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참음: 그래서 이렇게 삽니다 (고전13:4)
본문
오래 참음: 그래서 이렇게 삽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오래 참음의 열매는 맹목적 인내와는 다르다!
오늘 본문을 고린도전서 13장 4절로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깨닫게 되는 것인데, 사실은 모든 열매들이 ‘사랑’의 열매로 귀결된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랑의 열매에서부터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나온다고 해도 될 듯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니까,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 역시 사랑의 한 가지이고, 사랑으로 오래 참고 보니 온유해지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게 되는 듯합니다.
이 오래 참음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만큼 오래 참게 되고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시기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 오래 참음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이 쉽게 화를 내거나 시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가 종종 잘못 이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을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성령의 열매로서 ‘오래 참음’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관계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10장 36절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브리서 말씀에 보니, 인내가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태생적으로 참을성이 많거나 무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견뎌냅니다. 그런데 그런 견딤이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다면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음은 아니라는 말이죠.
[좋은 나무 성품 칼럼]에서 대표인 이영숙 박사가 쓴 글의 내용입니다.
“몇 해 전 중국 상해에서 ‘성품 이노베이션’, 가정 성품치유세미나를 진행하던 중에 한 여인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의 엄청난 의처증으로 비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를 보여주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멍 자국이 남아 있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7년 동안 일편단심으로 쫒아 다니는 남편의 모습이 자신을 향한 헌신인 줄 알고 결혼을 결심했다며 여인은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집착과 편집증 같은 증세였고 지나가는 남자에게 우연히 눈길만 돌려도 그날은 여지없이 온몸에 폭탄 같은 주먹세례를 받아야만 했다고 말했습니다. 듣다 보니 남편의 의처증 증세가 정도를 넘어 살인미수 행위로까지 여겨졌습니다. . .
필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그냥 맞고만 살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참아야 하지 않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참으면 끝에는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지 묻자,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 .
그날 저는 인내란 ‘좋은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불평 없이 참고 기다리는 것’이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무조건 참으면 어떤 불행한 일이 속수무책으로 일어나는지 예고해주면서, 남편에게 의처증 치료를 받지 않으면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단호한 의지를 보여줄 것을 권면했습니다. . .
반면에 어리지만 뚜렷하게, 인내가 무엇인지 알고 정확하게 행동하는 좋은 나무 성품학교의 7세 어린이가 생각나서 입가에 안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가족이 강원도 여행을 떠나 어느 음식점에 들르게 되었는데, 음식점에 들어서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더랍니다. 음식을 시켜놓고 아무도 말을 못하고 있을 때, 용감하게 성품을 배운 친구가 나가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너 인내 배웠잖아. 인내해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아이가 너무나 정확하게 “엄마, 인내란 좋은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불평 없이 참고 기다리는 거예요. 이 음식점에서 참고 기다리면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는데?”라고 되묻더랍니다. 결국 아이의 어머니는 정확하게 인내라는 성품의 개념을 알고 있는 아들에게 감탄하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인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인내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인생에 후회를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문애란 씨가 쓴 『출근하는 그리스도인에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분이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느꼈던 것,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묶어서 낸 책입니다. 책에 이런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한창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어머니가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의사가 파킨슨병에 대해 너무나 암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마치 그 자리에서 금세 절망적으로 무너져 내릴 것처럼.
게다가 어머니가 직접 파킨슨병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가족을 말려 죽이는 병이다”라는 말을 듣고 온 어머니는 무척 괴로워했다. 그래서 본래 다녀왔던 병원 대신 한방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방병원을 1년간 다니면서 어머니의 병은 더 빠르게 악화되었다. 그러다가 신문에서 아산병원의 어떤 박사가 파킨슨병을 잘 본다는 기사를 읽었다. 서둘려 병원을 찾아갔고, 그때부터 그분이 어머니의 주치의가 되었다.
어머니는 정말 신세 지기 싫어하는 분이었다. 게다가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맨 처음에는 종이 기저귀를 완강하게 거부했고, 지팡이를 짚는 것, 휠체어를 타는 것 등등 병을 받아들이는 과정 하나하나를 견디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본래 수묵화를 그리는 화가였기 때문에 매일 묵을 갈고 그림을 그렸는데, 더 이상 그림조차 그릴 수 없게 되자 너무나 가슴 아파했다. 그렇게 곁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병이 깊어지는 것을 보았다. 기도도 하고, 자주 가서 보살펴 드리고, 응급실도 수없이 들락거리면서.
파킨슨병의 경우 점점 악화되다가 심해지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사지가 뒤틀리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약을 먹으면 좀 괜찮아졌다. 하지만 언제 또 그런 고통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때때로 차라리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주말에는 가능한 한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돌보며 지냈다. 어머니가 이쪽 방에서 자고 나는 그 옆방에서 자다가 부르는 소리가 나면 건너가서 기저귀도 갈고, 다른 필요한 것을 챙겨 주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해에 아픈 어머니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엄마, 나 죽고 싶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눈물이 고이는 너무 후회스러운 순간이다. 그렇지만 인생은 한번 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소중한 시간이라도 단 1초도 되돌릴 수 없다.
