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앞으로 (창50:1-25)
본문
저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앞으로 /창세기50;1-25(201213)
끝까지 예수님을 시인하는 신앙인
과거 유럽의 루마니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루마니아의 푸로레스코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이 공산당에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이 아무리 심한 고문과 박해를 해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산당들은 목사님을 회유시키기 위해서 마지막 방법으로 그의 아들을 끌고 왔습니다.
이제 겨우 11살이 된 아들을 그의 앞에서 발가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끓는 물을 코에 부어 넣는 등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고문을 가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고문당하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아들이 고문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고민 끝에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배신자가 된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아들의 말에 용기를 얻어서 끝까지 공산당에게 항거하였습니다.
평안할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심한 고통, 핍박 속에 있을 상황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않습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코로나19바이러스가 극성인 때에 신앙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 앞에서는 어느 누구나 망설이고 주저주저하게 됩니다.
신앙의 깊이는 고난을 견디어내는 모습을 보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비록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시인할 수 있는 신앙인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우리들은 연약합니다.
누구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항상 성령님께서 찾아와 주시고, 임재해 주시고, 이길 수 있는 은혜와 감동을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들을 끝까지 붙잡아 주실 겁니다. 아멘.
P4.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가계도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 요셉은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로, 천국으로, 본향으로 돌아간다.
야곱은 147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으면서 요셉을 비롯한 아들들에게 꼭 자신을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 막벨라 동굴로 올라가서 장사 지내 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천국으로, 본향으로 돌아가신다.
야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요셉을 비롯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기 위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야곱의 관을 메고 올라간다.
오늘 창세기 50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야곱의 시신을 장례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있는가?
장례를 치른 이후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은 야곱의 장례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세계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일까?
D4.
① 애굽 특권층들의 장례 문화를 보여주시는 하나님.
히브리 민족, 이스라엘 민족의 장례법은 1일장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으면 곧바로 동굴에 있는 조상들의 묘에 옮겨놓는 것으로 장례가 끝난다.
물론 야곱의 경우에는 가나안 땅과 애굽의 고센 땅이라는 거리상의 문제가 있다.
고센 땅에서 가나안 땅까지 관을 운구하여 장례식을 거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창세기 50장에 기록된 야곱의 장례식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례문화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애굽인들의 장례법을 소개하는 것에 불과하다.
50장에 기록한 장례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들,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장례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애굽인들이 장례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특권층에 있는 애굽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40일 동안 염을 하면서 입관하여 미이라(Mirra)를 만들게 된다.
요셉은 애굽제국의 총리라는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을 때, 특권층의 예우를 받으면서 미이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권층의 애굽인들이 미이라를 만드는 이유는 태양신을 섬기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영원불멸한다는 의식에 의해서 행해지는 장례법이다.
태양, 해는 날마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솟아오르기 때문에 태양신도 영원히 죽지 않고 다시 소생한다는 의미로 미이라를 만드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서 금수산 태양궁전에 보관하면서 1년에 관리비만 16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경비를 충당하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이는 영원히 죽지 않고 소생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었고, 애곡하는 데만 70일이 걸렸다고 기록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어떤 사람이든지 홀몸으로 한 번 세상에 왔다가 언젠가 반드시 홀몸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히브리서 9:27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한 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영혼은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본향으로 돌아가든지, 삼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혼이 떠난 죽은 시신은 미이라로 만들든지, 그날 바로 동굴에 장사를 지내든지, 무덤을 파서 묻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육신은 흙에서 온 존재로 흙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화장(火葬)하든지, 아니면 예전처럼 매장(埋葬)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지금 처해 있는 처지와 문화에 따라서 합당하게 장례식을 거행하면 된다.
오늘 하나님은 모세5경을 기록하는 모세에게 창세기를 마감하면서 그 당시 최강의 제국으로 불렸던 애굽제국의 장례법을 소개하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야곱이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족장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거대한 장례식을 거행하는 축복을 받아 누렸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하는 것이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특권층이 아니었다면 미이라로 만들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시신을 운구하여 조상들의 묘에 장사지내는 것으로 장례식이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이 야굽의 절대지존이라는 바로 다음 가는 총리라는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 애굽인 특권층들이 누리는 거대한 미이라를 만들면서 장례하는 것이다.
② 고향을 방문하게 하시는 하나님.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돌아올 것을 허락해 주십사 청원한다.
바로는 요셉과 형제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고 돌아오라고 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것을 허락한다.
