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하루살이와 낙타 (미6:6-8)

본문

하루살이와 낙타


(미 6:6-8, 요일 4:7-21, 마 23:23-24)


 


우리의 삶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종종 그렇게 큰일도 아닌 것들에 지나치게 흥분을 잘 합니다. 작은 문제와 걱정에 초점을 맞추고는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시키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주 고약한 버릇이지요.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어떤 차가 얌체같이 소위 칼 치기로 내 차 앞으로 파고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냥 내버려두고 가던 길을 가기보다는, 화를 내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보복운전을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머릿속에서는 그 운전자와 맞서 싸우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일을 단순히 잊어버리지 못하고, 기어이 나중에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야만 속이 풀립니다.


 


하지만 들어오는 차 막으면 사고 난다는 생각으로 양보하면 어떨는지요? 또한 얼마나 급하면 저렇게 서두를까? 혹시 화장실이라도 급하겠지 하면서 양보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타인의 리듬에 지배받지 않고 행복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문제에 연루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이와 비슷한 사소한 사건들이 널려 있습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거나, 부당한 비난을 들어야 하거나, 억울하게 힘든 일을 맡아야 하더라도, 사소한 일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 법을 미리 터득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에너지를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느라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삶의 신비와 인생의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지난 달 종로의 한 여관에서 자신의 욕구가 거절당하자 화를 참지 못한 사람이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를 사서 불을 질러서 다섯 명이나 죽었습니다.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니요,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너무도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은 너무도 크게 여기고, 너무도 소중한 것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너무도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활의 영역에서만 나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사소한 것은 너무도 중요하게 여기고, 너무도 중요한 일을 무시하는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독설입니다. 흔히 마태복음 23장을 예수님의 욕 장이라고 말합니다. “화있을진저”가 연거푸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독설가였습니다. 위선자, 어리석고 눈먼 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 저주를 받을 놈들. 이게 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이런 욕들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한 것이 바로 24절에 나오는 “하루살이를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살이처럼 지극히 작은 일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낙타와 같이 거대한 악에는 나 몰라라 외면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예수님의 독설을 읽으면서 통상적으로 제 안에 각인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 점잖고, 인자하고, 자비롭고, 미소 띤 모습과는 상반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소 의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예언자들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이보다 더한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관리들, 종교 지도자들, 불의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인권 변호사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예수님 역시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힘없는 자, 병든 자, 짓밟히는 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비로우셨지만, 이유 없이 남을 억압하고, 군림하고, 욕심에 사로잡혀서 눈이 어두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하다 못해 욕설을 퍼부으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당시 종교지도자나 율법학자들은 술꾼이요, 먹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놀렸고, 무식한 선동가라고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종교지도자들을 행태를 책망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자했던 율법주의 신봉자들입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그 율법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기는커녕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이나 가르침은 별로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어떤 사람이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까? 뭐든지 말로 다해버리고 정작 책임져야 할 일들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말에 책임을 지고, 혹 말은 없어도 묵묵히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은 구약의 정결 법에 따라서 먹을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을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정결한 음식은 먹어도 되었지만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루살이나 낙타는 둘 다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음식이었습니다. 하루살이는 눈에 보이는 곤충 중에서 가장 작은 날아다니는 날 파리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낙타는 팔레스틴지방에서 눈에 띄는 동물 중에는 가장 큰 짐승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루살이는 조심스레 걸러내고 낙타는 통 채로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위선자들은 하루살이 같이 작은 죄는 안 지으려고 까다롭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낙타와 같이 큰 것은 그대로 집어삼키는 것과 같이 큰 죄는 겁도 없이 저질렀었습니다. 하루살이와 낙타는 크기나 모양이 비슷해서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해서 누구라도 오해의 소지가 없습니다. 하루살이와 낙타는 애초에 비교의 감의 감이 되질 않습니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을 비교해야지요.


