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길 (암5:14-15)
본문
우리가 사는 길/아모스 5:14-15 / 데살로니가전서 5:14-15
서론
최근 어느 유대인 랍비 출신 목사가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곧 간다’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환상은 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볼 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계의 질서가 파괴되고, 자연재해가 무섭게 확산되고, 극단분자의 테러가 점점 극악해집니다. 인간의 죽을 확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구증가가 죽을 확률이 높은 이유도 되겠지만 그보다 악이 진보하기 때문에 죽을 확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요즘 과학은 살리는 기술보다 죽이는 기술을 발달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외적인 요소보다 인간의 내적 요소로 죽을 확률이 점점 높아집니다. 아무리 봐도 ‘성선설’보다 ‘성악설’이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경은 선을 강조하고 악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사는 길을 많이 제시하였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등 사는 길을 수없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는 길 보다 죽는 길을 택합니다. 참된 성경적 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고,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선이 사는 길입니다. 인간이 선을 택하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완벽한 하늘나라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의 먹거리를 열매 즉 과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셨지만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심으셨겠습니까? 그리고 왜 심어주시고도 먹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창세기 2:17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창세기 3:5에는 뱀이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악을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악을 알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알게 된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었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악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악한 귀신”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선악과를 떠먹은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닌 마귀의 성품인 악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는 선하시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정직하시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인자하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모든 것들의 선함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분의 약속에 대한 그분의 충실성의 보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선하신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항상 선하신 분이십니다.
구소련의 작가 솔제니친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각 사람의 마음속을 뚫고 지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선과 악의 경계선에 따라 어떤 이는 선이 크고 악이 작고, 어떤 이는 선이 작고 악이 큽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름지기 경계선을 선으로 옮겨 마음에 선의 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아모스는 ‘짐’ 혹은 ‘짐진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선지자입니다. 그는 드고아의 목자였고 농부였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 때와 남유다의 웃시야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나라가 번성하고 외적으로 화려하였지만 내적으로 우상숭배와 부도덕이 판을 치고 있었고, 앗수르의 침공이 임박한 것을 알고 북왕국으로 건너가서 회개를 촉구하고 윤리를 강조하던 ‘정의의 선지자’입니다. 아모스가 ‘너희가 죽지 말고 살아라’라고 외친 말씀을 귀담아 듣고 영혼과 육체가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아모스 5:14에는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앗수르의 침공이 임박한 사실을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알게 하시고 외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살길이 무엇입니까? 선을 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선을 구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살길이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사람이 선을 구하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왜 함께 하십니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므로 선을 구하면 하나님과 한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악을 구하면 마귀가 함께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악한 존재이므로 악을 구하는 자를 자기 편으로 여기고 좋아하고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떠나셨습니까?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이 되지 않고 마귀의 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악행의 결과로 하나님이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니 외부의 침략이 그들을 괴롭혔고, 내부의 부패가 그들을 고통 속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6에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을 절대로 하시지 못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10에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세상에서 착한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닮은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세상에서 악이 진보하는 것을 보세요. 얼마나 뻔뻔한 악행이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사기사건은 갈수록 수법이 교묘해집니다. 금융사기에, 보험사기에 이제는 보물선 사기까지 활개를 칩니다. 악한 자들의 소행을 보세요. 마피아나 조폭이 악한 집단인 줄로 알았는데 이제는 탈레반, 알카에다, 이슬람국가(IS)와 같은 종교적 폭력집단이 훨씬 더 악행을 저지릅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지면 어떤 집단보다 더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13에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합니다. 점점 악해져 가는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선을 구하는 지혜와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2:17에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어떤 이가 내게 악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악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선을 구해야 합니다. 선을 구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선을 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성자 프란시스코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친구였고 가난한 삶을 자청해 산 사람입니다. 성자 다미안이 있습니다. 하와이 몰로카이 섬의 한센인 마을로 들어가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과 같이 한센인이 되어 몰로카이에서 죽어 묻힌 실천적인 성자였습니다. 흔히 기도의 사람,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뮐러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15만 명의 고아들을 말씀과 사랑을 잘 양육하였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손양원목사님도 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용서해주고 사랑으로 품어 자신의 양자로 삼은 순교자이십니다. 그 외에도 선한 일을 한 이름을 모를 성인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3에는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먼저 선을 행하라 그리고 선을 행하면 선행을 몰라주기 마련인데 몰라준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선을 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탈을 쓴 야수 같은 악을 행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를 박해한 네로가 있습니다. 그는 로마시를 불 지르고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이라고 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하였습니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독일 아리안 우월주의를 내세워 6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있습니다.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로서 킬링필드를 주도하여 800만 명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폴 포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발칸반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를 선동하여 보스니아계 수십만 명을 처형하여 ‘인종청소’라는 용어를 만들었던 밀로세비치가 있습니다.
잠언 24:1에는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고 합니다. 잠언 21:4에는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고 합니다.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헛것이고 죄입니다. 그러므로 악인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과 함께 하면 악이 물들고, 배울 것은 악한 일밖에 없습니다.
