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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기도와 응답 (행9: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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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기도와 응답(행 9:23-43)




본문은 지난 단락에서 설교했던 사울의 개종과 그 이후에 교회가 어떠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의 저자인 누가는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평신도들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다가 다시 사도들의 활동을 관심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부터 다시 베드로 사도의 능력 있는 활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개종과 회개는 큰 사건을 일으켰지만, 예루살렘, 다메섹, 가이사랴 등으로 전전했고, 결국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의 훈련기간 중에 자기의 사역을 위해서 준비하였습니다.


이 본문의 내용을 보면 사울이 개종한 후에 정통 유대인들은 사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배신자요,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너뜨려 버린 장본인으로 비쳤기 때문입니다. 또 헬라문화권에서 살았던 유대인들도

보는 시각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이 헬라문화권인 다소 출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의 제자가 되었던 사건은 그들에게 여간 껄끄럽고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한편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회개하여 개종했다고는 하나 기왕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만나고 싶었으나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바나바라는 사람이 사울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간에 되어졌던 경위를 설명하고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사울 즉 바울과 베드로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결국 초대교회의 한 사람은 예루살렘과 유대 전도의 기수로 또 한 사람은 이방을 위한 선교사로 사명을 감당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32절부터 베드로의 전도 여행 중에 나타난 두 가지 이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중풍병으로 8년 동안 자리에서 꼼짝 못하던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친 사건입니다.


또 다른 사건은 다비다라는 여제자 곧 도르가가 죽었는데,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더니 다시 살아난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의 이적과 기사는 베드로의 위대성과 권능 때문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 입니다. 그래서 34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도들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 기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요, 구속주 하나님일 뿐 아니라, 복음 선교의 초기에 주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도 기적의 역사가 있다면 그것도 주님이 직접 역사할 때만 가능하지 사람의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기적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할 때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31절 말씀은 실제로 이 본문의 전후 좌우를 설명하고 개요하는 누가의 상황 이해입니다. 누가는 초대교회의 흐름을 써 나가면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었는가를 사도행전에 세 번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행6:7절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 성장의 첫 번 요건은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할 때라고 적고 있습니다.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성도들이 그 말씀을 잘 받아 먹고 실천하면서 자라야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것이 교회 성장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행16:5절에 보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해야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 개인의 믿음이 자라야 교회도 자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교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여기는 말씀의 원리와 신앙의 원리가 통하는 곳이지, 서로 높아지려든지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는 낮아져야 높아지고, 자기 자신을 비우고 봉사해야 하나님이 쓰시고, 믿음으로 나가야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믿음없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결국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가 오늘 본문의 말씀 곧 행 9:31의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과연 누가는 초대교회(初代敎會)의 성장의 내용을 성령(聖靈)의 감동으로 명쾌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이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특별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선 첫 마디에 "그리하여"란 말은 결과를 이끄는 접속어로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그 동안 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특히 스데반의 순교로 말미암아 교회 성도들이 흩어지는 듯 했으나,


그것 때문에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핍박의 직접적인 주모자인 사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가 되어버리는 크나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제 환난의 바람은 잠들고 드디어 고요가 찾아 왔습니다. 교회가 외부로부터의 환난과 박해가 와도 그것 때문에 교회가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 성장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고 평안해야 교회가 성장한다는 증거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가 교회 성장의 요인으로 평안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처음 시작(時作)할 때 은혜(恩惠)의 분위기(雰圍氣)가 있었을 뿐 여러가지 복잡한 내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교회 안에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 내분이 있었습니다.


기록된 사역과 초기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과의 신경전은 과부들과 구제건으로 노골화되고, 심각한 상태까지 가다가 사도들의 지혜로 겨우 수습의 가닥을 잡았습니다.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의 종 베드로를 속인 것이 곧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되어 줄초상이 나버린 셈이었습니다. 교회가 밖에서 오는 환난도 힘들지만, 안에서 오는 시련과 환난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요소들이 제거되고 교회가 평안과 평온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 성장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교회 성장은 교회가 평안해야 된다는 말에 주목해야 했습니다. 항상 우리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는 교회(敎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법과 질서가 통용되는 곳입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같은 마음을 가진 자, 예수님을 모신 자가 높아지고, 자기 자랑이나 하고 높아 지려는 사람은 낮추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겸손한 자가 신앙의 재미를 보는 곳입니다.


지배욕이 있거나 높아지려는 사람은 늘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평안한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서로 싸우는 가정, 싸우는 사회, 싸우는 국가가 성장이 없듯이 싸우는 교회는 성장이 멈추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평안한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해서 아무런 일이 없이 한 날 한 날을 지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평안은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돕고, 기도하며, 격려하며, 서로를 높여주는, 그래서 모두가 사랑과 감사(感謝)가 넘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저 별 일없이 편안(便安)한 교회(敎會)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평안과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교회 성장의 요인이 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든든히 서 있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의 뜻은 교회가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 공사를 튼튼히 해야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성도 한 분 한 분이 신앙의 뿌리를 내려서 든든히 서야 교회가 바로 서고 부흥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신앙의 연조는 오래 되었는데 든든히 서 있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을 볼 때 늘 마음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조그마한 시험에도 큰 충격을 받고, 조그마한 자극에도 신앙생활의 뿌리가 흔들리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를 멀리 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든든히 서 있지 못한 연고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불안, 초조, 절망으로 가슴 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집도 완벽하게 날마다 행복한 가정이 없습니다. 늘 환난 시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 소리 저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예수 앞에 모든 것을 드리고, 예수 앞에 전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말씀 안에 뿌리를 내려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닻입니다. 그에게 닻을 내리는 사람은 폭우가 쏟아지고 폭풍이 일어나도 아무 겁이 없습니다.


흔들리는 신앙을 가지고는 교회 성장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믿음위에 굳게 설 때에야 비로소 다른 형제를 늘 도우며 일 대 일의 사역과 전도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31절을 다시 보면, 주를 경외함이 부흥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 또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가진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나 내 편의에 의해서 움직이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라도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신본주의 사상에 철저해야 교회가 든든히 자라납니다.


언제나 신앙이 안 자란다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죄를 이기지, 그러하지 아니하면 늘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개혁주의 신앙, 칼빈주의 신앙은 자율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소원 성취의 종교 형태와는 다릅니다.


주 앞에 두렵고 떨리면서도 은총의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확신의 신앙을 가질 때, 개인의 신앙도 자라고 교회도 성장하며 부흥될 줄 믿습니다.


끝으로 누가는 교회 성장의 요인으로서 성령의 위로를 들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 성장 요인은 말씀 중심, 신앙 중심,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고 평안하고 든든히 서야 하지만, 결국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과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성령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비유컨대 성령은 기름과 같습니다. 마치 자동차에 기름이 없으면 얼마가지 않아서 멈추어 버립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지만,

성령의 도움 없이는 멈추기 쉽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가다 서다 서다 가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유는 기름이 떨어진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움과 위로가 없기 때문이며 성령 충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위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상처투성이요, 산넘어 산이요, 강건너 강이요, 시련이 많으나 성령의 위로만이 우리에게 새 힘을 줍니다.


교회 성장의 요인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하여 성령의 위로가 있을 때 입니다. 교회 성장의 원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교회가 평안하도록 노력하며 용서하고 포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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