 불어올 때마다 온 나라와 국민들이 초긴장하면서 대비한다.
작년에도 많은 태풍이 올라오면서 많은 피해를 입혔지 않은가.
올해에도 몇 번의 태풍이 우리 한반도로 몰려와서 위협해 올는지 모른다.
그런데 태풍이 위험한 것은 태풍의 주변에 들어갈 때 위험한 것이다.
태풍의 눈에 해당하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안락 그 자체이다.
세차게 몰아지는 파도도 깊이 들어가면서 안락 그 자체이다.
고통, 고난, 역경, 시련, 십자가도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그 고통과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십자가의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깊은 안식과 같은 평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처럼 우리 내면의 세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깊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감동으로 가득 채워주시면 그야말로 고요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고난과 시련과 역경의 십자가를 만나더라도 초연하게 그것들을 즐기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다.
아울러 믿음의 경주를 잘 마친 신앙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4:7-8절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고백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과 영광의 면류관으로 씌워주리라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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