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이 되기를 (행26:1-32)
본문
나와 같이 되기를(행26:1-32)
(행26:1-32)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1.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정부에 반대하여 정치적인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려 8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고생을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인 마틴 리뮬러라고 하는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이 나라를 건지려면 히틀러가 죽어야 된다. 저 히틀러는 적그리스도다. 2차대전을 일으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정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8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목사님은 아주 한이 맺혔습니다. 그야말로 히틀러를 향해서 “이 원수, 이 죽일 놈”하며 있는대로 욕을 다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아무리 소리지르면 뭐합니까? 어쨌든 이렇게 원한을 품고 그 많은 고생을 하다가 2차대전이 끝나면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얼마나 자유로워하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히틀러는 이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목사님은 무려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 심판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차례차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문득 큰 소리로 심판을 받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듣자하니 누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온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하게 “너는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고?”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인 대답하는 말이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낯익더랍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심판받는 사람을 봤더니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일곱 번이나 꾼 목사님은 마침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히틀러가 저렇게 된 것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백서의 내용을 바꿉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교회가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이 나라 민족이 어렵고 잘못되면 이는 바로 나와 내 교회가 복음 전도의 사명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민족 복음화에 전심전력을 다 하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 있는대로, 핍박이 있으면 핍박이 있는대로, 재판받을 때는 재판받는대로, 어디서든지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애의 목적을 삼고 전심전력을 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통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렉캄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 일가의 창시자인 헤롯 대제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애썼다. 그의 아들이며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목을 베어 죽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여우’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손자 아그립바 1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아그립바의 아들 앞에 불려 나온 것을 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겸손한 사도 바울이, 대를 이어 진리와 의를 반대했던 이 세속적이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기 그지없는 헤롯 일가의 대표자 앞에 서 있는 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로마인이 잘 알지 못하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에 대한 권위자였으므로, 비교적 바울의 문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고, 따라서 바울은 그로 인하여 로마 총독에게 자신의 무죄를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그립바 왕은 예수를 재판한 헤롯의 조카였고,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유대교에는 정통했지만, 진리에 관하여는 무지한 자였기에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증거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이를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바, 바울은 죽음을 불사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외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변증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 자신이 현재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를, 그의 과거 삶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파노라마처럼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을 마치 필름을 통해 영화를 보듯이 일목 요연하게 설명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신이 유대인에게 송사받은 이유를 먼저 설명한(4-7절) 다음, 개종 전의 삶과 개종하게 된 동기(8-15절) 및 개종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도의 사명(16-23절) 등을 자신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연관하여 조리있게 설명해 나갔습니다.
2. 먼저 바울은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 살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그는 철저히 유대 종교 옹호자로, 그리고 바리새파의 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서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을 가차없이 박해했던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6:10-11)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사도 바울은 예수믿기 전, 변화받기 전에 저질렀던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과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기를 생각하며 자기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도 놀랍고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손수 운전을 하시며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태우고 심방을 가는 중에 오고간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동안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장로님, 저 앞차의 번호판을 보니 옛날 믿지 않던 시절 화투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이에 장로님은 의아한 듯 쳐다봅니다. “저 앞차 차번호가 아주 좋습니다. 992짓고 4가 둘이니 4땡이네요.” 장로님은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넙죽 받아 하는 말이, “목사님, 저것은 992짓고 4땡이 아니라 442짓고 9땡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집사님이 거들기를, “그런걸 보고 쌍땡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고 하는 것이 아닌가! 세 분이 하던 얘기를 옆에서 조용히 들으시던 권사님이 웃으시며 입을 엽니다. “다 과거가 있는 분들이군요.” 하나님의 종 바울도 부끄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었지만 기탄없이 자신의 과거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밝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에는 그 과거에서 온전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변화된 현재의 모습이 있다면, 과거의 변화받지 못했던 부끄러운 모습은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구원얻기 전의 상태가 없으면 구원얻은 후의 변화와 차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행26:12-15)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본 것입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거꾸러뜨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낮아지는 회개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본문(12-18절)은 꿈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온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役事)라는 것을 이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 ‘아그립바 왕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이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듯 극악무도했던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이 사건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내가 이런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도 바로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지금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게 이런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록 하나의 사건이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과 목적이 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1:15-17)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예수께서는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벌써 어머니의 태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예정하시고 확정하셔서, 다메섹 사건을 통해 은혜로 바울을 부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행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만 실컷했다는 고백입니다. 여기 ‘가시채’는 소나 말 등이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길들여지지않은 소나 말은 멍에를 메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고자 하면 그것을 매지 않으려고 자꾸 뒷발질을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뒷발질해서 닿는 부분에 송곳같은 것을 박아두어서 뒷발질할 때마다 찔리게 만듭니다. 몇번 뒷발질하다가 찔리고 나서야, 정신이 나서 비로서 고분고분하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사울아, 이제 내가 네게 멍에를 씌워 놓았으니 버둥대지말고 고분고분따라 오너라. 딴 생각먹고 뒷발질하다가는 너만 고생당한다.’ 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으신 여러분은 딴 생각가지고 벗어날려고 쓸데없이 뒷발질하지 마시고, 순순히 직분과 사명에 순종하시므로 고생을 덜 하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생활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26:16-18)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엎드러진 것이 바울의 회개의 자세라면, “일어나 네 발로 일어서라”는 명령은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선언은, 너는 이제 어쩔 수 없이 나의 종이 되어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6:19-23)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릴 것 없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사환처럼 순종하여 보내는대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안디옥에도, 고린도에도, 에베소에도, 데살로니가에도 갔습니다. 낮에도 갔고 밤에도, 육지로 바다로, 살든지 죽든지 가리지않고 명령이 떨어지면 어디든 어떤 방법으로든 순종하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갔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감옥에 갇혀서도, 그리고 지금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복음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딤후4:1-2)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윌리엄 부드는 한때는 전당포 주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1878년 구세군을 창설했습니다. 윌리엄 부드가 젊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그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또한 전도생활을 하던 중 매일 매일을 술에 취해 살며, 그의 가족들을 전혀 돌보지 아니하고 인생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윌리엄 부드는 그 남자를 몇 번 눈여겨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남자에게 교회에 다녀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윌리엄 부드는 포기한 채 그 남자를 잊고는 몇 날이 지났습니다. 윌리엄 부드가 급한 일로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해 사는 그 남자를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술취한 남자가 빈정거리며 윌리엄 부드를 불러 세우더니 말했습니다. “여보슈, 내가 정말 지옥과 천당이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당신처럼 그렇게 소신없게 전도하지는 않을거요.” 그 후 윌리엄 부드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그 때부터 열심히 전도하며 봉사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쫓겨나 이를 갈며 슬피우는 자가” 되지 않도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5. 이렇게 사도 바울의 간증 설교를 듣던 베스도는 바울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칩니다.