우리는 인내하지 못함으로 인해 후회를 경험하기도 하고 그로인해 그 인내가 우리의 삶에 아주 소중한 열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능력이 그렇게 인내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그 인내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친밀함에서 오는 열매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친밀할 때와 그러지 못할 때의 ‘행동’에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음’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친밀함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가 중요하겠죠.
두 군데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그리고 에베소서 4장 32절의 말씀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누군가를 참 용서하기 힘들 때,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힘들 때,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힘들 때, 우리가 받은 사랑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세워주는 것이 힘들 때,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죄 가운데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너무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친밀함의 교제를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친밀함’의 문제는 일상 속에서, 그리고 생각보다 여러 가지 신호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여기서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던 때, 사무엘에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왜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을까요? 그런 추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무엘에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 엘리 제사장의 음성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음성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다면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친밀함’과 이 말씀을 적용해 본다면 그런 것이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신비하게 다가오기 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를 통해, 우리의 환경을 통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요? 단지 우리를 부르시는 친밀함의 초대에 우리들이 무심한 것은 아닐까요?
지난해 교인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갔다가, 마지막 여정으로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꽤 비싼 비용을 내고 유적지에 들어가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그 유명한 알카즈라(보물창고)를 오른쪽에 두고, 산 위로 울라가는 코스가 있어서 교인 몇 명과 함께 올라가려고 하는데 베드윈들이 자꾸 따라 붙으면서 흥정을 합니다. 그 코스는 위험하니 가이드를 동반해야 한다고, 가는 길에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요구합니다. 일단 돈을 내고 들어온 공원에서 비공식적으로 또 돈을 내라고 하는 데에, 이 사람들이 자꾸 따라붙으면서 돈을 달라고 하는 데에 화가 났습니다.
결국은 ‘no’라고 소리를 지르고 자리를 벗어났는데, 그게 내내 제 마음에 걸렸습니다.
교인들과 성지순례를 와서, 교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떠 오른 것이, 제가 성령님의 음성에 무감각 했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거룩한 뜻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일상에서
성령님을 따라가는 것, 성령님과 가장 친밀한 순간에 열리는 열매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조금 더 연관성을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친밀함의 결과로, 오래 참음의 결과로 우리는 온유해지며 상대방에 대하여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령의 열매가 오고, 그 열매의 풍성함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존 오토버그의 『관계훈련』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워싱턴 대학의 가트맨 연구팀은 부부들이 보내는 ‘초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이혼을 향해 치닫는 가정의 남편들이 아내의 초대 중 82%를 무시하는 반면 안정된 가정의 남편들은 아내의 초대 중 19%만 무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내의 경우는 50%와 14%였다.”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자지 않으면 내 휴대폰 좀 갖다 줄래?”라는 말에,
친밀함을 일으키는 반응은 “알았어, 또 다른 건 부탁할 거 없어?”라고 하거나,
친밀함에 찬물을 끼얹는 반은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알았어’라고 말하기까지 한참 뜸을 들였다면 그것은 “아유, 귀찮아. 이번에는 갖다 주겠지만 다시는 그런 심부름을 시키지마”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오토버그 책의 내용을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우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친밀함의 초대에 대하여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커피 한 잔 할래?”
태생적으로 초대를 열렬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좋아 내가 커피를 살까?”
만약 그렇게 반응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초대에 응할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어쩌지? 지금은 바쁜 일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지만, 오후에는 어때?”
그런가하면, 쉽게 상대방의 초대에 거부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면
“어쩌지? 시간이 없어. 할 일이 많아서. . .”
그렇게 대답함으로 인해 관계와 친밀함은 멀리 사라져 갑니다.
마지막으로 무시하는 태도가 있죠. 지극히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한 태도입니다. “됐어, 마셨어!”진정한 초대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커피를 마셨을 수도 있고, 같이 마시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초대를 무시하면 다시 초대를 받을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친밀함은 초대에 응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초대에 우리가 응답하기 시작할 때,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끊임없이 사람들을 찾아가 부르시고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세요. 그 여인을 영적세계로 초대하셔서 그 여인이 가진 영적 갈증을 해결해 주시려는 의도죠.
누가복음 19장에서 여리고로 가시다가 감람나무 위에 앉은 삭개오를 향해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라는 말씀 역시, 그의 인생을 바꿔 놓으시려는 예수님의 초대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말은 ‘나를 따르라’는 초대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평생을 어부로 살던 사람, 죄를 짓고 자신을 위해 살던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밤에 찾아온 바리새인에게 초청장을 보내셨습니다.
친밀함을 위해 일상 속에서 살던 우리를 ‘함께 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는 응하던지, 거절하던지, 무시하던지 반응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 때는 참을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친밀함의 간격이 벌어지면 ‘조급함’이 찾아옵니다.
존 오토버그가 쓴 『관계훈련』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친절함’에 대한 오해들을 몇 가지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런 문장입니다.
“친밀해지면 마음껏 짜증내고 화내도 괜찮다.”