바로의 허락을 받은 요셉과 형제들은 어린아이들과 가축들을 돌 볼 수 있는 몇몇 종들만 고센 땅에 남겨두고 대부분의 식솔들은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맹세하게 한 그대로 아버지의 관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간다.
야곱의 장례 행렬에는 수많은 애굽인들의 정치인들도 동행한다.
7-9절에 보면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무리들이 동행하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야곱을 장사하기 위해서 이동하게 된다.
요셉과 일행들은 요단강 건너편까지 올라와서 아닷(Atad) 타작마당에서 7일 동안 애곡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런 모습을 가나안 사람들은 ‘애굽인들의 통곡’이라고 하면서 “아벨미스라임(Abel Mizraim)”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만큼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대단했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로 인하여 요셉은 근 40여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다른 형제들은 17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게 된다.
비록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서 고향을 방문하는 길이지만, 가나안 땅을 방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가나안 땅은 하늘 아버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다.
장차 이스라엘 민족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건국하고 차지해야 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어쩌면 가나안 땅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모습을 그림자,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셉의 일행들이 가나안 땅, 고향 땅을 방문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요셉은 가나안 땅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지낸 후에 베들레헴에 있는 엄마 라헬의 묘소도 둘러보고 돌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은 마음의 고향이든, 육신의 고향이든, 영혼의 고향이든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살아간다.
고향이라는 것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고향에 대하여 막연한 그리움, 향수를 지니고 살아간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실향민들, 특히 북에서 오신 35,000명에 가까운 탈북민들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고향을 마음대로 가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들은 육신의 고향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③ 용서의 진가(眞價)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관을 가나안 땅으로 메고 올라가서 장사하고 다시 고센 땅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님들은 커다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요셉의 형님들은 자신들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하면서 두려움에 벌벌 떤다.
형님들은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서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라고 하면서 요셉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형님들은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서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아서 자신들이 직접 요셉을 찾아간다.
요셉의 형님들은 요셉에게 찾아가서는 요셉 앞에서 엎드린다.
형님들은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을 종으로 삼더라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한다.
요셉은 형님들이 이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요셉은 이런 형님들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지고 찢어진다.
요셉은 형님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하면서 가슴으로 통곡하면서 위로한다.
어떤 죄든지 죄를 범한 사람은 두려움에 빠지게 마련이다.
요셉의 형님들은 17년 동안 고센 땅에 살면서 요셉의 극진한 봉양을 받으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버지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요셉이 아버지를 봐서 자신들을 용서한 것처럼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시기 때문에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죄 사함의 확신이 없는 것에서 유래한다.
요한일서4:18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믿음으로 형님들을 다 용서하였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팔아넘긴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하늘 아버지께서 기근과 굶주림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강권적으로 팔아넘긴 것이라고 하면서 17년 전에 이미 용서하였다.
그런데도 형님들은 항상 죄책감에서 해방받지 못하고 늘 죄책감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용서의 진가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형님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6;37에서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깨닫게 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용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우리 신앙인들의 모든 죄악들, 지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악들을 이미 다 용서하셨고, 미래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다 용서하실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모든 죄악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죄가 없는 의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 것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천국에 갈 수 있으려나?“라고 사죄함의 은총에 대하여 의심하는 이들이 이외로 많다.
우리 신앙인들이 죄에 대하여 조목조목 회개하는 죄도 있을 수 있고, 미처 우리가 조목조목 따지면서 회개하지 못한 죄도 있을 수 있다.
설령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더라도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흘리신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죄가 용서받은 것이다.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0.001%의 죄라도 죄 있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간혹 천국에 갔다 왔다고 간증하는 이들이 ”천국에 갔더니 이런 죄, 저런 죄, 무슨 무슨 죄가 그리도 많은지...“라고 하면서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게 된다.
이런 간증은 잘못된 간증이다.
천국에는 절대로 죄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천국에 죄가 있다면 이미 천국이 아니다.
천국에는 눈꼽만큼의 죄도 없다.
천국에는 그야말로 완벽함, 거룩함, 온전함, 완전함만이 존재할 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완벽하게 죄 용서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그 어떤 능력이나 행위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만 죄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오직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죄 용서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이 없다.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죄용서를 받은 확신을 가진 사람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죄용서를 받은 확신을 가진 사람은 어떤 핍박과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항상 담담해지고 당당해지고 견고해지고 자신감 가지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
신앙인들은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힘과 용기가 주시기 때문에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
④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게 하시는 하나님.
