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정신을 계승하는 성도가 됩시다! (행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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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정신을 계승하는 성도가 됩시다! (행7:54-60)
윤훈기 목사(남북교회)
오늘이 무슨 주일인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오늘은 우리 교단이 공동으로 지키는 순교기념주일입니다. 저는 지난 해 역사편찬위원들과 함께 우리 교단에 순교지교회가 모두 열 군데나 되는데, 그 중에 다섯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다섯 교회를 둘러보면서 순교영성을 회복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강경교회는 57명의 성도들이 최초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도화선 역할을 했고,
병촌교회는 66명의 순교자를 냈고,
두암교회는 23명의 순교자를 냈고,
증동리교회는 복음의 씨암탉이라고 해서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쳐서 죽인 문준경 전도사를 냈고,
임자진리교회는 48명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6.25때 공산당들에 의해 무참하게 대검 아니면 죽창 또는 생매장 당한 성도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총알이 아깝다고 해서 이런 방법으로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어떻게 동족이 동족을 그렇게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혹시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성지 다녀오신 분들 있습니까?
못 다녀오신 분들은 금주 간에는 양화진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切頭山)은 병인양요 때 천주교탄압의 현장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그대로 목을 쳐 언덕 아래로 집어던졌습니다. 그래서 절두산입니다. 그럼에도 고무신 거꾸로 바꿔 신은 성도 없이 모두 끝까지 믿음 지키다가 결국 순교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퀴즈 하나 드릴까요?
기독교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일까요? 본문에 나옵니다. 스데반집사입니다. 교회가 시작되어 얼마 되지 않아 순교 당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줄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순교는 천국의 꽃임을? 스데반의 뜻은 스테파노스, ‘면류관’입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 면류관답게 그는 최초로 하늘나라에서 면류관 제 1호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꽃이 되고, 면류관의 주인공들이 되기 위해선, 이 땅에서 순교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적색순교와 같은 직접적인 순교가 아니더라도 백색순교 즉 순교신앙, 순교정신, 순교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데반 집사는 순교를 당하면서 이를 갈며 죽어간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을 보실까요?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어떻게 죽어가고 있습니까?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죽어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원하여 기꺼이 순교의 잔을 마실 수 있었을까요?
오늘도 우리가 어떻게 기꺼이 순교정신으로, 순교자들의 신앙 따라서 순교자의 삶,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1.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54,55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입니까? 그 앞에 나오는 7장 전반적인 내용은,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죄 문제 지적과 성전 문제를 건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아주 예민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했으니,벌집을 쑤셔 놓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데반의 요점은, 성전보다는 성전 안에 계시는 주님이 더 위대하시다는 주장이었습니다.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건물로써 성전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지, 성전의 주인 되신 주님에 대해서는 관심 없습니다. 저들에겐 형식이 중요하지 내용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Meaning보다는 Form이 더 중요할 뿐입니다. 그럴듯한 그릇이 중요하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걸 지적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우는 사자들처럼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성 밖으로 집어 내던지고 그리고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이를 갈며 억울하다고 외치며 죽어간 것이 아닌, 천사의 얼굴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격을 먹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58절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이라는 바울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천사의 얼굴로 죽어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길래, 그 예수를 위하여 저렇게 죽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바울 회심의 동기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요?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어림도 없지요. 성령 충만하니까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습니다. 스데반뿐만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 19-20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지금 여기가 어디인 줄 아십니까? 가야바 공회법정입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바로 그 법정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는 그런 법정입니다. 그럼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하이킥입니다. 저들의 위협에 절대 굴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충만 개념은,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상태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상태를 일컬어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충만 현상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보면, 핍박자나 원수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선 스데반의 모습 그 자체가 성령 충만입니다. 순교는 내 힘으로, 내 의지의 결정체 아닌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 두려워하십니까?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2.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 됩니다.