내가 사는 길은 우리가 사는 길이며, 우리가 사는 길은 지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구해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존 파이퍼는 그의 저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순결은 단지 악을 피하는데 있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을 피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공격이 최고의 수비입니다. 악을 공격하고 선을 행해야 악에서 떠날 수 있고 피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꼭 기억해야 할 두 나무가 있습니다. 이 두 나무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를 상징합니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원리대로 삽니다. 인간은 율법대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나무의 원리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생명나무의 원리대로 살면 선한 삶을 삽니다. 생명이 있으면 죽은 삶이 아니라 사는 삶을 살고, 내가 살뿐만 아니라 남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나무는 죽음의 나무이며, 내가 죽을 뿐만 아니라 남을 죽이는 삶을 살게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내게 행하시옵소서. 당신께서 행하시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라도 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 선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면 선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고, 우리 생명이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아모스 5:15에는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고 합니다. 사람이 선하여 정의를 세우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정의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은 불의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이 불의를 세우고, 악한 사람이 정의를 세우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사랑하기에 불의를 행할 수 없고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우리 하나님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이전 성경번역에는 긍휼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을 행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창자가 끊어지듯 아파하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자기를 닮은 사람을 좋아하고, 마음이 끌리는 법인데 하나님이신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악한 자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듯 하나님의 품에서 쫓아내십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를 보세요. 사울은 하나님이 보실 때 최고의 악인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무당이나 점쟁이 같은 신접한 자에게 물어보고 그들을 의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던 사울을 하나님은 죽이셨습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죄를 안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죄를 지었지만 진심으로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전쟁이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물어보는 다윗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살리고 복을 주셔서 나라를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히스기야와 아합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는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므로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반면에 아합은 성경에서 가장 악한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두로 왕의 딸과 정략 결혼하여 우상을 들여와 숭배하였고,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갔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닌 선한 사람으로 꾸미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다듬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하실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 ‘친절한 자들과 착한 자들’(The Nice and the Good)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위기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는 물이 허리까지 찬 동굴에 갇혀 있습니다. 시간은 경각을 다툽니다. 곧 만조가 되면 출구가 없어질 것을 안 남자는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합니다. “행여 내가 여기서 나간다면 이제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리라. 자꾸만 얻고 또 얻으려 하지 않으리라. 모든 권력은 죄이고 모든 법은 덧없는 것이다. 사랑만이 정의다. 법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다.” 작가가 주려고 하는 메시지는 인간은 누구나 선한 마음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위기 앞에서는 선한 마음이 발동하다가 다시 위기를 벗어나게 되면 여전히 악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선’(善)자는 고대 중국의 갑골문시대에는 양(羊)과 눈(目)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양과 말씀(言)으로 변화되었답니다. 선이란 ‘양의 울음소리’라는 뜻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양이 신비한 존재였으므로 옳고 그름을 보고 판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은 정의의 상징이었고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양(羊)자는 좋은 개념을 뜻합니다. 상서러울 상(祥), 아름다울 미(美), 옳을 의(義)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어떤 이는 갑골문시대에 이미 성경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방주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타고 있었다는 뜻의 배 ‘선’(船)자입니다. 배(舟) 안에 여덟(八) 식구(口)가 있었다는 글자가 ‘선’자입니다.
고대 중국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성선설’과 ‘성악설’로 설명하였습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은 천성적으로 양지양능(良知良能)을 갖추었다고 보며 이것에 의해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의 도덕근본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선한 본성에 악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외물에 유혹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사람의 성은 악한 것이고 선은 인위적인 것이다’라고 전제합니다. 성은 선천적인데 이기적 욕망으로 차 있으므로 후천적 노력을 통하여 예(禮)를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후천적 노력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성악설의 주장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자(告子)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인간의 성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과 불선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은 마치 물이 동서로 나뉘어 있지 않음과 같다’고 합니다. 인간은 교육과 수양의 과정을 통하여 선과 악 가운데 어느 성품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마귀는 악합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사람 가운데는 동물보다 더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상위 포식자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본능이지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배가 불러도 욕심으로 잡아먹습니다.
마태복음 12:35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선을 쌓고 악을 미워하고 악을 쌓지 말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선내보’(善內寶)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 속에 보물이 있다는 말입니다. 착한 것은 그 자체가 보물입니다. 인간의 삶을 멀리 보면 착하게 살아서 손해 보는 법은 없습니다.
수도사 아르세니우스는 “우리가 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은 세상의 지식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오. 반면 이집트의 농부들이 선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은 힘써 일하기 때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방법은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힘써 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결론
할 어반의 ‘삶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책에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름지기 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선해야 합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선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집니다.
베드로전서 3:11에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 한 절의 동사를 보세요. ‘떠나’, ‘행하고’, ‘구하고’, ‘따르라’고 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어가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고 선을 미워하기 때문에 죽어갑니다. 내가 죽어가고 있고, 가정이 죽어가고 있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고, 나라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의 시대에 하나님의 성품인 선을 세워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국가가 살고, 세계가 사는 생명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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