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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예수님을 영접하며 살아봐요 (요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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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예수님을 영접하며 살아봐요 = 요한복음4;43-45(191013)


 


PW : 믿음       BIW : 따뜻하게 영접하라         AG : 갈릴리 사람들


TS : 믿음이란 매사에 주님을 영접하며 사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나이


 


어느 남자가 사슴목장을 찾아가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주인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슴이 몇 마리나 되나요?”


“289마리요.”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80 넘었는데, 끝자리는 잘 모르고 산다오.”


“아니, 사슴 숫자는 정확하게 아시면서 어찌 어르신의 나이는 모르십니까?”


“그거야 사슴은 훔쳐가는 놈이 많아서 매일 세어 보지만 내 나이야 훔쳐가는 놈이 있어야 말이지. 내 나이를 훔쳐가는 놈이 없어서 그냥저냥 산다오.”


어르신은 모든 일을 유머로 살았습니다.


매사에 유모로 사니까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항상 웃음으로 사니까 80이 훨씬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건강하게 삽니다.


우리들도 유머스럽게 웃으면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P4.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사람들의 부탁으로 이틀 동안 사마리아 성읍에서 지내시고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오신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삽시간으로 갈릴리 지방에 퍼져 나가게 된다.


갈릴리 지방에서는 보름 전 쯤 유월절 절기, 무교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순례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이들이 많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이적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님께 달려가서 따뜻한 맘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러면 갈릴리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영접할 수 있었을까?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영접함으로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D4.


 


① 사역지로 돌아오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공생애 하시는 3년 동안의 절반가량은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감당하신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녀오는 길에 유다 지역과 사마리아 성을 걸쳐서 갈릴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갈릴리로 돌아오시면서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사역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면 우리들은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주님의 막중한 사명을 맡은 자로서 우리들이 있어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


우리들이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이 우리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최적지일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디에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고 계실까?


과연 우리들이 지금 머물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주님을 위한 사역일까? 아니면 우리들의 야망, 꿈을 위한 사역일까?


우리들의 사역은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역하는 것이라야 한다.


 


②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배척당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44절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3;54-58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신상보훈의 말씀을 전하신 후에 고향인 나사렛 동네로 돌아가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려고 하신다.


본래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의 회당에서 토라를 낭독하고 가르치시는 회당장이나 랍비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나사렛 동네에서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사셨던 분이다.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목수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면서 많은 동생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았던 분이다.


그런데 메시야로서, 구세주로서, 주님으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당에서 회당장이나 랍비들이 하는 토라를 낭독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하니까 반발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랍비처럼 토라를 낭독하고 가르치려고 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배척한다.


그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을 쫓아내고 만다.


회당에서 쫓겨나신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라고 하면서 한탄스러워하신다.


예수님은 더 이상 나사렛 동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도 않으시고, 이적을 베풀지도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의 말씀을 요한은 아주 짧게 44절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창조주요 빛이요 생명이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할 때가 있다.


곧 예수님께서도 가는 곳곳마다 인정받고 추앙받은 것이 아니라 거절당할 때가 있었다.


사도들도 사도행전이나 초대교회 시절에 보면 언제 어디서나 환영받고 추앙받고 인정받는 삶을 사신 것이 아니다.


인정받고 추앙받고 높임을 받을 때도 많았지만, 때때로 사도들과 신앙인들이 가는 곳곳에서 배척당하고 몰매를 당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몰차게 거절당하면서 핍박과 박해를 받으셔야만 했던 시절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때때로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몰매 당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배척당할 때, 그렇게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이겨내며 살아야 한다.


그런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하는 마음으로 대처하면 수없이 거절당하고 몰매 당하고 무시당해도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던 일이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은 매일매일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몰매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 때문에 거절당하는 것ㅇㄴ 기분 나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거절당하고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고 행복한 일이다.


 


③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 동네에서는 무시당하고 몰매를 당하면서 거절당하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지도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왔을 때는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영접하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지역에서는 매몰차게 배척당했지만, 어떤 지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영접해 주는 지역도 있는 것이다.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게 된 원인을 4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순례객으로 찾아갔던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성전정화작업도 직접 목격했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것이다.


