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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교회 (약2:1-13)

본문

차별없는 교회


야고보서 2:1-13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이 땅에는 많은 차별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있었고 남자와 여자의 차별, 어른과 어린이의 차별, 지주와 소작농의 차별 등 수많은 차별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전래는 이런 차별을 무너트리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 기울어져 가고 있던 1904년 무렵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 목사는 사교가 우글거리는 전북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테이트 목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정읍 간을 말을 타고 왕래하며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 했는데 어느 날 그는 이 고장 마방의 주인인 조덕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고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보수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조덕삼이 먼저 마방의 손님인 테이트 선교사에 접근하였고 둘은 서로 많은 교제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드디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이래서 오래도록 기도하였던 테이트의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으며 금산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조덕삼 씨의 집에서 일하던 청년 마부 이자익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학교도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하여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 하였고 또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산교회가 성장하자 장로 한분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그만 투표에서 주인인 조덕삼 씨는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선출되고 말았습니다.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봉건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조덕삼 씨는 의연히 교회 앞에 나가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라고 전교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마부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두 사람이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그 뒤 조덕삼 옹도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시키고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금산교회에 초빙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세 번씩이나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에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조덕삼씨는 이자익이 자기 집 마부라고 하여 그를 무시하거나 장로가 된 것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깍듯하게 대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말라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고보 장로는 차별을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것이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종들 즉 노예였습니다.


노예는 한 마디로 주인에게 소속되어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재산이 따로 없었고 자기 가족도 없었고 자기 자신마저도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다 보니 경제적인 힘을 비롯해 어떤 힘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에 간혹 힘 있는 사람들이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반가운 것이고 당연히 그들을 대하는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에서조차 이런 모습을 보게 된 노예, 종들은 그렇게 편치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회를 향하여 야고보 장로는 ‘너희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든지 동일하게 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러 가지 차별을 갖고 있습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보듯이 가지고 있는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별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병폐적인 모습입니다.


돈을 가졌든지 권력을 가졌든지 기득권을 가졌든지 학력을 가졌든지 가진 자는 그 가진 것을 가지고 갖지 못한 자를 차별하고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기도 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어울리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경멸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나 다문화가정의 외국인을 바라보는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런 차별적인 태도는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런 차별적인 태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특별히 교회에서 이런 차별적인 모습이 없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런 차별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먼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것과 차별하지 말라는 것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은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은혜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당시에 교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노예 종들이었습니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택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들처럼 차별을 하신다면 이들은 절대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렇게 차별받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종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었기에 그들도 이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우리는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었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차별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차별 없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백 데나리온의 빚을 기꺼이 탕감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후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자기의 형상대로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고 생각하는 가치관도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 똑같은 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덜 귀하고 더 귀하고 귀함에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를 인간적인 잣대로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내 생각과 다르고 내 가치와 다르고 내 피부색과 다르고 내 수준과 다르면 잘못되었다고 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피부색으로 판단하는 것인데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흑인계통의 사람을 무시하고 백인 계통의 사람을 우러러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차별하는 경향은 자본주의 시대의 뚜렷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흑인이 무시 받아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얼굴이 검다고 세수를 안 하는 것입니까? 잘 씻지 않는 것입니까? 위생적으로 불량한 것입니까?


백인들이 얼굴이 하해다고 마음까지 하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못된 사람도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된 편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게 됩니다.


돈이 많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나,


반대로 돈 없는 사람이 깨끗하다고 생각하여 돈 많은 사람을 무조건 정죄하는 경우는 다 내가 중심이 되어 잘못 판단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돈 없는 사람이 우월할 수 있고 돈 많은 사람이 깨끗할 수 있습니다.


내 중심으로 판단하면 우리는 차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법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 최고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이 최고의 법을 지키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는 당연히 이웃 사랑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가지고 차별하면서 나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많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한 어머니에게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하세요?”


쉽지 않은 이 질문에 지혜로운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직 귀가하지 못한 아이가 있다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앨 가장 사랑하지요.


병이 난 아이가 있다면 완쾌될 때까지 그 앨 가장 사랑하지요.


마음에 상처 입은 아이기 있다면 그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그 앨 가장 사랑하지요.


잃어버린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찾게 될 때까지 그 앨 가장 사랑하지요!”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녀가 아프다고 상처를 입었다고 잃어버렸다고 절대 차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연약한 자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시기 원하시고, 우리가 입은 상처에 대해 연민을 품고 감싸주시고, 방황하기 좋아하는 마음들을 사랑의 포옹으로 안아주십니다.


이런 사랑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럴 때 우리는 차별하여 사람을 대하지 않게 됩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9절 말씀에 보면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이 좀 필요한데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율법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즉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서 해방되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율법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율법을 안 지키면 안 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유의 율법’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내 생각대로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에 가는 그런 심판은 아니지만 어째든 심판을 받습니다.


이런 심판에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긍휼을 받고 상급을 받기 위해 우리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형제를 차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차별 없는 사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이고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세상도 차별 없는 세상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사회도 차별 없는 사회입니다.


차별이 없기에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보내면서 차별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차별 없는 하나님의 나라만 바라보지 말고 이 땅에서 차별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회를 차별 없는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정말 누구나 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인정받고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차별 없는 교회, 그래서 누구나 오고 싶어 하고 누구나 머물고 싶어 하고 누구나 이곳에서 행복을 누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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