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가 사는 길입니다. (욘3:1-10)
본문
회개가 사는 길입니다. /욘3:1-10, 행2:37-42
이솝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과 기러기 때문에 밭농사를 망쳐 매년 농사에 큰 손해를 보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봄이 되어 농부가 씨앗을 뿌려 놓으면 학과 기러기 떼들이 날아와서 애써 뿌려놓은 씨앗들을 모두 주워 먹어 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농부는 그물을 쳐서 새들을 잡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틀 뒤에 아침 일찍 밭에 나간 농부는 신이 났습니다. 학과 기러기가 열 마리나 그물에 걸려 있었고 황새도 한 마리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부가 그물로 다가가자 학과 기러기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가 있으므로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황새만은 예외였습니다. 황새는 농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농부님, 저를 살려주세요. 저는 당신의 곡식들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답니다. 농부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저를 놓아 주세요.“
울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황새를 보고 농부가 말했습니다. "네가 설령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해도 저 도둑들하고 같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가 성립된다. 죄지을 생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범죄 현장에 도둑들과 함께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그물에 걸린 새들을 모조리 다 끌고 가버렸습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만이 가진 특권이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어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순간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핑계는 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회개가 사는 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구약 본문 욘3:1-2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라는 의미입니다. 요나는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이요, 12 소선지 중의 한 사람이요, 요나서의 주인공입니다.(왕하14:25)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께서 요나를 명하사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망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광풍으로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선할 위기에 처하자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므로 그 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괴롭게 하던 니느웨 사람들이 그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와 정반대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후 마음에 가책이 되어 배 밑으로 내려가 잠을 잤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의 좁은 마음과는 달리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이 회개하여 구원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삼은 것도, 선지자들을 세운 것도 그들을 통해 이방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섭리입니다.
요나는 3일 동안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 가운데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기도할 때에 큰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냈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로 가서 3일간 말씀을 선포하니 왕과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는 회개하여 새 삶과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었고,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도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 받고 구원 받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아마도 요나는 내가 외쳐도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온 백성들이 회개했습니다.
요나가 성 밖에 나가서 어느 박 넝쿨 밑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을 때 벌레가 나타나 박 넝쿨을 갉아 먹어 시들어버리게 되자 요나가 화를 내며 심히 안타까워 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네가 수고도 않고 배양도 않고 하루 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시들어지는 박 넝쿨도 그렇게 아끼거든 하물며 이 큰 성 니느웨의 12만 명의 백성과 많은 육축을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4:10-11)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길은 공을 많이 세우는 것도,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많은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수양을 많이 쌓는 것도, 높은 명예와 권세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오수나 총독이 어느 날 그 죄수들이 노를 젓는 죄수 선을 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 하나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죄를 지어서 여기 왔느냐? 한결같이 거기서 나가고 싶은 생각에 나는 아무 죄가 없는데 여기 억울하게 끌려 왔다고 이런 저런 변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죄수만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가족을 살리려다 남의 물건을 훔친 죄인입니다. 순간 총독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그의 등을 내리치면서 외쳤습니다. 이놈은 나쁜 놈이다 너는 여기 죄 없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으니 이 사람을 당장 내어 보내라 명령했습니다. 그는 석방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죄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모두 구원의 길을 깨닫고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2.구원 얻는 길은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위력 있는 설교는 듣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게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들이 소망으로 기다려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 분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메시야를 바로 자신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밖은 사실에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로 인해 큰 근심에 잠기게 되었고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충격을 받게 되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하는 탄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외침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고 우리의 메시야를 죽였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후회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의 표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탄식을 듣고 그들에게 그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전해주었습니다. 행2:38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말씀을 주의해 보면 베드로는 먼저 그들에게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회개란 마음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아직까지 너희가 가졌던 그 불신적인 마음을 신앙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는 것이요, 너희가 예수를 찌른 그 일에 대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그 죄를 자복하고 그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세례란 말은 ‘물에 잠긴다.’ ‘물로 적신다.’ ‘물로 씻는다.’는 뜻입니다. 세례는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할례가 구약시대 의식이라면 세례는 신약시대 의식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표입니다. 회개는 세례에 앞서 반드시 있어야 할 전제조건입니다. 이 세례에 대한 교훈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야 한다는 뜻이 함축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고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그 풍성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하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은 더욱 뚜렷하고 풍성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주로 삼아 겸손하고 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떨어지면 구원은 변함이 없지만 구원의 생명과 풍성함을 누림은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의 풍성함을 누림을 모르고 있는데 그것은 겸손을 모르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늘 성령의 풍성한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여도 항상 하늘의 소망으로 넘치게 됩니다. 이북에서 월남해 남대문에서 장사를 하는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남대문시장에서 포목상을 해서 돈을 꽤 벌었고, 언니는 아담한 가게를 얻어 그럭저럭 생활하며 버는 대로 주님의 일에 봉사하며 믿음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언니가 건강을 잃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언니를 부둥켜안고 탄식하며 '죽음을 무릎 쓰며 잘 살아보겠다고 그리 애쓴 언니가 이렇게 고생만 하다가 죽으니 예수 믿고 잘 산 것이 뭐고 예수 믿고 덕 본게 뭡니까?“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때 언니는 동생의 손을 잡고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동생 울지 마. 사람이 한번 났다가 죽는 것은 정해진 거야.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어. 내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 동생아, 나는 천국으로 간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어!'
