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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만 높여드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요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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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만 높여드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요한복음3;22-30(190901)


 




예수님만 높여드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면 = 요한복음3;22-30(190901)


 


PW : 믿음      BIW : 높여드리라            AG : 세례요한


TS : 믿음이란 우리들 자신을 최저로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여드리며 사는 것이다.


 


 


이 휴대폰 누구 겁니까?


 


요즘은 잘 나간다 하는 사람들은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골프장 락커 룸에서 몇 사람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그때 탁자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고 한 친구가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조용해서 상대방 목소리 잘 들렸습니다.


“여보? 나야.”


“응”


“아직 골프장이야?”


“그래”


“나... 지금 백화점인데 마음에 꼭 드는 밍크코트가 있어서...”


“얼만데?”


“천 오백”


“마음에 들면 사.”


“고마워. 그리고 좀 전에 벤츠 매장에 갔었는데 신형 모델이 2억 밖에 안한데. 작년에 산 BMW 바꿀 때도 된 것 같구...”


“그래. 사도록 해. 이왕이면 풀 옵션으로 하고...”


“자기 고마워. 참!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는데...”


“뭔 데?”


“아침에 부동산에서 전화 왔는데, 풀장과 테니스 코트가 딸린 바닷가 전망 좋은 저택이 매물로 나왔는데 좋은 가격이라네. ”


“얼마?”


“20억이면 될 것 같대.”


“그래? 바로 연락해 사겠다고.”


“알았어요. 자기 사랑해 이따 봐요. 쪽~~~”


전화를 끊은 남자가 갑자기 전화기 든 손을 번쩍 들더니 “이 휴대폰 누구 겁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답니다.


엉뚱한 사람의 전화를 대신 받으면서 인심을 후하게 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남의 것을 가지고 인심을 후하게 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국가 돈, 회사 돈, 공적인 돈을 가지고 마치 자신의 돈인 것처럼 후하게 인심을 쓰면서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후하신 분이시지만 남의 것을 가지고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것으로 조금씩 아끼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P4.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만남 이후에 예루살렘 성을 떠나서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물이 많은 강가, 냇가에서 세례를 베풀어주신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수도 서울을 떠나서 경기도 어느 지방으로 가서 며칠 동안 지내면서 물이 많은 강가 또는 냇가에서 세례를 베풀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이 때 세례요한도 헤롯 안디바에게 잡혀 죽기 전이었기 때문에 유대 지역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여전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애논(Aenon)이라는 지역은 “샘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이다.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약 14.5km, 예루살렘 성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9.6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애논이라는 지역은 지금도 샘 근원이 있어서 샘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세례요한은 비교적 물이 풍부한 애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어떤 사람이 세례요한에게 찾아와서 “예수님이란 분도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라는 분도 세례를 베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는 분에게 몰려가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라는 분이 세례 베푸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세례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선포하면서 예수님을 높여드리고 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도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에 불과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상대를 높여주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높임을 받을 수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높여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① 내가 높아지고 내 자랑을 많이 해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다니지 않겠나?


 


내 자랑이 많아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게 될 것이고, 그래야 돈도 많이 벌고 잘 살지 않겠나?


연예인들이 많은 인기를 얻어서 쉴 틈 없이 행사에 불러 주어야 돈도 많이 벌고 연예인들 인기도 하늘을 찌르지 않나?


내가 언제까지 가장 미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쥐엄 열매를 먹어야 하고, 대추야자 열매가 바위틈에 떨어져서 나그네들이나 고아들이 먹어야 하는 드바쉬를 석청이라고 하면서 먹으면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언제까지 낙타 털옷같은 허름한 옷만 입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옷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기도 하고, 좋은 음식도 먹으면서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② 내가 메시야이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주의 길을 평탄케 하면서 예비해야 하는 일은 이미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러 오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다 감당하지 않았나?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면서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임재하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큰 음성을 들을 때, 이미 다 이루었다.


이 정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았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이지 않나?


이제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가실 길을 가고,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높임을 받고, 나는 나대로 높임을 받으면서 각자 갈 길을 가면 되지 않나?


 


③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하는데,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고, 뭇 사람들에게서 추앙을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하나님과 나 자신을 위해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오라고 하시면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D4.