요셉은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다.
22-23절에서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기록하고 있다.
연이어 24-25절에서 요셉은 형제들과 후손들에게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라고 맹세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요셉은 110세에 죽어서 애굽인의 장례법을 따라서 미이라를 만들면서 입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00여 년이 흐른 후에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출애굽할 때, 요셉의 관을 메고 출애굽하게 된다.
출애굽기 13:19에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라고 기록하면서 요셉의 관을 메고 출애굽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호수아서 24:3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라고 기록하면서 요셉의 관을 세겜성, 곧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숙곳에 정착하면서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았던 그 장소에 장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곱의 12아들과 후손들 중에서 요셉의 뼈만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서 장사하게 된다.
곧 요셉만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것도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신앙인들은 신앙인들의 뒤를 따라서 신앙인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친다.
서울 합정동에 가면 외국인묘역에 있다.
외국인묘역에는 조선말,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다가 대한민국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선교사들이 많이 묻혀 있다.
묘역에 있는 비석에 그들의 일생에 대하여 세세히 기록한 내용들을 읽어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숙연해진다.
그들의 흘린 순교의 피가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살렸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해지곤 한다.
자유대한민국은 선교사들과 한국초대교회 신앙인들이 흘린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일제시대가 끝나고 1948년 7월에 제헌국회를 열면서 모든 국회의원들이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제헌국회가 열렸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에 건국했음을 선포하면서 자유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어떤 정신 나간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 아니다.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잉태하여 엄마 배속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잉태한 아이가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하듯이 잉태한 대한민국을 출산한 날이 바로 1948년 8월 15일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다.
L4 & B4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나희필 장군이라는 사단장이 계셨다.
나희필 사단장이 지휘하는 사단부대가 모범상을 받게 되면서 만찬을 열게 되었다.
만찬장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직접 나희필 장군에게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마시라고 권한다.
술잔을 받아든 나희필장군은 ‘대통령이 따라준 축하주를 어찌해야 좋은가?’라고 생각하면서 고민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술잔을 들고 나희필장군이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1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만찬장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두 손에 땀을 쥐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이윽고 나희필 장군은 ”각하! 저는 술을 못합니다. 저에겐 사이다로 한 잔 주십시요!“라고 대답한다.
박정희대통령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나희필 장군을 유심히 쳐다본다.
이날의 순간을 지켜봤던 다른 장군은 ”마치 폭탄이 터지고 난 후 엄청난 정적 속에 잠긴 것 같았다.“라고 회고할 정도이다.
대통령이 친히 술을 따라 내민 술잔을 딱 잘라 거절한 적은 없었다.
대통령의 굳은 표정을 지켜보던 국방장관이 순간 벌떡 일어나서, "각하... 나 장군은 원래 술을 못합니다. 그 잔은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하고 잔을 뺏다시피 하여 단숨에 마셨다고 한다.
그날 박정희대통령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위기의 순간을 국방장관의 기지로 일단 넘어갔지만, 만찬장의 분위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은, 의기소침해 있던 나 장군에게 다가가서, ”자네가 진짜 기독교인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만찬장을 떠났다.
이날 만찬이 끝났을 때, 박종규 경호실장이 나희필 장군에게 다가와서 "선배님. 해도 너무 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각하께 망신을 주었어야 합니까? 국군의 통수권자요 일국의 대통령께서, 손수 축하의 술잔을 권하면, 정중히 받아서 입잔이라도 하는 척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야단쳤다고 한다.
분 초를 따지며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 얼굴 표정 하나하나까지 살펴야 하는 경호 실장으로서, 이날 일촉즉발의 그 순간의 초조함과 고뇌가 어떠했을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대통령이 떠나간 후, 선배 장군들이 나희필 장군에게 찾아와서, 군 통수권자 앞에서 너무 경솔했다고 하면서 질책한다.
"이 사람아, 별을 하나 더 달 수 있는 하늘이 준 너무 좋은 기회인데,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나? 내일 일찍 책상 정리나 하게.”
