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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전도의 탁월성 (행16:16-34)

본문

빌립보 전도의 탁월성(행16:16-34)


 



시도 바울의 빌립보 전도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빌립보 강가에서 기도하고 있던 루디아를 전도한 일입니다.


루디아는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귀부인이었고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두 번째는, 귀신 들려 점을 치던 여인을 고쳐준 사건입니다.


이 여인은 귀신에 들려 귀신이 시키는 대로 점도 치고 귀신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최하위에 속했던 여자 종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감옥에서 간수에게 전도한 사건입니다.


이 간수는 중류층의 사람으로 요즘말로 하면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들을 일부러 골라서 전도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전도하다보니까 세 종류의 사람에게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도는 누구를 구분하여 특정한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사람을 중심으로 빌립보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는 사도 바울의 복음증거에 가장 강력한 후원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은 바로 두 번째 세 번째 전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구원한 사건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빌립보 전도의 탁월성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전도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사실 전도가 어렵지 않은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쉽지 않은 전도의 비결이 무엇인가?


우리는 전도의 비결, 전도의 비법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만 전도의 비결은 다른 어떤 곳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빌립보 전도의 탁월성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그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루디아를 전도한 바울 일행은 그의 집에 머물면서 빌립보 전도를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곳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오고가는 길에 한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게 되는데 이 여종은 점을 잘 쳐서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 주는 빌립보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종이 따라오면서 소리 질러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바울은 심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바꿔 생각해보면 그 여종은 점을 잘 쳐서 아주 유명한 인사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신뢰하고 점을 치러 왔습니다.


그런 여종이 바울 일행을 선전하면 오히려 전도에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이 왜 괴로워하고 귀신을 쫓아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과 바울 아니면 하나님이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귀신들린 여종은 지금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높임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는 없는데 귀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울을 강조해서 높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대적하고 바울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하고 바울을 위하는 것 같이 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뒤에 있는 의도를 잘 깨닫고 결말을 주의해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귀신은 귀신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하수인입니다.


귀신은 우리에게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귀신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사실을 알고 그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둘째는, 자신의 권한과 힘과 능력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종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내주니까 여종은 더 이상 점을 치지 않습니다.


점을 쳐도 맞지 않을뿐더러 효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점을 치러 오지 않았고 많은 수입도 끊기게 됩니다.


화가 난 주인들이 장터의 관리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거짓으로 고발합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고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습을 전한다.’


고발을 받았으면 사실을 심문하고 그것이 사실인가? 그것이 죄가 되는가? 살피는 것이 순서일 텐데 관리들은 그런 절차도 없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게 합니다.


많이 때린 후에 깊은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여기에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이 바울이 왜 이 시점에서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발 자들은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습을 전한다.’ 말하자면 로마사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던 사도 바울이 ‘나도 로마 시민권자다. 나도 로마 사람이다’라고 했다면 그들이 함부로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재판 절차도 없이 매로 때리고 옥에 가두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로마 시민권이라는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어서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밝히지 않은 것은 개인적인 보호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다는 뚜렷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전도자들이 생활을 위해 물질을 요구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로서 신령한 것을 뿌린 자로서 육적인 것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권한을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권한,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 힘을 쓰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전도 철학이었습니다.


여러분, 전도는 자신의 권한이나 힘이나 위치를 내 세워서 하면 쉽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전도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군 생활할 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입니다만 연대장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부대의 분위기도 주일이면 누구든지 교회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연대장이 예배드리니까 예하 부대의 많은 장병들이 예배당에 찾아왔습니다.


장교들은 진급을 좌우하는 지휘관에게 잘 보이기위해서, 사병들은 얼마든지 교회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교회당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장병들이 예배시간에 졸다가 갑니다.


교회에서 주는 선물을 하나 받아들고 잘 잤다 하고 가는 것이 대부분의 장병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지휘관의 권한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교회당을 채우는 것은 사실 별 효과가 없습니다.