56절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지금 스데반이 그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에게 고정시켰습니다. 중요한 도전입니다. 지금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원수들을 바라보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던 위협적인 공회법정, 70인의 공회원들을 바라보았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어떻게 도전하던가요? 히브리서는 초대교인들이 핍박받고 있는 상황에서 쓰여진 서신서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가문이나 동네에서 추방을 당하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빼앗기고, 심지어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빼앗기는 상황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해 히브리서 기자는 우월하신 그리스도,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위로하며 도전합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무엇을 바라보시기에 그렇게 실망하고 절망하십니까? 무엇을 바라보시기에 그렇게 한숨을 쉬십니까? 무엇을 바라보시기에 그렇게 저녁 못 얻어먹은 시어머니 상을 하고 사십니까? 눈을 들어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그 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고 분명 바다 위로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주님에게서 물결치는 바다로 옮기는 순간 여지없이 깊은 바닷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시선을 떼지 마십시오. 어느 한 순간도 시선을 옮기지 마십시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사람은 바라보는 대로 그것과 내가 아이덴티티, 동일시되어 버립니다. 더러운 것을 계속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도, 내 얼굴도, 내 손도 더러워집니다. 반대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 평화로운 것을 바라보면,그 본대로 마음에 영상이 생깁니다. 원수를 보다가 내가 더 원수가 되고, 악한 사람을 보다가 내가 더 악해지고, 나쁜 사람을 보다가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시어머니 미워하다가 내가 더 독한 시어머니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몸은 이 악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선만큼은 위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눈을 들어 보좌 우편에 서계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인자하신 주님의 모습처럼, 스데반집사도 천사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그 얼굴로 주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3. 전적으로 위탁하면 됩니다.
59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은행에 맡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으면 되잖아요? 굳이 은행에 맡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은행에 맡기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국내은행보다는 해외 스위스은행이 더 안전하다고 믿기에 사람들마다 그곳에 맡기려고 합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전적으로 다 맡겼습니다. 무엇까지? “내 영혼”입니다. 그의 목숨까지도 맡겼습니다. 영혼을 맡겼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야말로 죽으면 천국으로 직행하는데요?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마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요? ‘너 죽고 나 살자’는 사람이 아닌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사람입니다. 목숨까지 내 놓았는데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살겠다고 발버둥 치니까 문제지, 죽겠다는 데야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죽을 용기가 있으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집사는 집을 내놓고 믿는 사람이고, 목사는 목을 내놓고 믿는 사람이라고. 여러분, 집을 내놓는 것이 쉬울까요? 목을 내놓는 것이 쉬울까요? 반대로, 목을 내놓은 사람이 무엇인들 못 내놓겠습니까?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도전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사랑하는 아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아들을 주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가 끌어 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교 초창기에 웃기지 않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외국선교사들이 농촌에 들어가서 선교해서 교회를 세우곤 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후렌선교사가 세운 원동교회를 다녔습니다. 외국인선교사가 세운 교회라 구호물품들이 많았습니다. 그거 얻어먹고, 그거 얻어 쓰려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자동차 구경도 선교사를 통해서 처음 했습니다. 바로 그 배경입니다. 시골에는 5일 장날이 섭니다. 그날도 어느 부인이 장을 봐서 머리에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귀가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선교사가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지프트럭 뒤에 태웠습니다. 한참을 가다 백미러로 보니까 이 부인이 뒷 짐칸에 올라탔는데, 보따리를 여전히 이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래 차를 세우고, 뒤로 가서 ‘아니, 아주머니 왜 차 위에서 보따리를 이고 계십니까?’라고 했더니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아이구 선교사님, 제 몸뚱아리 태워 준 것만 해도 미안한데 어떻게 이 보따리까지 내려놓습니까?’ 아니, 내 몸까지 맡겼는데 보따리까지 맡기는 게 미안하다고요? 글쎄 여러분이 아직도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깨끗하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Total Commitment하시기 바랍니다. 전적인 위탁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맡기십시다. 잠 잘 때에도 내 영혼을 맡기고, 아침에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하면서도 내 영혼을 맡기고, 자동차타고 벨트를 매면서도 내 영혼을 맡기십시다. 그러면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4. 용서하면 됩니다.
