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시련의 파도가 밀려오면 어쩌지 (출5:1-23)
본문
더 많은 시련의 파도가 밀려오면 어쩌지/ 출애굽기5;1-23(210131)
똑똑하긴 뭐가 똑똑해?
공원에서 한 할아버지가 강아지와 장기를 두고 있습니다.
신기한 광경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한마디씩 거듭니다.
“우와~~~세상에 이렇게 똑똑한 강아지가 다 있네요! 놀랍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똑똑하긴 뭐가 똑똑해? 지금까지 열판을 둬서 아홉 판이나 내가 이겼는걸...쩝...”
결국 한판은 할아버지가 강아지에게 졌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 강아지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대단하신 건지, 아니면 강아지에게조차 지는 할아버지가 멍청한 것인지...
우리들도 얼마든지 강아지와 장기를 두고 계시는 할아버지처럼 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보나 도저히 싸움의 대상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과 무턱대고 싸우려는 사람은 강아지와 장기를 두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랑의 마음이 큰 사람, 사랑의 생각이 큰 사람, 사랑의 넓이 큰 아량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우리들 자신을 크게, 넓게, 높게 성장시키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P4.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애굽의 절대지존이라는 바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 때 애굽의 바로는 아멘호텝2세(Amenhotep II)라는 사람이다.
모세와 왕위계승권을 놓고 다투다가 모세가 애굽인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숨겼다가 발각되어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던 투트모세3세(Thutmose III)는 이미 죽고 없다.
출애굽기4;19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자가 바로 투트모세3세와 그 일당들이다.
그들은 이미 죽어서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투트모세 3세가 죽은 이후에 애굽의 바로로 등극한 사람이 투트모세3세의 아들 아멘호텝2세라는 사람이고, 모세는 이 아멘호텝2세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게 된다.
그러면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애굽의 절대권자인 아멘호텝2세 앞으로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는가?
과연 아멘호텝2세는 모세와 아론이 말하는 대로 순수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줄 수 있을까?
앞으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해 가실까?
D4.
① 절대지존에게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애굽의 절대지존이라고 하는 애굽의 바로, 아멘호텝2세의 권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애굽의 절대지존이라고 하는 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과 담력을 더해주시면서 감동을 주신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아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한 나라의 절대지존이라는 왕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라면 더욱 더 힘들고 어렵고 무섭고 가슴 떨리는 일이다.
아무나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왕이 초대한 것이라면 왕의 초대장을 보여주면 쉽게 왕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만, 왕의 초대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왕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엄청난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다.
왕이 살고 있는 궁궐에는 수 많은 병사들이 각종 살인 무기로 무장하여 지키고 있다.
왕 앞으로 나아가려면 수많은 경로를 통과하면서 허락을 받아야만 왕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고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라는 신분이다.
어떻게 히브리 종이라는 신분으로 모세와 아론은 왕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여러 경로들을 잘 통과하며 왕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시켜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결코 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감동을 주시고 역사하심으로 왕 앞으로 나아간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왕을 알현하게 된 목적을 아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전한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하면서 거듭거듭 간절하게 청원한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보내서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원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이 서슬이 시퍼런 독재정권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죽이면 죽겠노라 하는 결단과 각오를 한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절대권력, 어쩌면 생사여탈권까지 한 손에 쥐고 있는 절대지존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란이 자주 일어나던 시대에서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함부로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위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애굽이 아니라 그 어떤 세상의 정권, 권력보다도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을 보내셨다고 확신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다.
비록 잘못되어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권자 앞으로 나아가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메시지, 십자가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든든한 오른팔이요 나의 힘이요 능력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두렵거나 무서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죽음도, 어떤 권세와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② 절대지존이 싸늘한 반응을 보이게 하시는 하나님.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을 왕에게 보내서 왔다고 하니까 바로 왕은 질색하면서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면서 대번에 싸늘하게 거절하고 만다.
바로왕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애굽인들은 대대로 태양신을 최고의 신으로 믿고 있고, 잡다한 신들을 섬기는 백성이다.
그러나 애굽인들이 섬기는 신에는 ‘여호와’라고 부르는 신은 없다.
바로 왕은 자신이야말로 바로 태양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여호와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신이다.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있더라도 아주 작은 고을이나 동네 정도 지키는 하찮은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작자들이 종살이나 하고있지 않느냐? 여호와라는 신이 대단한 신이라면 태양신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느냐? 자존심이 있지 태양신의 화신인 내가 저렇게 별 볼 일 없고 보잘것없고 하찮은 여호와 같은 조무래기 신의 말을 들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반문하는 것이다.
애굽의 절대지존이요 태양신의 화신이라는 바로는 조무래기 같은 여호와가 보냈다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전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곧바로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보낸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바로의 마음이 싸늘하게 반응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해 나가는 것에는 바로의 완악한 반응, 싸늘한 반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드라마나 영화가 재미있고 완성도가 높아지려면 반드시 악역을 담당하는 악역배우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악역 배우가 얼마나 진짜처럼 악역을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드라마나 영화의 성공과 실패가 달라지는 것이다.
