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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과 진실함으로 (요일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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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과 진실함으로(요일3:11-18절)



1. 구원의 확신에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도 요한은 처음 이 편지를 시작할 때 어떻게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주제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비결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논리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그가 맺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저는 마6:19-34절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본문은 주님이 산상에서 설교하신 너무 유명한 본문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설교했고 잘 아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다가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어서 먼저 나눠 보기를 원합니다.


우선 19-21절에는 두 부류의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하늘 창고에 쌓는 사람과 땅의 창고에 쌓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보물을 땅의 창고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 창고에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단락의 결론이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22-24절에는 또 다시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눈이 성한 사람과 눈이 나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단락의 결론 역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둘 중 하나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게 되지 공평하게 둘을 사랑하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25절부터 염려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길게 이어집니다. 염려의 내용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인간의 염려에 대해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먹을 것에 대한 예화로, 의복에 대한 예화로 들의 백합화를, 그리고 들풀을 예로 드십니다. 이런 것들을 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믿음 없음이라고 강하게 정의하십니다. 그러니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곧 누구입니까? 땅의 창고에 쌓는 사람들이고 눈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눈이 나쁘다는 말씀에서 이들의 시각이 틀어져 있다는 암시를 강하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두 개의 결론으로 이 단락이 끝납니다.


33절의 그런즉, 34절의 그러므로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각기 다른 결론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늘 창고에 쌓는 삶이며 눈이 성한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염려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땅의 창고에 쌓기를 좋아하고 눈이 나쁜 사람들의 염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한 날이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말씀은 우리네 인생이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일 일을 염려하니까 자꾸 땅의 창고에 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창고냐 땅의 창고냐가 그 사람이 맺는 열매이며 삶의 방식이고 세계관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문제의 핵심은 땅의 창고가 아닌 하늘 창고에 쌓는 삶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그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실 2장부터 새 계명을 말씀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해 왔습니다. 그리고 3:10절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결정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 형제 사랑이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의를 행하는 것이 무슨 거창한 일인 것 같지만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이라는 단순함으로 풀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형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의 핵심은 결국 형제 사랑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형제 사랑이냐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17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 전에 어떻게 사는 것이 형제 사랑이 아니냐는 것이 먼저 나옵니다. 즉 교회는 출석하지만 마귀에게 소속된 사람이 사는 법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2.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11-15절)


11절은 16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잠시 놓아두고 12절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인이 어떤 예화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를 설명하는 예화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과 13절은 한 짝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와 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그 이유를 자기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에 죽였다고 사도 요한은 설명합니다. 사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은 이유를 아벨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세상이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이유로 세상이 빛의 자녀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부연설명을 해 본다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즉 믿음의 열매가 드러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가인처럼 잘못된 증오를 담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가인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인이 아벨을 사랑했더라면 그렇게 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그것, 그 질투와 그 잘못된 생각이 아벨을 죽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하는 그것이 이미 살인하는 것이며 그런 삶에는 영생이 없다는 것을 너희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가 하는 설교에 가슴이 찔렸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로 쳐 죽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그의 소속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이상히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습니다. 함께 공동체를 이룬 우리 형제, 자매들이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모함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르는 증거라는 것이 사도 요한의 설명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3. 처음부터 들은 소식(11, 16절)


자, 그렇다면 우리가 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11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처음부터 너희가 들은 소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처음 전해지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소식이 무엇입니까? 발 이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까?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그럽니다. 이 짧은 한 구절이 설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전부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전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기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가슴을 아프게 했던 소설 가시고기가 있었습니다. 최이섭씨의 이 소설은 드라마로 제작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 주인공으로 이광기씨가 캐스팅되어서 실제로 자식을 잃은 사람의 심정으로 연기해서 눈물바다를 만들었던 유명한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가시고기”라는 소설의 줄거리가 무엇입니까?


소설에는 다움이와 아빠가 등장합니다.


10살 때부터 백혈병을 앓기 시작한 다움이를 위한 아버지의 타들어가는 사랑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다움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신장을 팔아 다움이를 치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신장을 팔기 위해서 검사를 하던 중에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간암 말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장도 팔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각막을 팔아 다움이의 백혈병을 치료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가시고기입니다.


가시고기는 엄마가 버리고 간 새끼 가시고기들을 끝까지 키우고 새끼 가시고기들이 떠나면 돌에 머리를 박아 죽는 아빠 가시고기... 모든 것을 다 주고서 자신은 죽는 가시고기의 운명처럼 아빠의 절절한 사랑을 가시고기라는 상징으로 제목을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고기는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보다 더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살아내는 빛된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것처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사도 요한은 강도 높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행함과 진실함으로(17-18절)


자, 그렇다면 이 단락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는 18절을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그럽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형제 사랑이 결국 우리가 가야할 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 사랑을 말과 혀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움직여서, 물질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에 대한 예화가 바로 17절입니다.


뭐라고 말씀합니까?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자 유대인들은 속으로 교만하게 우리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거기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이 지키는 율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우리가 얼마 전에 묵상했던 요한복음에는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나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병을 치료 받고 진정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형제가 병을 치료 받고 진정한 안식을 얻었음에도 함께 기뻐하고 축제를 베풀기는커녕 안식일을 어겼다고 주님을 잡아 죽이려는 황당한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 지키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자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형제 사랑이란 처음 말씀드린 주님의 말씀처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당하다고 했는데 그에 대한 병행구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은 재물이 이 세상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재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재물입니다. 그 재물은 어떻게 쓰느냐가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제사랑은 그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일에 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행함이요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리스도인으로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칭찬과 격려, 말과 혀로도 사랑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 머리에만 머무르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가 손과 발을 움직여 생활이 되는 신앙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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