어느 교회 집사부부가 싸움을 하여 일주일을 냉전으로 지냈습니다. 주일에 아내가 몸이 아파 누워있는데 남편 혼자 저녁예배를 갔다 오더니, 그날 밤 늦도록 아내를 위하여 청소와 설거지 등등 열렬히 사랑해 주는 게 아닙니까? 다음날 아침,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진 부인은 어젯밤 일이 필시 목사님의 설교영향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래 보답할 양으로 비싼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어제 저녁 설교에 남편이 감동을 받아 저에게 사랑을 베풀었어요. 목사님, 아내를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셨는가요?” 그러자 목사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아닌데, 어제 저녁 설교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였는데.” 그래, 아내를 원수 사랑하듯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원수 사랑의 첫걸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60절입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용서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용서에 대한 설교를 하시기 전에 성도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까지 이웃과 원수 맺지 않고 산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그랬더니 어느 90이 넘은 할아버지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아니,어르신 정말 지금까지 사시면서 누구와도 원수지지 않고 살아오셨단 말입니까? 원수가 하나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 왈, ‘응, 전에는 많았는데 지금도 그 원수들 다 죽었어. 이젠 정말 하나도 없어.’라고 하더랍니다. 이 할아버지가 정말 원수를 용서한 것입니까? 용서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까? 여러분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지난 주간에 시찰했던 다섯 교회의 순교비를 보십시오. 그런데 유독 한 교회만큼은 순교비가 특이했습니다.
임자진리교회의 ‘순교비’를 보십시오. 순교비 자체가 “용서하라.” 6.25때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다가 이판일 장로 13명의 가족을 비롯해서 48명의 성도들이 공산당과 그 지역에 사는 좌파세력들에 의해 죽창으로 무참하게 찔려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당시 목포에 거주했던 이판일 장로 장남 이인재는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국군과 함께 고향 임자진리로 돌아옵니다. 그는 가족 13명이 좌파세력들에 의해 무참하게 죽었음을 확인하고, 우파들과 함께 좌파 원수들을 잡아 야산공터 처형장에 세웠습니다. 이제 원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는데 부친 이판일 장로님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그들을 용서했으니 너도 그들을 용서하라.”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원수들을 풀어줍니다. 그 후 이인재는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어 임자진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원수 사랑하면,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목사님을 생각합니다. 자기 두 아들, 동신이와 동인이를 죽인 공산당좌파를 양자로 삼은 스토리 말입니다. 임자진리교회는 두 아들 정도가 아닌 13명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도 이런 사랑의 원자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성경에만 스데반 집사가 나온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리틀 스데반’이 살아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원수 용서하면서 비로소 순교영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수인 나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한다면, 나도 주님처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주님과 친구관계 아닌 원수관계로 있을 때, 주님은 원수인 나를 위해 당신의 몸을 버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에 달리셔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위해 주님이 취하셨던 액션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스데반 집사가 지금 그대로 흉내 내고 있습니다.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집사님이 용서했다면 우리라고 못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판일 장로님 아들, 이인제가 용서했다면 우리라고 못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순교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구체적인 관계속에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고 인간관계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도전하시잖아요? 누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날마다 자기부인 자기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순교영성입니다. 이것이 순교정신, 순교적인 신앙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 같이, 나 한 사람 죽어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면 ‘와이 낫’입니다. 나 한 사람 참고, 나 한 사람 죽고, 나 한 사람 무시당하고, 나 한 사람 불이익 당하고, 나 한 사람 희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공동체가 살고 회복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아닙니까? 이것이 순교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순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적색순교와 백색순교입니다. 적색순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색순교는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손해, 자기희생, 자기양보, 주님 때문에 자기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입니다.그것도 기꺼이 말입니다. 어쩌면 적색순교보다는 백색순교가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 2천년의 역사 가운데, 특히 한국교회가 이렇게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를 가져온 것은 기독교 선교 10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순교자의 피가 교회 부흥의 밑거름이 되고 씨앗이 됩니다. 날마다 순교정신 가지고, 순교하는 신앙으로 교회 부흥의 불쏘시개는 물론 천국에서 꽃이 되고 월계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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