예전에 유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군사력 앞에 쉽게 복음의 문은 열렸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권한이나 힘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방법은 쉬울 것 같지만 결과는 절대 좋지 않습니다.


복음증거는 힘으로 권한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과 감동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그저 온갖 고통을 다 당하였습니다.


 


셋째는, 고통 중에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심한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차꼬까지 채워있는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얼마나 절망적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가 있다는 확신을 기도하고 찬송할 때 그 모습을 온 죄수들이 옆에서 보고 듣습니다.


저는 그 죄수들의 표정이 어땠는가? 하는 것이 궁금합니다.


어떤 죄수는 ‘미친놈들’ 했을 것이고 어떤 죄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떤 죄수는 ‘어떻게 저것이 가능할까?’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습을 경멸하거나 함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매인 것들이 다 풀어졌음에도 나가지 않고 바울의 행동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에서 코리텐 붐은 자기와 여동생 베스티가 유대인을 도와준 이유로 나치에게 체포되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코리와 베스티는 우선 라벤스브룩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이 수백 명의 죄수를 수용하는 마루침대가 즐비한 막사에 밀어 넣어졌을 때,


그곳의 불결함과 악취와 비참한 모습으로 인해 치를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위가 상하고 구토증이 나서 더러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그곳에는 벼룩이 우굴 거리고 있었습니다.


코리는 울먹이는 소리로 ‘베스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라고 말하며 불평했습니다.


베스티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 하셨잖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성경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복음을 들을 사람이 그곳에 많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베스티는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라고 하셨어.


즐거운 환경에서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야.


벼룩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환경의 일부분이야.’


이 말을 듣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벼룩이 많은 것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다른 죄수들과 기도하고, 상담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감시원의 저지를 받지 않은 이유가 바로 벼룩 때문인 것을 알게 됩니다.


감시원은 벼룩 때문에 막사 안에 들어오기를 꺼려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나 코리 텐 붐으로 하여금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며 즐거워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에 대해 감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으로부터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확신하면서 감사와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절망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힘입을 수 있는 방법이 되는 줄 믿습니다.


 


넷째는, 주어진 은혜를 쓰지 않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을 하였을 때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을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면 보통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내보내시기 위해 역사하셨구나.’ 하면서 감옥을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일행은 감옥을 나가지 않고 그냥 앉아 있습니다.


놀라운 눈으로 바울과 실라를 바라보고 있던 다른 죄수들도 나가지 못합니다.


왜 안 나갔겠습니까?


후에 간수가 이 사실을 알고 자결하려고 했을 때 바울이 우리가 여기 있다 자결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간수를 위해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관습은 죄수를 놓치게 되면 그 책임을 간수가 져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나가면 자기들은 좋지만 그 책임을 져야하는 간수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회로 삼지 않고 남을 위한 덕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여러분, 문이 열렸다고 나가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문이 열렸어도 나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따라 살아가는 덕의 모습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믿음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있지만 덕을 세우는 일에는 점수가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득이냐 덕이냐? 로 갈등할 때가 많습니다만 우리는 득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덕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대상자를 감동시키고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보니 감옥이 다 열렸습니다.


당연히 죄수들이 도망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상관들에 의해 죽기 전에 먼저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자결하려고 합니다.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이 말을 들은 간수는 얼마나 놀라고 크게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들이 누구기에 감옥 문이 다 열렸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가?’


그 감동 때문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묻습니다.


그 간수를 향하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전도를 합니다.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받고 빌립보교회의 큰 일꾼이 됩니다.


 


여러분,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하고 험악한 세대입니까?


이런 세대 속에서 전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이 세대에서도 감동만은 통하는 줄 믿습니다.


이 땅의 가장 위대한 감동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감동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론 하나님의 감동을 다 재현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 삶을 본받아 감동의 삶을 보여준다면 우리를 통해서도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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