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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질투심 (창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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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질투심 /창세기30;1-24(200726)


 






가게에 못 가도록 하는 이유


 


쌀가게 주인이 부인에게 “오늘 고기를 사려면 박씨 집 정육점에 가지 말고 다른 정육점에 가서 사 오도록 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인이 놀란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며 “아니 왜요? 우리 단골집이고 박씨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가지 말라니, 싸우기라도 했나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싸운 게 아니구....가지 말라면 가지 말아요.”


“아니. 왜 그래요? 무슨 이유가 있을게 아니예요?”


“아이...박씨가 오늘 아침에 우리 집 저울을 빌려 갔단 말이요!”


결국 지금까지 자신들이 잘못된 저울을 사용하여 쌀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저울을 사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저울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합당한 저울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 사용하여 부당하게 살면 안 됩니다.


저울은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눈동자처럼 쳐다보시는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말을 듣고 계시고, 우리의 생각 하나하나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P4.


 


야곱은 밧단아람의 외삼촌 댁에서 20년을 사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동지역은 혼인을 하려고 하면 결혼지참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야곱은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20년 사는 동안에 14년은 결혼지참금 비용을 갚는 시간으로 사용이 되어진다.


그리고 6년은 자신의 기업을 세워가는 기간으로 사용하게 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산 20년에서 7년 동안은 오직 라헬 한 여인을 위해서 결혼지참금을 갚은 형태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레아와 라헬과 혼인한 이후 13년 동안에 4여인을 통해서 12남매를 낳고, 자기 기업을 세운 이후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게 된다.


13년 동안 야곱의 여인들은 서로 많은 아기 낳기 대회라도 여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두 여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다른 두 여인은 두 여인의 주도하에 따라 가는 형극이다.


두 여인은 주인의 입장이고, 다른 두 여인은 몸종의 입장에서 아내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두 여인의 주도하에 야곱은 데릴사위 신분이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두 여인의 조종에 의해서 움직여야 하는 종의 신분으로 아이 낳기 대회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 이들 여인들은 어떻게 야곱에게 아이를 낳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


레아와 라헬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D4.


 


① 질투로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9;16-17에 보면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두 여인을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원문성경에서는 레아는 눈이 부드러운 여인이고, 반면에 라헬은 용모가 예쁘고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두 여인은 자매지간이면서도 서로 이기기 위해서 경쟁하는 사이였다.


서로 지지 않고 이기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는 여인의 삶을 산다.


레아는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에 비하여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못내 아쉬워하는 여인이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는 못하지만, 대신에 4명의 아들을 낳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 여인이 된다.


라헬은 분명히 언니보다는 자신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는데, 언니는 아들들을 많이 낳는데, 자기는 전혀 임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라헬은 아들을 쑥쑥 낳는 언니를 질투하면서 남편에게 자기도 임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촉구한다.


야곱은 라헬에게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면서 역정을 낸다.


이에 라헬은 그러면 내 몸종인 빌하를 당신의 아내로 줄테니 빌하를 통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한다.


그래서 빌하는 주인인 라헬의 명령을 따라서 야곱의 아내가 되어 두 아들을 낳게 된다.


빌하는 단과 납달리를 낳게 된다.


그 사이에 레아도 다른 때 같으면 곧바로 임신이 되었는데, 이상하게 임신이 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레아도 자신의 몸종인 실바를 야곱의 아내로 주면서 두 아들을 낳도록 한다.


실바는 갓과 아셀이라는 두 아들을 낳게 된다.


하루는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하게 된다.


합환채는 야생식물로서 임신촉진제로 알려져 있는 식물이다.


르우벤은 합환채를 구해서 엄마인 래아에게 가져다준다.


그 모습을 본 라헬이 자신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하면서 대신에 남편과 잠자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


레아는 다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더 낳게 된다.


레아와 라헬과 빌하와 실바의 태를 열고 닫으시는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라헬과 레아가 서로 시기 질투하면서 아이를 낳으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임신이 되지 않는다.


세상적으로 임신촉진제 역할을 하는 합환채를 먹었어도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굳게 닫고 있는 한, 라헬은 임신이 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하신다.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신할 수 있도록 태를 열어주시기도 하시고, 임신을 할 수 없도록 태를 닫아버리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시면 아무리 임신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닌다 해도 임신하여 출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를 닫아버리면 아무리 임신하기 위하여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들을 기울인다 해도 임신이 되지 않는다.


라헬은 르우벤이 구해온 합환채를 먹고도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시지 않으니까 임신이 되지 않는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약을 다려먹고, 임신을 촉진해주는 영양주사를 맞으면서 배란주기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도 자연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에서는 자연임신이 되지 않으면 다양한 인공임신 방법을 동원하여 임신하려고 노력하고 힘을 써보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레아와 빌하와 실바를 통해서 10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라헬이 자신만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으로 한없이 약해지고, 가슴 저린 한을 보시고 비로소 라헬의 태를 열어주시면서 요셉을 낳아서 아이 못 낳은 여인이라는 수치심에서 벗어나도록 역사해 주신다.