 


이 비유에는 예수님의 유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아람어에 하루살이와 낙타는 발음이 아주 비슷합니다. 하루살이는 갈마(galma)이고, 낙타는 감나(gamla)입니다. 발음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알파벳의 L과 M이 자리만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유희에 속하는 것으로 일종의 말 비틀기에 속한 유머입니다. 발음은 비슷하지만 크기는 극과 극입니다. 목구멍으로 하루살이가 쉽게 넘어가지 어찌 낙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이것은 조크이며 풍자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행하여지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성서의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물 대신 포도주를 많이 먹습니다. 때로는 약으로 복용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포도주를 오크통이나 유리병에 보관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다 보관했습니다. 가죽 부대를 그냥 두면 하루살이가 들어와서 빠지는 경우가 자주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포도주를 부을 때 세마포나 채를 받혀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마셨습니다. 그냥 먹으면 하루살이를 먹을까 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하루살이도 부정한 것이고 낙타도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다 먹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날개가 있고 기어다는 발이 있는 곤충은 가증한 것이라서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물 중에서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동물도 먹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낙타는 되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은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하루살이도 낙타도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먹었습니다. 하지만 낙타는 통째로 집어삼켰습니다. 쉬운 것을 걸러내고, 어려운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작은 것은 대단하게 여기고, 큰 것은 무시했습니다. 이런 인간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합니까?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행위 하나로 나 율법을 지키고 있어! 말하는 위선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요?


 


오늘 이 말씀은 낙타도 먹어서는 안 되고 하루살이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혹시 꼭 먹을 수밖에 없는 경우라도, 또는 실수로 먹게 되더라도 하루살이라면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인들은 낙타는 꿀꺽 삼키면서 하루살이는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이라고 소란을 떨고 있었습니다. 소위 이런 것을 가리켜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들 말하지요.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23절에 보는 바와 같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릴 정도로 율법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이것은 허브 과에 속하는 식물인데 한 장씩 헤아려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우리씩으로 하면 깻잎 장수 헤아려서 십일조 드린 것입니다. 상추 한 장씩 헤아려서 십일조 드린 것입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물론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작은 것을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깻잎 한 장도 헤아려 가면서 지켰는데 정말로 소중한 것, 너무도 중요한 것은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저들이 지키지 않고 집어삼킨 낙타라고 책망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습니다.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버렸습니다. 종교(宗敎)가 무엇입니까? 마루 종(宗)에 가르칠 교(敎)입니다. 근원을 일깨우는 가르침입니다. 근원을 일깨우는 종교가 하루살이만 걸러내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농산물이나 과일의 십일조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농산물에 관한 십일조 규정으로,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농산물이나 과일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규정을 야채에까지 확대시켜서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지켜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의 보다 중심적인 것들, 곧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문제, 이웃에 대해 베풀어야 하는 자비의 문제, 인간관계에서 중요시 되어야할 신의 문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되는 이것들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하루살이와 낙타의 비유로 풍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바리새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것이고, 그들이 놓치고 있는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믿음은 너무도 크고 소중한 낙타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은 바로 하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정작 큰 것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똑바로 하지 아니하면서 그렇지 않는 것에는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도 어기면서 인간이 만든 법이나 유전은 어기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칩니다.  예수님은 이런 당시 종교인들의 모습을 풍자적 비꼰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보다 7백년 앞서서 활동했던 예언자인데 북 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목격하고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는 나라가 왜 망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도 표현만 달랐지 예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다르다면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고, 미가 선지자는 예배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망해 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내가 번제물로 송아지를 드릴까? 천 천의 숫양을 드릴까?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드릴까? 이마저 부족하다면 내 맏아들을 번제로 태워서 드릴까? 아니면 몸을 자해해서 피를 철철 흘리는 내 몸을 드릴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기뻐하는 예배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며, 사람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송아지도 하루살이입니다. 천 천의 숫양도 만만의 강물도 하루살이입니다. 심지어 맏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도, 자기 몸을 자해해서 드리는 것도 하루살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것들은 걸러내고,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삼키지 말아야 하는 정의를 삼켜 버렸습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저들은 너무도 큰 낙타 정의를, 너무도 큰 낙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너무도 큰 낙타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집어 삼켰습니다.그러고도 하루살이 같은 제물을 무엇으로 드릴까 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너무도 신랄하게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미가 6장 6절에서 8절 말씀을 구약성경은 최고의 구절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가는 동 시대를 살던 예언자 세 명의 목소리를 한 절에 담아 놓았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고 외쳤던 아모스의 정의. 예언자이지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했던 호세아의 사랑. 왕족이지만 겸손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지자의 길을 걸었던 이사야의 하나님과 동행. 미가는 정의를 행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너무도 중요한 낙타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물을 어떤 것으로 드리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는 제물, 사람을 사랑함이 없는 예배,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는 신앙은 그야말로 하루살이만 걸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시시한 것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까?


