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의 경주와 징계 (히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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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경주와 징계(히브리서 12:1-13)
마라톤 경주는 42.195Km를 달립니다. 길고 먼 거리를 달려가야 합니다. 왜 달려갑니까?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달려가다가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라톤과 같습니다. 인생의 마라톤이나 신앙의 마라톤의 특징은 1등 보다 완주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경쟁은 상대 평가입니다. 저 사람이 못해야 내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과 신앙의 마라톤에서는 절대 평가입니다. 완주한 사람에게는 똑같은 상을 줍니다.
포도원 농부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은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을 부릅니다. 오전 10시에도, 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부릅니다. 그리고 퇴근 1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부릅니다. 주인은 오후 6시 일이 끝나자 임금을 나누어 줍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줍니다.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저 사람은 한 시간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아침부터 온 나는-, 12시에 온 나는- 적어도 몇 배는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오전 12시에 온 사람에고 한 데나리온, 아침 9시부터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하며 항의합니다. 왜 우리들을 차별합니까? 이에 주인은 차별이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한 데나리온을 준다고 약속했고, 약속대로 이행한다. 계약대로 한 내가 불의하냐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 경영 철학은 성과 연봉제를 채택합니다. 일한 대로 받고, 성과가 좋으면 인센티브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영철학은 은혜와 사랑에 기초합니다. 늦어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인센티브를 받습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상을 받고 싶다면 달려가야 합니다. 어쩌면 새로운 출발선을 그어주신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완주한 모든 사람에게 상을 주는 절대 평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실 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11: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출발선과 관련해서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달려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너무 좋아해서 아브라함을 믿음을 의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볼 때, 사랑의 콩까지가 씌여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보다 하나님을 믿고, 회개한 한 명으로 잔치를 벌이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존재의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하나님, 여호와 증인의 하나님, 안식교의 하나님, 수 많은 이단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존재를 믿고, 자기에게 오는 자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무엇이겠습니까? 기쁨입니다. 즐거움입니다. 예수님도 본문 2절에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기쁨의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 상을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기쁨은 최상의 보상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복에서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천국의 저희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기뻐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적자 신앙생활입니다. 빌립보서 4: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평가로 받는 매일 매일의 상은 기쁨입니다.
왜 신앙의 경주를 완주해야 합니까? 1절을 보면 허다한 증인들이 나옵니다. 허다한 증인들은 인내의 경주를 완주한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의 장으로 불리는 앞 장,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졌다.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구원을 받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이후 이삭부터 여호수아까지 그들이 걸어간 믿음의 경주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11:32절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믿음의 선배들이 구름같이 둘러서서 현재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성도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인의 핍박과 로마의 핍박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핍박으로 십자가의 도를 버리고, 율법과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고, 로마 황제의 핍박으로 세상과 헛된 우상에게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런 위기와 갈등가운데 있는 성도를 향하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면서, 반드시 신앙의 경주에 낙오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해서 상을 받으라고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1절을 보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버려야 할 것 두 가지와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것 한가지입니다. 먼저 버려야 할 것 첫 번째는 무거운 것입니다. 격투기나 복싱, 태권도, 유다, 레스링 같은 운동에는 체급이 있습니다. 계체량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자기 체중을 유지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무거운 것이란 바로 과체중을 의미합니다. 운동선수가 비만이라면 자기 관리에서 실패를 했고, 경기에도 나설 수 없습니다.
영적 과체중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방해합니다. 영적 과체중은 하나님 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성도의 정체성, 가치관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버리고, 자기 욕심을 따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을 자랑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은 뒷 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일을 좋아하고, 육신의 일에 집중하고, 애착을 가짐으로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버려야 할 것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십자가를 등지는 엄청난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죄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나타나는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입니다. 얽매이기 쉽다는 말은 쉽게 둘러싸는, 쉽게 유혹하다는 뜻입니다. 에를 들면 신앙을 방해하는 생활 습관들입니다. 취미 생활, 먹고 마시는 음식, 친구들, TV시청, 외모 치장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신앙의 경주를 잘 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나를 둘러싸서 방해합니다. 발바닥에 붙은 껌 딱지처럼 떨어지지 않고 계속 귀찮게 합니다. 늘 회개는 하지만, 또 다시 내 생활 가운데서 나를 괴롭힙니다. 이런 것들을 관리하지 못하면 결국 중독으로 나타날 것이고,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인내입니다. 인내로 경주해야 합니다.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는 일 자체가 인내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연약함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매일 매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청소를 매일 매일 하듯이, 우리의 마음의 청소를 매일 매일 하지 않으면 먼지가 쌓여서, 청소를 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길 수 있고, 결국에는 생명까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고통스러운 싸움의 과정입니다. 왜 이 고통의 과정을 견뎌야 합니까? 11절을 보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8절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거운 것을 버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버리고, 인내를 잘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의지와 능력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을 달성하려면, 그 사람의 절대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사람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단순히 그냥 쳐다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또 다른 어떤 것을 주목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로부터 눈을 돌려, 예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20세기 신경과학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울신경 효과’라고 합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듯이 뇌에도 거울신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행동, 동작을 이해하고, 모방하는데 이 신경이 관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거울신경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거울처럼 자기 뇌에 반사를 합니다.