그런가 하면 다른 여인들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산통이 너무 심하여 아들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도 한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질투함으로 자신의 몸종을 남편의 아내로 주면서 아들들을 낳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서로 질투함으로 벌어지는 잡다한 상황들까지도 수용하면서 자녀들을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분이다.


만약에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언니가 많은 아들들을 낳은 것을 보면서 조카를 아들처럼 여기면서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단과 납달리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레아도 마찬가지로 동생 라헬이 임신하지 못해서 몸종인 빌하를 통해서 아들들을 낳을 때, 얼마나 아들을 낳고 싶었으면 저렇게 하겠어? 하면서 이해하고 넘어가고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실바를 통해서 아들을 더 낳으려고 했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갓과 아셀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실바와 빌하도 두 아들 외에 더 많은 자녀를 낳고 싶지 않았을까?


어쩌면 실바와 빌하는 주인인 레아와 라헬보다 더 젊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자녀를 낳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실바와 빌하에게 더 이상의 태를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야 더 많은 자녀를 낳고 싶었겠지만, 두 아들을 낳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나님은 4여인을 통해서 야곱에게 12명의 아들을 낳도록 하여 12지파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실바와 빌하에게 더 이상 태를 열어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와 축복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된 셈이다.


빌립보서 1;17-18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들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가 아파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으로 보란 듯이 더욱 더 열심히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전하든지 결국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너무너무 기쁘고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니까 나는 그보다 더 잘해서 인정받고 성공해야지 하는 마음은 분명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 결과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학생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옆에 경쟁자가 있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다.


경쟁자가 없으면 더 공부를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더 공부를 잘해서 누구를 이겨야지 하는 경쟁심이 없으면 나태하게 되고, 공부하기 싫어하게 된다.


뛰어난 스포츠 선수가 되는 것도 옆에 경쟁자들이 있어서 그 선수를 이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경쟁하며 연습하고 훈련할 때, 뛰어난 선수가 되는 것이다.


공산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이 바로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균등하게 잘 살아도 똑같이 잘 살아야 하고, 못 살아도 다 똑같이 못살아야 한다는 기본원리가 경쟁하지 않는 안일한 사고체계로 만들어서 모두가 못 살게 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누군가와 경쟁하여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연구를 하게 되고,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면서 더 많은 아이디어를 창출하려고 경쟁하며 노력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점점 더 성장하고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경쟁하는 사회이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결국 경쟁하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기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바쁘지만은 않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하나님의 원대한 포부와 계획을 실행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② 온전한 이스라엘 민족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해 나가시는 하나님.


 


라헬과 레아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서로 아들 낳기 대회를 열었지만, 결국에는 야곱에게 12아들을 낳아 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측면에서 복된 것이다.


결국 라헬도, 레아도 시기, 질투함으로 몸종을 통해서라도 더 많은 아들들을 낳고 싶은 욕망 때문에 야곱에게 12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이 12명의 아들이란 숫자가 이스라엘 나라의 온전한 숫자가 된다.


대제사장의 에봇에 붙어 있는 12보석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상징이 되고, 12제자가 되고, 12문이 되는 기본적인 길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이기심, 질투심, 시기심을 사용하여 온전한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기본적인 틀로 활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못나고 더러운 인격, 인품, 성품, 마음과 생각까지도 활용하여 하나님의 귀한 복음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잘난 개성이나 지성만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시지 않는다.


때로는 어떻게 이런 것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 싶은 것들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활용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필요치 않은 것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까지도 다 활용 값어치가 있는 것들이다.


늘 부족하고 연약하고 넘어지는 우리들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귀한 것들이 된다는 것이다.


늘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겁쟁이인 우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을 사용하고 싶어하셔도 “예, 저를 사용하세요.”라고 내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③ 고난의 대가를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


 


야곱은 20년 외삼촌 댁에 조카요 데릴사위 자격으로 살았지만,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마치 종처럼, 노예처럼 살았다.


분명히 야곱은 아기씨를 주어서 낳은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어느 자식에게도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다.


그 당시의 사회문화는 주인만이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이름을 붙여주는 이가 주인이라는 의식에 의해서 살던 시대이다.


그러니 분명히 야곱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야곱이 자식들의 이름을 직접 붙여주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밧담 아람에 사는 동안 낳은 아들들에게 야곱은 이름을 직접 붙여주지 못한다.


대신에 주인 노릇을 하는 레아와 라헬이 이름을 붙여준다.