 


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마지막까지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주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과 의지를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로는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다 내어놓는다. 자신이 가진 것은 ZERO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장하지만, 실제적인 모습에서는 자신의 뜻과 목표와 의지를 실현해 나가려고 안간힘을 다 쓴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온전하게 주님께 맡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이제 자신에게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눈꼽 만큼도 자신에게는 욕심이 없다.’라고 그럴싸하게 말은 하지만, 여전히 그 욕심의 세계, 욕망의 유혹을 버리지 못한 채 그 욕심 덩어리를 챙기려고 기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존재이다.


대부분의 인간이라는 옷을 입은 존재는 자신이 추구하는 욕심, 욕망, 탐욕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 바보 천치처럼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비우고 털털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시골 교회를 사역하시는 목사님의 아들 이야기이다.


시골교회 목사님은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목사님이시다.

다른 동기 목사님들은 대도시 큰 교회에서 뭇 성도님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목회하는데, 이 시골교회 목사님은 몇 명 되지 않는 시골 노인네들을 모시고 예배드리면서 목회하고 있다.


사모님은 서울의 유명한 여자대학교를 졸업하신 엘리트 사모님이신데, 목사님을 따라서 시골에 들어가서 직접 농사한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팔면서 자식들 교육 시키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자녀들에게 축복해 주셔서 아들이 서울대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연구원이 되어서 이미 대기업에 특채로 입사하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다.


목사님이나 사모님은 아들이 어서 속히 대기업에 입사하여 생활비를 벌어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입학하여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면서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목사님 내외는 그 아들 하나만 바라보면서 작은 시골 교회에서 어르신들을 모시면서 지금까지 평생 목회해 왔는데, 그 아들이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겠다고 하니까 사모님이 몸져눕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 목사님과 아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정말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서 작정기도해 보자고 하면서 작정 기도를 하게 된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아들의 마음이 바뀌기를 소망하면서 작정 기도를 마치게 되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아들을 만나서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더냐?’ 하면서 아들의 의중을 들으려고 하는데, 아들은 담담하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저가 높은 영광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봤더니, 더 이상의 영광의 자리가 탐나지 않고 부럽지도 않고 아깝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렵니다.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가 포기해 주십시오.”


아들의 이런 고백을 듣고 목사님과 사모님은 결국 포기하고 아들이 가고 싶어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은 총신신대원에 입학해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며느리 될 아가씨도 똑같이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기업에 취업해서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남편 될 그 아들이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선교를 하려고 하면 의사가 되어서 선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직장을 퇴직하고 포기하고 의과대학을 들어가서 의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수능 공부를 다시 해서 충남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 내외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주님께 바쳐서 아무것도 몰라서 죽어가는 아프리카 오지에 선교사로 가서 오직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면서 자신의 좋은 조건들을 다 내려놓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세례요한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스가랴 제사장과 엘리사벳 사이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서 제사장직을 상속받아서 제사장의 삶도 살아보았고, 에세네파에 들어가서 금욕하는 공동체 생활하면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천국을 선포하고, 뭇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도 베풀어주었고, 심지어는 인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재하는 모습도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했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도 자신의 두 귀로 똑똑하게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받았으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뭇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오히려 자기 동생뻘 되는 예수님을 높여드리며 경배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세례요한 자신도 뭇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추앙받으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야 꿀떡같지만 자신의 욕망, 소망, 의지, 뜻을 다 내려놓고 오직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을 높이 높이 높이 올려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②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인정받게 하시는 하나님.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찾아와서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전해주는 무리들에게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라고 말한다.


평소에 세례요한께서 찾아와서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는 바로 그 메시야입니까? 당신이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선포했던 그 선포에 대하여 증명해 줄 사람들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대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따르는 무리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신 분이라고 인정받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새롭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는 신랑 신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혼식 하는 날은 결혼하는 신랑 신부 당사자가 가장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두 사람은 결혼식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한없이 행복하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온갖 근심 걱정이 되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는 날이다.


결혼이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여 가장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신랑 신부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이요 중요한 날이다.


이렇게 중요하고 좋은 날에 신랑 신부와 더불어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결혼하는 신랑 신부의 친구들, 들러리들이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덩달아 좋아하고 기뻐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유대인들이 결혼하는 장면을 유튜브(YouTube) 동영상을 통해서 보면, 결혼식 날에는 하루 종일 신랑 신부는 말할 것도 없고, 신랑 신부의 친구들, 가족들, 친지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친구들은 신랑 신부와 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신랑 신부와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처럼 세례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지금 이 시간이 자신에게는 가장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높여드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시간이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때 자신의 존재감, 자존감, 자아정체감이 높아진다.


