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삼하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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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사무엘하 22:1-11
사도라는 영화가 개봉을 했습니다. 조선시대 영 정조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영조의 아들이 사도세자이고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입니다. 가계도를 보시겠습니다.
영조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기에 기대가 컸지만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갑니다. 자유분방 풍기문란 그 자체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최고점에 이르렀고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죽게 만듭니다. 아들에게 형벌을 내린 것입니다. 뒤주는 곡식을 담아두는 작은 상자입니다.
이조시대에 걸쳐서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칭송을 받는 영조대왕이지만 가정사는 비극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만큼 비극적인게 어디있습니까? 나중에 영조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도’라는 칭호를 주어서 그때부터 사도세자가 되었습니다. 영조대왕의 뒤를이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됩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수원에 성을 짓고(수원성)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고자 무덤을 이장해 성에 모셔두고 정조는 11번이나 수원을 찾아 위로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 내용을 선전하면서 타이틀을 뽑을 때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 이라고 타이틀을 뽑았습니다.
또 하나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다윗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타가 인정하는 성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태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림자도 길게 드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가정사도 이에 못지않은 비극적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내를 많이 얻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것만 8명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아내를 더 두었다고 하였으므로 더 많은 부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왕위계승을 놓고 이복형제들 간에 피비린네 나는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암논이 이복누이동생 다말을 겁탈을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친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칼로 죽입니다. 압살롬은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을 왕좌에서 쫒아내게 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복동생인 아도니야가 왕권을 넘본다는 사실을 알고 살해를 하게 됩니다. 다윗은 말년까지 이런 가정사로 고민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찬송시입니다. 이러한 인생과 가정의 어려움 속에서 다윗은 무엇을 어떻게 찬양했는지 말씀을 통해서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다윗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삼하22:2-3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 도망자 생활을 할 때 였습니다. 사울이 미친듯이 다윗을 찾는데 사울의 레이다에 다윗이 딱 걸려들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독안에 든 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 잡힐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전령이 달려옵니다. 국경선을 넘어서 이방민족이 침략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보다는 국경선을 넘어서 쳐들어온 이방 민족을 막는게 더 급했습니다. 그래서 다잡은 다윗을 놔두고 군대를 이끌고 국경선으로 전쟁을 하러 갑니다.
만약 그때 다윗이 사울에게 걸렸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방 민족으로 하여금 침략하게 하시어 다윗의 목숨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바위시오. 방패시오. 구원의 뿔입니다.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전순금 집사님이 근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우리가 가지는 못하고 이곳에서 중보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월요일 새벽4시 반쯤에 움직일 수 없었던 발이 갑자기 움직여 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신기해서 딸인 엄해연 집사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고 역사하심이라고 다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려움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있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서도 구원의 손을 펼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심한 것 같지만 우리가 결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방 팔방이 막혀있어도 하늘문은 열려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늘의 문은 우리에게 늘 열려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2.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연과 우주속에서 찾았습니다.
8-10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였도다 ”
하나님은 우주적인 천재지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셨습니다.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10가지 재앙도 천재지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고 왕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사무엘이 백성들을 책망하니까 하늘에서는 우뢰와 비가 내렸다고 했습니다. 마른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니까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자 3년반동안 비를 주시지 않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가 비를 오게 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연과 우주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즘 가을 햇빛이 따갑습니다. 논을 보니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익어가고 있습니다.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니까 고개를 든 빳빳한 가라지가 더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가라지를 추수때까지 두라고 하셨는데 지금 보니까 벼이삭과 가라지가 뚜렸하게 구분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열매가 맺히고 수확을 거두게 되었는데 농부들이 햇빛의 고마움을 알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 하늘의 햇빛이 없었다면 농부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농사를 지으면서 저 햇빛이 고맙다, 내가 저 햇빛때문에 먹고 산다,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농부는 농작물을 키우고 익게 하는 햇빛에 고마움을 느낄 것이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하나님을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시기적절하게 햇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그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 께 우리가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저의 선친묘소를 벌초를 하러 갔는데 저는 가면서 풀이 엄청 많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누가 깍은 것 같아요. 잔디끝이 뽀쪽하지 않고 낫이 한번 지나간 자국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빨리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는 데 산소 군데군데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때 성경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거라사 광인이 무덤사이에서 살았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왜 거리사 광인은 무덤사이에서 살았을까? 지금 와서 보니 그 이유는 음식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추모객들이 남겨논 음식을 먹기위해서 거라사 광인은 무덤가에서 산 것이었습니다.
성경해석은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자동적으로 해석되는게 많습니다. 거라사 광인도 마귀의 지배를 받지만 욱체적으로는 먹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음식이 있는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라사 광인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음식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추석인데 많은 음식을 만들 것입니다. 그 음식을 먹으면서 풍성한 것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이천지를 운행하시고 그 안에서 살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복되다고 합니다.
26-27절 “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
예전에 일산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길 때 남자 집사님 한 분이 버스운전하는 분인데 새벽에 출근하다가 사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뇌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큰병원에서 했으면 좋았을 것을 작은병원에서 뇌수술을 했는데 정상적으로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약간 바보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약간 모자란 사람이 되었어요. 가끔 교회에 오는데 실없는 소리를 하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에 친구라고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하고 아주 흡사한 증세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잘 통했습니다. 약간 모자란 사람끼리 어디서 만나건지 자기와 흡사한 사람을 만나더라는 것입니다.
저의 사촌형 중에 한 사람이 정신병인지 귀신이 들린 것인지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 교회도 몇번 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친구를 데려왔는데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증세가 똑같은 사람인데 나한테 친구라고 소개를 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얘기도 잘하고 잘 통해요. 이게 우연의 일치인지 나는 신기하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사람끼리 만나게 되는 건지, 비슷한 사람끼리는 어떻게 그렇게 대화가 잘 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도 머무르고 싶은 곳에 머무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복도 머무르고 싶은 곳에 머무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머물기에 불편하게 해 놓고선 복을 달라고 하면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합니다.
예전에 부목사때 장례식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권사 남편인데 월남전 참전용사입니다. 고엽제 피해를 봤다고 해서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할 때 그렇게 힘이 들더라구요. 끙끙대면서 간신히 했습니다. 그때 힘들었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에 나요. 나는 왜그럴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마치고 며칠후에 그 권사가 결혼식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자는 보훈병원 같은 병동에 있던 남자 환자였던 것입니다. 남편 간호하면서 옆에 병상에 있는 남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장례예배가 힘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게서 그런 장례예배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아시는 분인데 그런 자리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도 머물만한 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람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것처럼 하나님도 편하게 임할 수 있는 곳에 머무는 것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가장 닮은 사람이 자식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를 나눈 관계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고 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내적으로 교통하는 것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내적으로는 서로 하나예요. 그리고 이제는 여기에 우리 성도가 끼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성도가 하나가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사위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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