레아와 라헬은 주인이요 야곱은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신분에 불과했기 때문에 주인 노릇을 하는 레아와 라헬이 자식들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심지어는 빌하가 낳은 두 아들도 주인인 라헬이 이름을 붙여주고, 실바가 낳은 두 아들도 주인인 레아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을 때,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베노니”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할 때, 비로소 야곱은 자신의 권리를 찾아서 “베냐민”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서 붙여준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을 때는 더 이상 종이나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 자기가 자유권을 가진 주인이기 때문에 주인으로 아들의 이름을 당당하게 붙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야곱은 처가살이하는 동안 온갖 냉대와 푸대접과 고난을 받으면서 20년 동안 눈칫밥을 먹으면서 서럽게 살아온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야곱은 이렇게 고생고생하면서 사람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살 것 같으면 차라리 고향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에게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라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려고 하니 허락해 달라고 한다.


라반은 야곱이 자기와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있음을 깨닫고는 야곱에게 충분한 보상을 할테니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함께 있으라고 회유한다.


비로소 야곱은 자신의 기업을 증식시킬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야곱은 계속 외삼촌의 양 떼들을 치는 대신에 조건을 하나 설정한다.


아롱진 것이나 점이 있는 것이나 검은색이 있는 양이나 염소나 다른 가축들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사실 야곱이 내걸고 있는 제안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상품은 아롱지지 않아야 하고, 점이 없어야 하고, 검은색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고 순백해야 한다.


아롱진 것이나 점이 있는 것이나 검은 것은 상품성이 뒤떨어지는 것들이다.


버리거나 죽여도 무방한 것들이다.


농부들은 상품성이 뒤떨어지는 것은 미련없이 버려버린다.


지난주에 부여에 갔었는데, 길거리에 노랗게 익은 파프리카가 한 더미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농부가 애쓰게 농사했지만, 상품성이 떨어지자 미련없이 버려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야곱에게는 상품성이 뒤떨어져서 버려도 무방한 것들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야곱이 상품 가치가 없어서 버리거나 죽여도 될 수 있는 것들을 자기 기업으로 삼겠다고 하니까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재산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야곱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해준다.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상해 주시기 위하여 튼튼하고 좋은 양이나 염소에게는 아롱지고 점이 있고 검은색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다.


야곱이 동원했던 방법을 현재, 지금도 똑같이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야곱이 했을 때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날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야곱에게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이다.


이런 과정을 야곱은 창세기 31:9에서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것들을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셨다고 야곱은 고백하는 것이다.


43절에서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건너갈 때는 맨손으로, 빈손으로 건너갔는데, 하나님은 4여인을 아내로 주었고, 12남매라는 자식을 주었고, 매우 번창하여 양 떼들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들을 많이 주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제는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금의환향((錦衣還鄕)할 수 있는 밑바탕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과 그두라 3여인을 통해서 8명의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8명의 아들을 다 품고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사라만을 아브라함의 정식 아내로 인정할 뿐, 하갈이나 그두라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고 첩으로 인정한다.


그러면서 정식 부인의 아들인 이삭만 남겨놓고, 다른 여인들이 낳은 7명의 아들에게는 약간의 재물들을 나누어주면서 떠나보낸다.


그런데 야곱은 4여인을 통해서 12명의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뿐만 아니라 빌하와 실바까지도 똑같은 야곱의 아내의 신분으로 인정하면서 언약 백성으로 인정해 주신다.


하나님은 4여인을 통해서 낳은 12명의 아들을 다 품고 가신다.


하나님은 여인들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아들 낳기 대회로 12아들을 낳게 하시고, 12지파의 온전한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세워주시고, 그동안 서럽도록 고난의 삶을 산 것에 대하여 풍성하도록 보상해 주면서 고향으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업을 형성시켜 주신다.


 


L4 & B4.


 


우리들 주변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수 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나쁘고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크고 높고 넓은 마음으로 본다면 어떨까?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된 속성, 못난 인격, 인품, 성품을 그대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 구원의 세계를 세워갈 수 있는 분이다.


인간의 좁고 얇은 생각의 테두리에 갇혀서 하나님의 원대한 포부와 크신 계획을 한정시키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생각과 아이디어는 한정적이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아이디어는 무한정적이다.


짧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에 더 이상 가슴 아파하지 말고, 좀 더 폭넓게 하나님의 무한정한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정죄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조롱하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그들이 가진 마음과 생각을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들은 다시 한번 더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모든 사건들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선을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호세아6;1-3에서 호세아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종끗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나님은 찢으시기도 하시고, 싸매어 주시기도 하시고, 질고와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그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질고를 고쳐주시기도 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더욱더 하나님의 크고도 놀라운 계획에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깊이깊이깊이 높이높이높이 넓게넓게넓게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바라봐야 하는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질투, 시기하는 마음도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하나님, 정결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과 계획과 주권을 성취해 나가시는 길에 우리의 작은 마음과 생각과 의지도 얼마든지 사용하신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오늘도 우리의 작으마한 믿음을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위해서 쓰임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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