한때 ‘표출(ventilationism)’이라는 치료법이 유행했는데, 화가 나면 그저 표출하라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든 물건을 집어던지든 벽을 치든, 어떤 식으로든 뚜껑을 열고 증기를 내보내라고 권합니다. 이 치료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화를 쌓아 두는 것이 좋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냄비에서 물을 끓이다가 가끔 증기를 빼내지 않으면 뚜껑이 날아가는 것처럼 화도 계속해서 쌓이면 폭발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화를 마구 쏟아 낸다고 기분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화가 나는 경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분출하면 자신이 강하다는 착가에 빠지게 되고 더 큰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또한 화풀이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화를 분출하는 사람은 후련할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감정적인 샌드백으로 삼는 것은 관계를 끝내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잠언 29장 11절의 말씀
11.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오래 참으면 맛보는 풍성한 성령의 열매!
지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내가 필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네요. 성지순례를 마치고 저 혼자 비행기를 탔습니다. 토요일 예배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요르단에서 터키로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 비행기가 뜨지 않는군요. 그러더니 이렇게 방송이 나옵니다. “이유를 모르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이 비행기 이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든지 내려서 기다리든지 해야 합니다.” 이스탄불에서 2시간 머무르고 한국행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짐도 다 실어 놨는데. . .
그런데 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으니 ‘오래 참음’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화가 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후, 방송이 나오네요.
“좋은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스라엘 관제탑에서 이륙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지금 이 설교를 타이핑을 하고 있는 순간, 한국으로 가는 연결 편을 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지 않고 참았다는 것이 참 기쁘군요.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풍성한 열매를 맛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듭니다. 열매 중에 하나는 친절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묘하게도 비행기와 연결된 이야기들이 많이 생각나네요. 2019년 1월 제주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고 없이 비행이 3시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제주에서 미팅이 잡혀 있는데 시간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화가 났던 것은, 그런 상황을 항공사에서 알려주지 않은 채 보딩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게이트 앞에 안내하는 사람도 없이 말입니다. 일단 데스크에 가서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다른 항공사표로 구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데스크 직원에게 화가 나서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모든 승객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비행기를 바꿔 타고 자리에 앉았는데 핸드폰 알림 메시지가 두 번이나 와 있었습니다. 습관적으로 전화를 무음으로 해 놓다보니 제가 미처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표를 바꾸는 과정에서 직원이 불친절하게 응대했다고 생각했는데, 화를 내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항공사 직원이 잘 참았더군요. 다른 항공사 직원도 불친절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늘 특별대우만 받던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 같네요.
그래 참는 거구나! 내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니 참을 수 있는 거구나!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오래참고’라는 말을 희랍어 뜻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아주 인상적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물이 끓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중이라고 한다면, 물이 끓는 속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열을 내는 스토브의 종류나 주전자의 크기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불꽃의 세기가 아니겠습니까? 불꽃의 강도죠. 불이 약하면 물은 천천히 끓습니다.
인내란, 이렇게 스토브의 불을 약하게 줄이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순진하게 상황을 모른다거나 잘못된 행동을 모른척하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꽃을 약하게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물이 끓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해 분노가 일어나고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분노의 불꽃을 약하게 하고 기다리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9.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만일 주께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오래 참으실 이유가 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하셨던 말씀과 아주 유사한 구절이 마태복음 18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빚진 자와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그의 가솔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지만, 그 사람은 빚을 갚을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 가운데서 왕께 나와 애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6-27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소서”라고 인내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죠.
맥스 루케이도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길게 늘어선 줄에서 오래 잘 참는 정도의 덕목 이상이다.
인내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올 수 있도록 길에 깔린 붉은 양탄자와 같은 것이다.
만일 인내가 없었더라면 자비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그가 법정을 나서자마자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에게 단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자 목을 틀어쥐고는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동료가 똑같이 엎드려 구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9-30절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왕이 이렇게 참아 주었는데 그가 그렇게 인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왕은 자신이 베푼 인내와 사랑에 전혀 감동하지 않은 사람, 즉 자신이 받을 형벌을 면했다고 안심했을지 모르지만 은혜에 감동하지 못한 그 사람을 옥졸들에게 넘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이 베푼 은혜를 이 사람이 정확히 이해하지도, 그 사랑을 누리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인내를 경험했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인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자비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참으시는 인내를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8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았듯이 왕이 베푼 인내를 가슴으로 깨닫지 못하면, 그 인내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참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조금만 참는다면, 조금만 주전자가 천천히 끓을 수 있도록 분노의 불꽃을 줄인다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묵상 팀에게 ‘오래 참음’으로 당신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나눠 보자고 했습니다. 오랜 묵상 끝에 나온 이야기들은 “그 때는 참는 것이 참 바보 같고 억울하다고 생각했는데, 참고 나니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감사한 결과들이 있네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참아준 이야기,
남편에게 참아준 이야기,
회사에서 상사에게 참아준 이야기,
참 힘든 사람을 만났지만 화를 내지 않고 바보같이 참아준 이야기.
결론이 참 간단하더군요.
참았을 때 후회할 일이 없었고, 참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부끄럽고 손해 봤던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것이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일진대, 참음으로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는 확신이 우리를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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