곧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하시기 전의 모습만을 본 사람들이고, 갈릴리 사람들은 공생애 하시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 판단하는 기준이 약간씩 다른 것이다.


어쩌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공생애 사역을 보지 못한 것, 듣지 못한 것, 알지 못한 것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면서 거절하는 죄악을 범하고 만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공생애 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따뜻하게 맞이하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신앙인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공생애 하시기 전의 모습만 보지 말고, 공생애를 감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면 예수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같은 집에서 큰 형님으로, 큰 오빠로 살던 예수님이 어느 날부터 메시야라고 하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봤을 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런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큰 형으로만, 큰 오빠로만 알았던 예수님을 처음에는 나사렛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잘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강하게 임재하는 모습을 직접 자신들의 두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느낀 이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큰 형으로만, 큰 오빠로만 보지 않고 메시야로,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된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된 동생들은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을 입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와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절한 나사렛 사람들과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영접한 갈릴리 사람들을 볼 때, 우리들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난 경험, 체험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태도와 자세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우리의 온 몸과 오감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듣고 말하고 손을 잡아보는 체험을 해야만 한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하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고 만지고 체험하는 사람이다.


 


④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이함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신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쫓아냄으로 예수님께서 더 이상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지도 않고, 이적도 행하지 않으면서 떠나게 된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영접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갈릴리 사람들을 향하여 정말 진귀하고 보배로운 하늘나라의 생명, 영생의 말씀을 전해 주신다.


갈릴리 사람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신령한 세계를 말씀으로 전해듣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된다.


 


우리들이 마음으로, 영혼으로, 온 몸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으면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기름 부어 주시면서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하늘의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입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다.


 


L4 & B4.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뜻하게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하고 영접해야 할까?


 


① 우리들의 온전한 주인님, 주군으로 모셔야 한다.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주종관계에 있어서 사용하던 용어이다.


노예제도와 주종관계라는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시절에 종은 주인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과 순종을 해야 하는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누군가를 자신의 주인님으로, 주군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 주군이 자신의 모든 것이고, 나는 그 주인을 위해서, 그 주군을 위해서 가장 귀한 자신의 피,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인님, 나의 주군으로 모시고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들의 모든 것까지, 피와 생명까지 기꺼이 바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 생각도, 내 마음도, 내 영혼도, 내 지식도, 내 능력도, 내 시간도, 내 건강도, 내 돈도, 내 가족도 하나 없다.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크던 작던, 많고 적던지 그것은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잠시 나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맡겨주신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오직 내 목숨 하나 있는 것까지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들을 바치고 순종하고 복종하고 충성하면서 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 온전하게 미쳐서 살겠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 미친 사람은 오직 그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무엇이라고 해도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오직 자기가 미쳐서 사는 것만 보이고 들리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께 미쳐서 살게 되면 오직 예수님만 보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귀에 들리고, 우리의 손과 발은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내 삶의 전 부분에 주인님으로, 주군으로 모시고 영접하는 맘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은 매일매일, 매시간, 우리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영접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흔히 모든 삶에 우리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해 드리고 살아가는 Lordship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② 믿음으로 모든 시간 시간을 주인님께 맡김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어야 한다.


 


물을 가득 담은 전기 주전자가 아무리 물을 팔팔 끓이고 싶어도 누군가가 전기 코드에 꽂아주어야 하고, 스위치를 눌러 주어야만 물을 팔팔 끓여서 사람들이 커피도 마시고, 컵라면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전기 주전자가 자기 주권적으로 무언가를 해 낼 수 없다.


누군가가 전기 주전자를 사용해 주어야만 전기 주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전기 주전자는 자기를 사용하려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하는 것이다.


전기 주전자가 전기 코드에 꽂아주지 않으면 절대로 전기 주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전기 코드에 꽂아있어야만 전기 주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듯이,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 하나님께 믿음의 코드에 꽂아있어야만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우리들은 무인격, 무생물인 전기 주전자가 아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인격체다.


그렇더라도 우리들 자신을 온전히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시려는 성령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기 주전자가 아무리 자기를 써달라고 아우성치면서 발버둥 쳐도 누군가가 전기 주전자를 사용해 주지 않으면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할 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듯이 우리들도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사용해 주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마음껏 사용해 주시도록 믿음으로 맡기는 믿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영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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