 


신앙이 늙고 비대해지면 형식은 살아있는데, 본질은 사라집니다. 껍데기는 붙들고 있는데, 알맹이는 없어집니다. 신앙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해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식주의의 노예가 됩니다. 형식주의에 묶여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기가 고수하고 있는 형식주의 자체가 구원이라고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바로 이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종교적 형식만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느꼈습니다. 몽골교회 교인 중에 숭실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지난 주중 이 자매 아버지가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을 만나러 왔습니다. 지난주일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에 팔이 잘 올라가지 않아 응급처방으로 약국에 약을 사러갔다가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심장병이었는데 수술하다가 그만 죽었습니다.


 


몽골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사람도 죽고, 병원비도 천 오백만원이 나왔다는 겁니다. 난감한 상황이지요. 어디서 천오백만원을 구합니까? 그런데 병원 이름이 아주 낯익은 병원이었습니다. 이 병원 이사장이 저와 함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서 공동대표를 맡아 북한 어린이 돕기에 동참하는 의사였습니다. 제가 움직일 만한 사람을 중간에 연결해 놓고 “하나님, 이왕 탕감 받으려면 돈 하나도 안내고 장례 치르게 해주십시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전화가 와서 천오백만원을 다 탕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화요일 저녁에 집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숭실대 김명배 교수가 독일교회 목사님 E-메일 가르쳐 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숭실대 이 자매가 다니는 학교가 아닙니까?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때 전화 오는 것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무슨 흐름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김명배 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더니 자기네 학교에는 구제비 성격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없고 방법을 간구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두 시간 후에 전화가 왔는데 이미 장학금은 70% 받고 있어서 더 줄 수 있는 규정은 없고, 대신 몽골자매에게 조교 자리를 알선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총장께도 이미 보고를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비롭게 역사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저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저보고 해 준 것 아닙니다. 저를 아는 사람이 해 준 것도 아닙니다. 우리 갈릴리교회가 북한 어린이에게 밥을 나누어주고 힘없는 나그네를 사랑하는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셨습니다. 마치 시나리오를 짜놓은 각본처럼 움직여나갔습니다.


 


지난 토요일 어머니 장례식을 치렀다는 분이 감사헌금을 들고 저에게 인사하러 왔습니다. 포스빌 뒤쪽에서 사랑을 도시락을 받던 김모 할머니의 딸인데 사랑의 도시락을 배달해 주어서 감사 인사하러 왔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사랑의 도시락을 평상시도 잘 드셨지만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드신 음식이 갈릴리교회에서 배달한 도시락이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딸로부터 우리 어머니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갈릴리 사랑의 도시락이었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하루살이 같은 종교적 계명뿐만 아니라 낙타와 같은 큰 계명 정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풀고, 신의를 지키며 살아가십시오. 무엇보다도 약자와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것은 최고의 제물임을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사람을 사랑하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신비로운 경험을 누리기를 소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2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