좋은 것 보면 좋은 것을 배우고, 나쁜 것을 보면 나쁜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청소년들은 유명한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의 옷차림이 머리 스타일을 모방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거울신경을 활성화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집중한 만큼 배웁니다. 어떤 사람이 바둑에 빠지면 그 사람의 눈에는 바둑알이 왔다갔다 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방향만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4-11절까지는 징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앞서 말한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말합니다. 왜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지를 징계로 설명합니다. 4절은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전쟁을 경험해 적이 없습니다. 전쟁 영화를 보면 얼마나 치열합니까? 죽고 사는 것이 한 순간입니다.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왔다갔다 합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영적 전쟁도 동일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싸우지 않습니다. 싸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야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보고 있나? 나태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에 임하는 우리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죄 짓는 것을 가볍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 주기 위해 하나의 조치를 내렸는데, 그것이 바로 징계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내가 바르게 하는지? 못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내의 경주를 달성하는데 있습니다. 만약, 징계의 채찍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 머물려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로부터 벗어나질 못할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변화가 없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죄에 늪에 빠졌다면,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나올 수 없습니다. 나오려고 애를 쓸수록 몸은 더 빠져 들어갑니다. 늪이 깊으면 죽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채찍을 내밉니다. 이때 살기 위해서 이 채찍을 잡는다면 그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손길이 징계이고, 이 징계를 통해서 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징계를 받을 때, 징계의 채찍이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징계의 채찍이 독재자의 손에 있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사탄의 손에 있다면 절망뿐입니다. 더 큰 고통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 것입니다. 사탄의 채찍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고 때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안심해도 됩니다. 정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해서 때리는 구나,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맞아도 감사할 것입니다. 아프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5-8절을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너희가 참음으로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다면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징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징계가 없다면 육신대로 살다가 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잔 앞에서 고통을 느끼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결론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징계를 순전히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피를 흘려 주셨스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다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는 징계는 내 죄 때문입니다. 무거운 것과 얼매이기 쉬운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받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5절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절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저도 두 딸의 아버지로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매를 들고 많이 혼을 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 감정을 따라 혼을 낸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딸은 혼나면서도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내 말을 듣고, 공경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소한 감정을 따라 징계하지 않습니다. 10절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위해”징계한다고 했습니다.
11절에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징계의 결과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 거룩함,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았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더니, 의와 평강의 열매인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결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며 그 사명을 다 완수하심으로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는 성도들도 천국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2절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지금 우리는 인내의 신앙의 경주를 하는 중입니다. 잘못되었다면, 지금 주님께서 출발선을 새롭게 그어주실 것입니다. 다시 신앙의 경주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내의 경주의 결과, 도달해야 할 신앙의 목표 지점을 향해, 벗어나지 말고, 곧은 방향으로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지금 힘이 드는 것은 맞지만, 다시 힘을 내서 끝까지 일어나서 달려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5:11절에는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내 생활 중에 나를 사로잡는 있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이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에 자꾸 머물러 있으면 늪이 됩니다. 벗어나길 힘이 듭니다. 그때 혹시 하나님의 징계를 보았다면, 감사합니다. 적극적으로 그 채찍을 붙들고 나아와 합니다. 그 길로 내 연약한 무릎을 세우고, 다시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받은 사명을 위해 가야 합니다.
징계란 다른 것이 것이 아니라, 길을 잘못 가고 있을 때 바르게 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입니다. 징계는 내가 버림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생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의 경주, 노선에서 제대로 가고 있는가? 어긋났는가? 확인해 보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서 의와 평강의 열매, 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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