사단장 관사로 돌아온 나 장군은, 정작 매우 불안해야 할 자신의 마음이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면서, "내가 과연 이런 신앙에 대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내일 당장 청와대에서 어떤 책벌이 떨어진다 해도 괘념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겠지, 내가 육사를 졸업할 때, 대대장께서 장교가 되어 술을 마실 줄 모르면, 출세를 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그러나 나를 이렇게 장군까지 진급시켜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나희필 장군은 잠자기 전에 이날 있었던 일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맡기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신앙인으로서 일생을 사는 동안, 술을 가까이하는 삶보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말씀을 의지하는 삶이, 더 신실한 삶이라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군복을 벗게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있었던 나 장군은, 아침이 되자 책상 정리를 끝내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책은 오지 않고, 오히려 별을 하나 더 달고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영전되었고, 다시 3군 사령부 창설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희필 장군의 군대생활에는, 아무도 모르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고 한다.
월남전이 치열할 때, 우리나라 장성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월남으로 갈 때는, 꼭 대만의 한 호텔에서 1일 숙박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잠이 들 무렵 호텔 지배인이 나 장군 방을 노크하더니, 정중히 인사를 하고 책 한 권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여자들의 나체 사진첩이었다.
한 사람 골라 주시면 보내 주겠다고 하면서 돈은 출장비에서 계산이 다 끝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내일 새벽에 교회를 가야 하니까 교회 위치나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후 이 호텔 지배인은, 한국의 고위 인사들이나 장성들이 이 호텔에 유숙할 때마다 “이 호텔이 세워진 이래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과거도 지금도 오직 한국의 나 장군 한 사람 밖에는 없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이, 그것도 공짜로 수청(?)을 들겠다는 아가씨와 하룻밤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수도 있었는데도, 나희필 장군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믿음으로 그날 밤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나희필 장군이 군을 제대한 후에 어느 날 밤에,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부의 차장보 자리의 인선문제로 며칠 밤을 지새던 김재규 부장은, 문득 나희필 장군이 생각나서 새벽 2시에 전화를 한 것이다.
"나 장군이야 말로 바로 이 자리에 앉을 가장 적임자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시오.“
당시 이 차장보 자리는, 중앙정보부의 막대한 예산 집행에 관여하는 요직이기 때문에, 청렴결백이 요구되는 인물을 추천해야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김재규 부장의 보고를 받고 난 박정희 대통령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국의 국가 원수가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잔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한 믿음의 장군 나희필이야 말로, 그 어떤 압력도 부정도 유혹도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잘 추천했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고 한다.
또한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도 나희필 장군에 대한 칭찬을 자주했다.
얼마 후 대통령은, 나희필을 다시 장관급인 비상 기획원 위원장 자리로 영전시켰다.
그런데 만일 이때 영전이 안 되었더라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의 자리, 대통령 시해 현장에 나희필장군은 김재규와 함께 꼭 참석해야만 하는 인물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93년9월16일 위대한 신앙의 장군 나희필 장로는 6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나희필 장군이 임종을 앞두고 새문안교회 목사님의 눈물의 기도를 받는 자리에서 그는 오히려 목사님을 위로하면서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잘 보필하지 못하고 먼저 떠납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찬송을 부르면서 나희필 장군, 나희필 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로, 본향으로, 천국으로 돌아가신다.
야곱의 시신과 요셉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관을 메고 올라가서 장사지내는 것은 저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올라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천국으로 올라가는 삶의 여정을 준비해야 할까?
오늘 야곱처럼, 요셉처럼, 나희필 장군처럼 우리들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저 천국을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렇게 저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 신앙인들이다.
수많은 믿음의 순교자들도 저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 신앙의 위인들이다.
우리들도 신앙의 위인들처럼 저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 붙들고 앞으로 앞으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2020년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한 해이다.
년초에 코로나 19바이러스가 시작하면서 1년 내내 고통속에 살아야만 했던 한 해이다.
코로나로 인해서 소상공인들이 무너지고 서민경제기반이 무너지고, 교회는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정부의 압박을 받아야만 되었다.
정치는 좌우로 극렬하게 나누어져서 피 터지게 싸워야 했던 한 해이다.
60평생 살아오면서 올해와 같은 때가 있었던가 싶다.
어릴 적에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입에 풀칠할 수 없는 보릿고개 시절을 살았었지만, 전염병과 정부의 탄압으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때는 없었다.
그런가 하면 기나긴 장마와 연거푸 찾아오는 태풍으로 인하여 자연재해를 입어서 수많은 재산피해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어서 농산물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던 한 해이다.
이런 과정을 걸치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저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 하나 붙들고 앞으로 앞으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함을 절감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떻게 주님께서 하늘나라로, 본향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더라도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신앙고백하며 저 천국으로 올라갈 준비하며 하루하루의 삶에 매진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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