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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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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보면 살리라 / 민 21:4~9, 요 3:14-16




민수기를 읽다보면 21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민수기를 불평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민수기에는 모두 아홉 번의 불평이 나오는데, 본문에 나오는 불평이 아홉 번째 불평입니다. 이제 21장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불평과 원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민수기는 사실상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천로역정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기본구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불신앙과 반역으로 광야에서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20:14~21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황폐한 광야 길을 돌아 우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온 길은 매우 험악하고 거칠었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의 심신은 매우 피로한 상태였습니다. 본문 4절에, “길로 인하여 백성이 마음이 상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마음이 상하였다”라는 말은 ‘위축되다’, ‘용기를 잃다’, ‘절망하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가는 동안 되도록이면 지름길로 편하게 가고 싶어 합니다. 공부, 사업 경영, 출세 등에서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쉽게 힘 안들이고 일확천금을 벌기 바라고, 요령으로 승진하기를 바라며, 요행이나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낙심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절망합니다. 그러면서 원망과 불평을 하며 방황하는 인생길, 피곤한 인생길을 걷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도 쉽고 편한 길로 가려고 합니다. 고난이 따르는 십자가의 길보다, 좁은 문, 협착한 길보다 편안하고 쉬운 길로, 넓은 문, 넓은 길로 활보하며 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마음껏 복을 누리며 살다가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어려움이 오면 신앙이 흔들리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원망하고 불평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불 뱀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물게 되니 그 뱀의 독으로 많은 자들이 죽어 가면서 모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불 뱀의 독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그것을 바라보면 산다.’(민21:8-9)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장대에 달린 놋 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하나님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을 위한 처방으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보는 자들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신약 본문 요3:14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장대에 놋 뱀을 장대에 달았듯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높이 달려 희생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믿어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 가는 광야 길에서 고생을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든 책임을 하나님과 모세에게 돌렸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현재 당하는 고생만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들은 그냥 불평한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애굽에 있을 때를 떠올리면서 그 때가 좋았는데 지금은 이렇다 하면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애굽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없는 세계, 우상숭배의 세계, 사탄의 세계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탈출해서 다 잊어버려야 할 세계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조금 안일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었던 애굽 세계가 고난당하는 현재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비록 육신적으로 편안했어도 애굽의 노예가 되어 자유 함이 없고, 영적으로는 하나님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육신은 힘들고 불편해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믿음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고난을 참아내면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복을 얻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옛날 생각만 하고 현재의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불 뱀을 통해 징계 하신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그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으심으로,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내가 받을 저주와 수치와 형벌을 대신 담당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은 불신앙에서 나온 죄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은 온갖 죄에 빠지게 하여 그 죄가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불러오게 되고, 불평과 원망, 미움과 시기 등 죄는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대통령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구의 10%도 채 되지 않는 백인들이 80%의 흑인들을 지배하며 인종차별을 하였습니다.


만델라는 흑인 인권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44세에 반역죄 죄목으로 구속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그는 백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했습니다. 더구나 결핵까지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들 가운데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만델라는 하나님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따지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백인들을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만델라는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용서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항복하였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백인들을 용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응어리졌던 원한과 증오가 사라지면서 평안해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터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감사했습니다. 저녁에는 감옥 창살을 통해 비쳐오는 별빛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일하러 끌려가면서 원망과 불평을 내뱉었지만, 만델라는 감옥보다 더 넓은 자연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며 일터로 나갔고, 파란 하늘과 새소리를 듣는 기쁨으로 일했습니다. 교도관의 허락을 받아 자기만의 적은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며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몸과 마음이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1990년 2월에 27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출옥한 만델라는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백인이나 누구라도 원망하거나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이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눈을 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치유받기를 소망합니다.


2.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죄를 사하고 없이하여 정결케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다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으심으로,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내가 받을 저주와 수치와 형벌을 대신 담당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채찍을 주실 때, 거기서 그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채찍을 주시면, 반드시 치료책을 주십니다. 이 치료책을 받아들인 사람은 살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책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본문 민21:7에 보면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모세를 향해 원망하며 범죄 한 사실을 인정하고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이 치료의 첫 단계입니다. 마음이 강팍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거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회개할 수 없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중보자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7절 후반에 보면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뱀에 물리어 뱀의 독으로 죽어 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고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는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 합니다. 딤전 2:5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담을 허시고,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시오,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게 되며, 하늘 권속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놋 뱀을 장대에 달아놓았을 때, 모세의 말을 믿고 순종하여 놋 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뱀의 독에서 해방 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막 안에서 “모세여.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뱀의 독으로 이렇게 퉁퉁 부어 죽게 되었는데 놋 뱀을 쳐다본다고 산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난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믿지 못하고, 순종하여 바라보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말하며 불신앙 하며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치료의 역사나, 구원의 역사가 일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치료의 역사, 의롭게 되는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고전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부르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고전 1:21). 세상에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련하기 이를 때 없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면 돼지는 발로 밟고 짓이겨서 더러운 오물 속에 처박아 버립니다. 돼지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잘 먹고 잘 사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을까 만을 궁리하는데 그런 돼지에게 보석이나 진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사람들도 주님 보시기에는 개와 돼지 같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즐기는데 만 관심이 있지 어떻게 하면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다가 천국 갈 것인가 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통해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의 은총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표식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 하시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 하시면서 까지 속죄의 길, 치료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되는 은혜의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주신 구원을 믿음(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종교는 여러 가지 체험이나 선한 행위, 고행, 공적, 수련 등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행함으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회교도들은 성지순례 등 종교적인 의무 준수가 그들을 신 앞에 나아가게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도들은 수련을 가르칩니다. 이 모두는 항상 인간이 아래로부터 신을 향하여 올라가는 종교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사다리의 방향을 바꾸고 구원의 방법을 바꿉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나에게 내려 오셔서 구원의 길을 예비 하시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려하심이라"하신 것 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구원을 위해 스스로 어떤 행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멘' 하며 빈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쉐퍼(Francis A. Schaeffer)라는 분은 "예수 믿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것이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쉬운 이유는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고, 구원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이유는 상식적인 생각으로 이해가 잘 안되어 예수님께 믿음으로 자신을 잘 맡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이요, 믿음으로 받는 구원,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유다의 탈무드(Talmud)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등에 업고 광야를 가던 중에 친구와 마주쳤습니다. 인사를 나눈 친구가 물었습니다. “등에 업은 아이가 누구인가?” “아들일세.” 친구가 등에 업힌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업은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 ​그런데 아이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아니요. 이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기가 차서 아이를 내려놓고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자 아들은 “당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어떻게 믿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업고 가지 않았느냐?” 아들이 “종도 나를 업을 수 있고 노예도 나를 업고 갑니다. 나를 업었다고 해서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버지는 “그럼 내가 너를 먹여 살리지 않느냐?” 아들이 말합니다. “반드시 아버지만 먹여 살립니까? 삼촌도 먹여주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먹고 살 수 있지요.” 아버지는 너무 답답하여 누누이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라는 증거를 대라고 우깁니다. 아버지 됨을 불신하는 것은 자녀 됨을 불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한 자식은 사생아가 되고 고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행은 불신에 원인이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행복을 믿지 않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 자, 사랑의 아버지께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과 영생을 주셨음을 믿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죄를 사하고 없이하여 정결케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표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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