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다 (아2:1-7)
본문
사랑에 빠지다/아 2:1-7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에 대해 어떤 요구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되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모습으로 치장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것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무시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빠진 자로 사는가를 살피려면‘사랑 안에서 자유한가?’를 보시면 됩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가서입니다.
아 1장을 보면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서“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아 1:9-10),“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 1:15)라고 노래합니다.
사랑을 주는 남자의 눈에 사랑을 받는 여자는 부족함이 없는 어여쁜 존재입니다. 자신을 얼굴이 거무스름하다고 말한 여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과분하고 넘치는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의 전부를 어여쁘게 여겨주는 사랑 때문에 남자의 눈에 어여쁘게 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주는 자유입니다.
1절을 보면“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은 자신의 얼굴이 거무스름해서 남들이 흘겨볼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온종일 포도원에서 일만 하는 볼품없는 시골 처녀의 모습인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자신을 사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로 말하는 것은 자신을 평가하는 근거를 남자의 사랑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전혀 부족한 것이 없는 온전히 어여쁜 자로 여김 받음을 알기에 자신을 수선화, 백합화로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보면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받을만한 어여쁜 모습을 갖추기 위해 힘쓰고 전전긍긍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믿음에 부족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자유가 없고 하나님과도 사랑이 아닌 율법의 관계에 있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넘치고 과분한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바꾸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절을 보면“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쓸모없고 버려질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는 것이 사랑하는 신부를 바라보는 시선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가 아름다워지기 위해 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 신랑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화가가 완성한 그림을 더 아름답게 하겠다고 덧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완성된 그림에 누가 덧칠을 하든 그림을 그린 화가는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완성한 그림을 망친 것에 대해 분노할 뿐입니다.
사론은 넓은 벌판을 말합니다. 넒은 벌판에 수선화가 피었다면 참으로 특별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골짜기에 핀 백합화 역시 특별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의 특별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채워버린 주의 사랑이 우리를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로 남겨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은 언제나 넘치고 과분한 것이고, 나에게 과분한 사랑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3-4절도 보면“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라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자의 사랑 때문에 기뻐하여 노래하는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혹여 자신의 얼굴이 거무스름해서 사랑받지 못할까 하는 불안과 염려가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랑만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사랑의 열매가 내 입에 달다고 감탄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잔칫집은 왕이 베푼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여인은 본래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가 인도하여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이 잔칫집에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1:4절에서 왕이 사랑하는 여인을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인 것과 같습니다. 왕의 방에 들어가는 것 또한 사랑으로 베풀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문제들은 무의한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는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체제를 교회가 무시하면서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왕과 여인의 관계에는 사랑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에는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믿음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걸림돌을 만들고 거기에 넘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신앙에 자유와 기쁨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혹시 자유를 빙자하여 방종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습니까? 흔히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방종으로 이해하는데 우리는 이미 자기 멋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종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방종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를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는 의도로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그늘입니다. 그 그늘에 앉아서 기뻐하며 우리의 입에 달콤한 열매를 맛보며 즐거워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알게 된 신자는 사랑을 자기 위에 세우며 사랑이 나의 깃발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고 하늘의 혼인 잔치 자리로 우리를 이끌었음을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 신자의 고백입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일방적이고 과분하며 넘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방해 받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께 어여쁜 신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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