(행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이는 바울이 경험한 변화의 과정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온 말입니다. 사실 베스도같이 세속적이고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삶의 사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영적인 일이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 등과 같은 이야기가 베스도와 같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맑은 물 속에 득실대는 대장균들을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물을 들여다 본 사람은 그것을 잘 압니다. 이 세상에는 육의 눈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육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가진 영안을 가지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영적인 눈이 없는 베스도가 바울의 영적인 설교를 듣게 되니까 바울이 미쳐보이는 것입니다. 겨우 안다는 것이 고작 학문을 지나치게 많이 배운 탓에 바울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행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세상에 멀쩡한 사람을 두고 미쳤다고 몰아부친 일이 역사에 어디 한 두 번 있었겠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두고 미쳤다고 몰아다 부쳤습니다.
(요10:20-21)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로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시며 귀신들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 고쳐주시자, 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붙잡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막3:20-21)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이처럼 예수님을 미쳤다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야단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세상이 왜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5:13-16)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가족 중에 예수 때문에 미쳤다고 여겨지시는 분들이 있거든, 여러분 자신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아시고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마시고, 영으로 아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 베스도가 영적인 눈이 멀어 바울더러 미쳤다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해 복음을 전하며 신앙의 결단을 요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바울은 베스도에게 복음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은무의미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사실 육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게는, 떡이나 몇 개 더 생기는 이야기나 출세담이나 쾌락의 이야기가 훨씬 더 귀가 번쩍 뜨이고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돼지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하고 깨끗한 옷이 아니라, 시궁창의 짚더미이며 개에게 필요한 것은 진주가 아니라 썩어빠진 고기덩어리일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적인 인간에게는 복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행26:26-27)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그러나 아그립바 역시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행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죄수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왕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보다도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의 도덕성 때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아그립바는 오누이가 같이 사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버니게는 바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던 자기 여동생입니다. 그는 그러한 불륜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들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가 포기해야 될 죄들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게 된다면 이러한 죄악들을 끊어야만 합니다. 그는 이러한 쾌락과 죄악들을 끊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도덕적인 이유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음란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내어 놓기가 싫어서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의 쾌락들을 끊어 버리기가 아까워서 영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영적 생활의 기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슬프게도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령이 주는 기쁨과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도 요한이 권면합니다.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순간적인 죄가 주는 쾌락들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영생을 놓쳐 버리는 아그립바의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처에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그립바에 대한 바울의 진심은 분명합니다.
(행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사도 바울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변화를 받아, 영생을 소유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주님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정신없이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미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빌1:20-2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습니다.
(롬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주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어디든지 따라 갔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똑바로 미친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소원인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된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 불타는 사랑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심과 충성,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정열도 없는 싸늘한 고드름 같은 믿음으로는 어떤 변화도 역사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감각의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복음 전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마11:15-17)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계3:1)......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성도 여러분, “(행26:29)......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는, 바울 사도의 그 뜨거운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감격, 그리고 그 불붙는 사랑이 여러분 가슴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죤 낙스의 민족 복음화에 대한 뜨거운 정열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는 바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소원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13살난 김용기라는 소년이 이름 모를 깊은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듣지 않았습니다.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사람을 불러 경을 읽히기도 했지만 낫지는 않고 더욱 심해만 갔습니다. 소년의 부모는 날로 여위어가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와했지만 방도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담장 너머로 하얀 쪽지 한 장이 날아 들어왔습니다. 그 쪽지에는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소년의 아버지 김춘교씨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라는 구절에서 혹시 내 아들을 살릴 길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종이쪽지를 넣은 청년을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 받은 그의 가정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년 김용기는 병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는 십리가 넘는 용진교회에서 믿음의 터를 닦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창설하여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회 각계 각층의 정신적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켜 나라 민족을 변화시켜가는 신앙인의 모범인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을 이 땅에 이루어드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이 땅에 새로운 믿음의 불을 붙이고 여러분의 삶과 나라 민족에 새로운 감격과 변화와 능력을 경험하는 역사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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