이 말을 마치자 언니는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때 동생은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매일매일 싸우면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언니한테 인색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 언니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동생은 언니의 손을 잡고 이별을 고했습니다. '언니 편히 가세요! 언니는 참으로 잘 살았어요! 이제 나도 언니 따라 신앙생활 열심히 할게요.!‘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믿음이 좋은 분들에게 나타나는 마지막 감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의 마지막 소망인 천국에 이르렀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하늘 소망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3.진정한 회개는 위대하고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변화를 보게 됩니다. 그 변화는 회개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회개는 위대한 변화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열릴 때 죄를 깨닫게 되고, 회개하여 죄를 버리는 자들이 됩니다. 회개를 통한 위대하고 놀라운 변화는 먼저 심령의 변화입니다. 렘24:7에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는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일그러진 죄악 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을 죽인 무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위대한 변화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형상을 떠나 죄의 길에 헤매는 인생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잘 압니다. 이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아버지 집을 사모하고 스스로 돌이킨 참 좋은 사례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스스로 다 돌이킬 수 있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가를 소망합니다. 다음에 행동의 변화입니다. 초대교회의 사건은 마음에 약간의 감동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변화되어 영적인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사람으로,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으로, 구제에 열심 있는 사람으로, 전도에 열심 있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되는 대로 우리는 실천하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할 마음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이를 무시하고 신앙적 게으름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성령께서 필요해서 하게 하실 때에는 바로 실천을 하는 자가 좋은 성도가 되고, 좋은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영적 안목을 가지지 못하고 세상 것에 가치관을 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 연락을 좇아 살다가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영적인 일에는 관심도 없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3천명, 5천명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세계에 가치관을 갖고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를 알고 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구약 본문에도 요나의 외침을 듣은 니느웨 사람들이 세상 것만 탐하는 삶을 살면서 죄가 넘침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다는 말은 그들의 눈이 세상 것에서 하나님께로 행하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들의 가치관이 세상 것에서 하나님께로 바뀌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새 가치관을 가지고 영적 세계를 사모하고 주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자가 됩니다. 세상 것이나 사람을 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자랑하며, 주님만 의지합니다. 한 젊은 목사가 명문대학교 부속 교회에 부임하여 몇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지혜가 있다는 대학생과 유명한 교수들로서, 특별히 지식이 많은 그들 앞에서 설교를 하자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목회 경험이 많은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예. 교육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교육학 교수가 보이고, 역사에 대한 예화를 들려고 하면 역사학 교수가 눈에 보입니다. 또 문학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국문학 교수와 학생들 눈치가 보입니다.” 이에 경험 많고 신실한 아버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간단한 문제를 갖고 괜한 고민을 하는구나.” “간단한 문제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그래. 간단한 문제이고말고. 앞으로는 설교를 할 때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복음에 대해서만 설교하려무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서만 설교하려무나. 그러면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후 그의 가치관이 변하여 지금까지 귀히 여기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겠다고 했습니다.
변화가 없는 회개는 거짓 회개요, 그런 거짓 회개로는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로 심령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화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회개가 사는 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 얻는 길은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위대하고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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