바로가 악역을 충실하게 감당해주어야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꿈꾸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드라마, 영화는 제대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에는 반드시 반대자들, 방해자들, 모함자들, 악역배우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하고 저항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반대하는 이들,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추진하고 계시는 사역일 수 있음을 직감할 필요가 있다.
③ 더욱 더 역경과 시련의 길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로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면서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듣게 된 바로는 싸늘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더 악랄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라고 명령한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라고 하면서 역정을 낸다.
그러면서 바로는 그 일을 책임맡은 장관을 비롯한 책임공무원들을 불러서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더욱 더 악독하게 노역을 시키라는 정책을 발표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 일을 맡은 공무원들은 바로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면서 바로가 선포한 정책 그대로 시행하게 된다.
그럼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보다 더 고되고 힘들고 어렵고 악랄하게 노역을 수행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작업할 수 있는 재료들을 제 때에 제대로 충분하게 공급되어도 작업량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다.
작업할 수 있는 재료들을 전혀 공급해 주지 않으면서 똑같은 작업량을 달성해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 안 되지만, 그렇게 해내라고, 그렇게 해내지 않으면 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다구치면서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의 정권이요 독재정권의 정형적인 모습이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화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오히려 바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끔찍한 노역을 수행하라는 정책은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보다는 훨씬 편했을텐데...
괜히 왕 앞으로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예배드리겠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백성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욱 더 참혹한 결과만 돌아오는 것이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보다 더 살기가 힘들어지고 고달파지고 죽을 만큼 힘들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 사는 편이 오히려 더 편하게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욱 더 큰 시련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더욱 더 큰 시련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더욱 더 고달픈 삶의 현장으로 몰아가는 것은 모세와 아론도 결코 원하는 일이 아니다.
더더구나 심하게 노역을 감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일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더욱 더 모질게, 더욱 더 심하게, 더욱 더 악랄하게, 더욱 더 고통스럽게 그 일을 진행시켜 나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추진해 나가시는 방법과 그에 따라 대처하는 사람과는 많은 괴리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추진해 나가는 위대한 구원의 사역은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면서 어렵게 어렵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인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더 강한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와 주권을 보여주려고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보통 분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은 위대하신 분이다.”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어하신다.
백성들에게 더욱 더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모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하면서 하소연한다.
모세 자신도 지금 벌어가는 상황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궁극적인 의도와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이다.
L4 & B4.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만에 애굽으로 돌아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애굽인들에게 종살이당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고, 이제 곧 애굽을 떠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너무 좋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리하도록 자신을 보내셨다고 전하는 모세의 말을 들을 때에 너무너무 기쁘고 좋아서 마치 하늘을 훨훨 날아갈 것처럼 기쁘고 좋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드릴 때에는 너무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것도 잠시뿐이다.
이제 애굽을 떠나서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서 활짝 피어나는 삶을 꿈꾸었는데, 그것도 잠시뿐이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낸 이유를 말했을 때, 바로 왕은 싸늘하게 반응하면서 더욱 더 심하고 악랄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그치면서 노역을 시켜야만 한다는 정책을 세워서 시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백성들은 좋아하기는커녕 분노가 가득 일어나게 된다.
신앙인들이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뭔가 잘되어야 하는데, 잘되기는커녕 더욱 더 일은 안 되어가고,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되어진다면 우리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
좋은 일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온통 깜깜하고 온갖 문제투성이로 가득 가득 채워지고 있다면 우리들은 어떤 마음일까?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등치면서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데, 되어지는 상황들은 긍정적인 상황보다는 더욱 더 어둠이 깔리고 부정적인 상황들로 바뀌고 있다면, 우리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 모세와 아론으로 인하여 바로의 반응이 싸늘해지고 더욱 더 강력한 압제를 내세워서 더욱 더 무거운 노역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어지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전폭적인 주권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보다 앞으로 상황은 더 어려워지면서 지금보다도 더 더 더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들로 바뀌면서 죽지 못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서 살아야 하는 상황들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행시켜 나가는 구원의 과정 중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파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파도가 밀려올 수 있다.
그럴 때에도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붙잡고 신앙인의 길, 믿음의 길을,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걸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 앞에 지금 밀려오는 파도보다 더 크고 맹렬한 파도가 밀려올 것이 분명한다면 이제는 그 역경과 시련과 고난의 파도파기를 역이용하여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파도타기 선수들이 마치 집어삼킬 것 같이 집채만한 맹렬한 파도가 밀려오면 밀려올수록 더 스릴 넘치는 경기를 즐기는 것처럼, 우리들 앞에 밀려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 고난과 역경과 시련의 파도들을 오히려 즐기면서 맞이한다면 힘들다거나 고생스럽다거나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오늘과 같은 삶이 있어서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믿음의 수준이 향상 되어지고 자랄 수 있고,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고난이나 역경이나 시련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서 복불복, 행불행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고난과 역경과 시련이 밀려온다 해도 그 고난과 역경과 시련의 시간을 오히려 즐기려고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그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마주치는 우리들의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 한국교회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붙들고 가야 한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연히 일어나서 역사하실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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