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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지 맙시다 (롬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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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지 맙시다(롬12:3-8)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방대학에 다니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니까 행복하지?”그러자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아네요, 대학에 다니면 뭐해요. 지방대학인데요.”


목사님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한 청년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 다니면 뭐해요. S대도 아닌데”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S대에 다니는 청년을 붙들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S대에 다니는 청년은 “S대에 다니면 뭐해요. 학과가 좋지 않은데.”


얼마 후 그 목사님은 S대에서 좋은 학과를 다니는 청년을 만나 물었습니다.


“넌 정말 행복하지?”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은 과에 있으면 뭐해요. 수석도 못하는데.”


이 이야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서로 비교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가진 것을 비교하고, 사는 것을 비교하고, 학교를 비교하고 재능을 비교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러한 비교를 하면서 남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하면 남을 무시하고 교만해지고 우쭐하게 됩니다.


반대로 남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열등감을 갖게 되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우리 중에 이러한 비교의식을 갖고 비교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너를 비교했고, 사는 집을 비교했고, 타는 차를 비교했고, 우리교회와 다른 교회를 비교했고, 교인숫자를 비교했고 교회예산을 비교했습니다.


이러한 비교의 결과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염려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남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녀를 남들보다 더 훌륭하게 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교회를 더 크게 키울 수 있을까?


비교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자는 그 세계에서 승리하기 위해 많은 염려를 하게 됩니다.


염려할 뿐 아니라 불평과 원망을 낳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왔을 때 정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와 비교하여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비교하니까 구원해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비교의 세계에서 영원히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꿈과 이상을 가지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남과 비교하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남과 비교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대통령을 닮았다고 해서 티비에 출연하지 못한 배우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는 너무 닮아서 그 역을 혼자서 도맡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모가 닮았어도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재능도 다르고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른데 다른 사람을 놓고 일정한 기준에 맞춰 서로 비교하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분명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결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차이가 있는 것이 정상인데 그 정상적인 것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비교의식가운데 애기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3절 하 반절에서 “오직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각각 다르게 창조된 사람을 비교의식가운데 보지 말고 지체의식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모두가 다 필요한 존재라는 시각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유명한 몸의 지체의 비유인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모두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4절 말씀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다”고 했는데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모두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한 몸이란 사실-이것이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됩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다른 교회가 잘 되는 것을 보면서 기분 나쁜 감정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가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시기하기도 하고 그 속에 뭔가 비성경적인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헐뜯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에서 아주 자신 있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장담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은근히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모든 것을 버리고 충성했던 베드로는 어쩌면 자신이 다른 제자와 비교하여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후 주님이 부활하여 게네사렛 호수 가를 찾았을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복음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두 팔을 벌리고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여 이 사람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요한이 어찌되든 그것이 너 베드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 베드로는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우리도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겠다고 노력하다가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베드로와 같이 엉뚱한 질문을 한 경험이 없습니까?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시기할 것도 미워할 것도 헐뜯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한 몸인 사람들이고 한 몸인 교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잘하던 우리가 잘 하든, 도시 교회가 잘 하든 시골교회가 잘하든 영광은 우리 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나보다 앞선다고 나보다 잘한다고 시기하거나 질투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자신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노력해도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10므나를 남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5므나 어떤 사람은 한 므나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런 숫자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미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종들이요 그 모든 므나는 주인의 손에 바쳐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를 손에 쥐었냐? 비교의식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남겼나를 보지 않고 얼마나 최선을 다했나? 지체의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할 때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 모두는 협력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4절에서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몸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지체가 서로 협력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어느 지체가 협력하지 않으면 기능은 부분적으로 마비될 수 있고 그런 사람을 우리는 장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정상적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지체가 협력해야만 되듯이 우리의 교회가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모든 직분자들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비교의식을 가지고 내가 잘났느니 네가 못 낫느니, 너는 필요 없고 나만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지체의식을 가지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서로의 중요성을 인정해주면서 서로 돕고 이해하는 협력자가 될 때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들에게 품삯을 나누어주는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오전 6시에 들어온 자나 9시 12시에 오후 3시 나아가 오후 5시에 들어온 자에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나누어줍니다.


이런 주인의 모습을 보고 아침에 들어와 하루 종일 일을 한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너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시간을 일한 사람과 12시간을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을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불평하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이 일한 시간을 따져가며 불평을 합니다.


들어온 시간만 가지고 비교하면 불평할만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비교의식대신에 지체의식을 가르쳐줍니다.


내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늦게 들어왔던지 일찍 들어왔던지 많은 일을 했든지 적은 일을 했든지 똑같이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똑같이 대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은 공동체를 파멸시키지만 지체의식은 공동체를 세웁니다.


아무리 늦게 들어왔어도 아무리 적은 일을 하여도 그도 하나님의 교회에 한 지체가 되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이해하고 협력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절대적 가치관을 가질 때 비교의식은 극복되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거기에 만족하는 가치관을 상대적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낫다고 생각하면 기뻐하고 만족하고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지, 나의 삶이 과연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되는지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낫다고 생각하면 기뻐하고 만족하고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합니다.


가치관의 기준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나으면 기분이 좋고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여기에 비해 절대적인 가치관은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인정받고 있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해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삶이면 회개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칭찬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이면 기뻐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용돈으로 동전 몇 개를 주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달려갑니다.


한 번은 큰 아이가 돈을 달라고 하는데 동전이 없어 천 원짜리를 주었습니다.


그것을 알자 둘째 아이가 툴툴거립니다.


왜 언니는 천원주고 자기는 300원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300원을 주었다고 생각했을 땐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는데 언니에게 천원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심통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옷 한 벌이라도 걸쳤으니 감사해야 하는 데 옷 두 벌 있는 사람을 보고 나면 감사는 불평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내가 받은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기쁨이 있고 내가 받은 돈이 적으면 침통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비교의식에서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평가해야 합니다.


상대평가를 하지 말고 절대평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존귀하게 여긴단다. 내가 너를 보배롭게 여긴단다. 너는 복 있는 사람이란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 앞에 섰을 때 이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하는 위협을 당합니다.


이때 그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그들은 사람 앞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는 상대적인 가치관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살아가는 가치관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타난 현상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남과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남은 어떻게 하나? 곁눈질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되겠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고하는 심판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귀는 비교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마귀가 뭐라고 해도 비교의식을 충동질시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에게 맡겨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했을 때 예수님은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비교의식은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지체의식은 승리합니다.


상대적 가치관은 적당할 수밖에 없지만 절대적 가치관은 최선을 다하게 하고 사람을 떳떳하게 만듭니다.


세상사람 쳐다보며 비교의식을 가지고 곁눈질하는 생활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체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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