간혹 메스컴에서나 주변에 보면 누군가에게서 인정받지 못해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인정받고 안 받고는 자신의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커다란 갈림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다.


 


③ 마지막까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높여드리게 하시는 하나님.


 


세례요한은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높여드리고 있다.


세례요한은 지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점점 더 높아져야 하고, 커져야 하고, 사역의 분량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낮아져야 하고, 작아져야 하고, 사역의 분량도 더 약해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모든 것들이 자기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도 높임을 받고 싶고, 뭇 사람들에게 추앙받으면서 살고 싶다.


세례요한 자신도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뭇 백성들에게서 추앙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도 세례요한은 인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높이 올려드리면서 뭇 백성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로 이끌어가고 있다.


세례요한의 이런 모습이 하늘나라에서 하늘 아버지와 천군 천사들이 지켜보면서 인정해 주시고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세례요한에게 ‘이제는 됐구나.’라고 하면서 30살 아주 젊은 나이, 가장 좋은 나이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가신다.


세례요한은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해서 자식을 낳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젠 네 할 일 다 했다. 더 이상 지구촌에서 네가 할 사명은 없다.’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가신다.


그것도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 살로메에 의해서 가장 복된 순교자의 제물로 불러가신다.


순교자의 제물로 받으신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값진 영광의 면류관으로 세례요한의 머리에 씌워주셨을 것이다.


 


L4 & B4.


 


오늘 세례요한이 오직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을 높이며 살았다면 우리들 자신은 어떤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자신들도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떵떵거리면서 살아봤으면 좋겠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좋은 차 끌고 다니고, 유명한 여행지에 휴가 가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 목사님들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들도 누리며 살고 싶다는데 뭐가 잘못인가? 이렇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죄라도 되는 것인가?


누리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서러울 뿐이다.


다른 것들은 못하더라도 특히 주변에서 지인의 가정에 애경사가 생겼을 때, 떳떳하게 애경사에 참석하여 같이 마음 아파해 주기도 하고, 같이 축하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애경사 자리에 가지 못할 때, ‘정말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 하면서 살아야 하는구나.’하는 자괴감이 들어서 말로 다 할 수 없이 마음이 찢어지고 아플 때가 많다.


남이 하는 것들을 다 따라 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반의 반이라도, 아니 그 흉내라도 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야 하나 싶어서 갈등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될 영혼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만을 높여드리며 살아야 한다.


우리 신앙인들이 오직 예수님만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① 우리의 자아정체성, 자존감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000이다.’라고 정확하게 고백할 수 있는 자아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 정체성이 흔들리거나 약해지면 항상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혈안이 된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 우리들의 영혼이 무너지고 패망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


 


② 우리들이 유일하게 살아가는 길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복음밖에 없음을 확신하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들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날마다 우리들은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빌립보서 3;20-21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우리의 영원한 시민권이 있음을 확신하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찾고 구해도 찾을 수 없고 구할 수 없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우리의 가슴 속 깊이 모시면서 살아가는 특권을 지닌 사람임을 고백해야 한다.


 


③ 우리들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출 수 있는 만큼 낮추며 살아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래부터 악한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성선설에 입각한 존재가 아니라 성악설에 입각한 존재이다.


물론 삼위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처음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조상인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 자체가 악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다.


사탄의 유혹으로 인하여 타락하게 된 인간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여 떠나서 자신들의 바벨탑 세계를 세워 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시시때때로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싶은 충동, 욕망 속에 살아가는 악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와 지지와 사랑을 입지 않으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고 추앙받으면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을 낮출 수 있는 한 최저의 세계로 낮출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데까지 낮추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데까지 낮추어야 사는 길이 열리게 되는데, 자신의 의지나 뜻으로 자신을 낮추고 싶다고 해서 낮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까지 낮추어주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만분의 일이라도 따라가야겠다는 믿음과 헌신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찾아야 하는 믿음이란 우리들 자신을 최저의 세계로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 높이 높이 높이 올려드리며 사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작은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들에게는 한없는 은혜와 축복의 세계로 강력하게 이끌어가신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해야 한다.


믿음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높이 올려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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