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와 아직 (히11:4-15)
본문
이미와 아직(히 11 ; 4 ~ 15)
김 주한 목사
성취된 구원과 완성되어 가는 구원
우리의 구원은 두 가지 차원의 구원이 있습니다. 먼저는 영혼의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했을 때의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얻었으니) ..”(엡2:8)입니다.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과거형의 구원입니다.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 ‘칭의’와 거듭남의 뜻인 ‘중생’의 의미가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오늘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미래형의 구원이 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말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완성하라)”(빌2:12), “갓 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완성되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영혼구원으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성화되는(거룩하게 되는) 차원에서의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지만 여전히 죄악세상을 살아가면서 죄를 짓고 불순종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회개하며 다시금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성결케 하는 과정을 격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미 목욕한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으로의 회개는 한 번이라 할지라도 성화로서의 회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되어져야합니다. 그럼으로 한 번 구원받으면 다시 회개할 일이 없다고 하는 구원파의 경우는 구원으로서의 회개와 성화로서의 회개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fulfillment)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장차 재림 시에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consummation)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와 재림사이를 살고 있습니다. 즉 이미 십자가로 성취된 구원과 아직 성화로 인하여 완성되어가는 구원사이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통일성 있는 구원의 강물
예수십자가로 인하여 구원을 성취한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의 행위에 있어서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구원은 예수 믿고 이미 받는 것이라면 그 구원이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우리의 행위와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구원의 완성을 위해 강조해야 할 우리의 행위를 마치 구원의 성취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크게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줄 알았는데 행위가 없으면 구원 못 받는 것처럼 말씀하는 성경구절을 드리대며 행위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성화로서의 행위를 영혼구원으로서의 행위로 바꾸는 것이며 십자가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한없이 끌어내린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주로 마7장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리고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 와 야고보서 2장의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을 언급하면서 마치 행위로 구원 얻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또한 구약의 성도들은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할 때에 대표적으로 노아가 창6:22에서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였음으로 7:1에서 하나님 앞에 의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준행하여 독자이삭을 받치는 행위로 의인되었음으로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논리입니다.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것은 행위이지만 그 행위를 있게 한 것은 바로 그 분들의 믿음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홍수 심판의 말씀을 믿고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행위를 한 것이고 아브라함은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서 이삭을 받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섬겼던 인물들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섬겼다는 것을 밝히는 곳이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이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히11:4~15)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세대주의자들(dispensationalism)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아담시대는 언약준수로 구원받고, 모세 이후 왕정시대는 율법 준수로 구원받고, 신약시대는 은혜시대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면서 시대별로 구원의 조건을 다르게 말하는 것으로 성경을 왜곡합니다. 주로 행위구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하는 하나의 통일성 있는 구원의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구약 시대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피흘림의 제사를 드렸다면 신약시대에는 이미 오신 메시야(대속의 십자가)를 뒤돌아보면서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 같으나..
사람들은 겉 모습이 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저 사람이 정말 믿고 있는지 아니면 믿는 척만 하고 있는지 속내를 보십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믿는 척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하겠습니다.그러므로 믿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며 믿는자 라면 결코 죄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작은 소자에게 물을 떠주는 그와 같은 선한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항상 지켜보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결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따로 행위 따로 있지 않습니다. 믿었으니까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불났다고 믿는다면 뛰쳐나가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홍수심판 하신다는 말씀을 믿으면 방주를 준비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장차 불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방주되신 예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가지고는 구원 못 받고 행위가 있어야합니다!’ 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믿었는데 행위를 안 했다는 것은 거짓말로 믿는 척 했다는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그 믿음이 가짜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또한 자주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그렇게 하면(죄 지으면) 지옥 가!”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짓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경적인 표현은 “참으로 믿는 자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죄 짓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 같으나 이 말은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핵심가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자는 행위가 중심이 된 말이라면 후자는 믿음이 중심이 된 말입니다. 믿음에서 행위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행위 위에서 믿음을 판단한 것입니다. 한 가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은 행위로 자신의 구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볼 줄 모르는 바리새인이며 이 땅에 행위로 인해 구원받을 육체는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위를 움직이는 힘
성경을 행위라고 하는 관점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쉽게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과 같은 본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위라고 하는 관점을 가지고 보는 책이 아니라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십자가(믿음)로 구원을 성취한 사람이라면 그의 삶(행위)을 통해 구원을 완성해 나아갈 것입니다. 교회에만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믿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은 그로 하여금 올바른 행위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그냥 우리 안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그의 마음을 정직한 곳으로 움직이며, 그의 입술을 감사하는 입술 되게 움직이며, 그의 손과 발을 통하여 행위가 따르는 곳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제 예수 재림하실 때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성결한 예수의 신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성화)을 이루어(완성) 가신다는 것 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해 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것과 믿는 척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 삶에 임한 고난과 환란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한 반석위에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의 시간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져서 말씀 순종하지 않으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요나처럼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순종하라(행위를 보이라!) 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고, 우리가 성화되게 하기 위함이며, 정결한 신부되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어걸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은 이단에 속한 무리들이 성도들을 꾀이는 데 쓰는 전형적인 방법이며 이는 성경의 진리를 심각하게 회손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들어가는 천국 만들어가는 천국
성취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와 같은 성경의 구도는 우리의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는 천국의 관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미래에 들어가게 되는 실제 하는 나라임과 동시에 이미 우리가운에 도래한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너희 중에 귀신이 쫓겨 가는 것을 보았다면 이미 하나님나라가 너희 가운에 임하였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천국 또한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는 천국을 살아감과 동시에 앞으로 들어갈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이 우리 앞에 왔고 아직 가야 할 천국 사이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천국의 법도와 윤리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제 장차 참된 천국으로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럼으로 천국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미리 ‘맛 배기’로(?) 누리는 것이고 최종적으로 저 천국에서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에 갔더니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땅에서 사랑한 모습으로 감싸고 용서하는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tension) 사실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tension)은 신학자들의 용어이기도 합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승리의 테이프를 끊고서 결승점을 통과한 시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시점(already)이라면 그 선수가 승리의 메달을 받는 시간(not yet)이 예수님 재림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승리한 날이 디데이(D-day) 즉 십자가 시점이라면 승리의 조인식을 치루는 날이 브이데이(V-day) 즉 재림의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의 정수리를 내리치심으로 승리했습니다. 원시복음인 창3:15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승리의 개선행진을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날이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의 ‘긴장’(tension)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까지 마귀는 마지막 발악을 할 것입니다. 마치 2차 대전에서 승리의 조인식을 치루는 날 이후로도 국지전은 있었던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근신하고 깨어 우리의 신앙을 긴장 속에 지켜야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의 긴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최후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고 이제 새 예루살렘성으로의 영광스런 개선행진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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