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 (롬12:14-21)
본문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 /로마서 12장 14~21절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삶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느냐? 너의 삶도 구원받아야 한다.” 그것이 로마서 12장부터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의 삶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은, 12장 1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산제란 우리 몸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말한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 곧 합당한 봉사니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유는 그 믿음에 합당한 삶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과 삶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믿음이 나무라면 삶은 열매인 것이다. 나무가 있는데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 나무를 어디에다가 쓰겠는가? 찍어다가 불어 던져 사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믿는 자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 삶이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삶이 없을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구원받은 삶이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헛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가장 확실한 열매가 무엇일까? 가장 분명한 증거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사랑이다. 사랑으로 봉사하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사랑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열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구원의 증거인 것이다. 여러분 중에 혹시 제가 지나친 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 “아니, 목사님, 구원의 증거는 믿음이지 어떻게 사랑입니까?”라고 되물으실지도 모르곘다. 그러나 저는 분명한 성경 구절을 그 근거로 가지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 또는 새신자를 영접시킬 때 흔히 인용하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5장 24절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구원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일서 3장 14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할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한다. 더욱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한다. 그러니 믿음만 구원의 증거는 아니다. 사랑도 구원의 증거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와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할 때, 다시 말해서, 형제자매를 섬길 때 사랑으로 봉사하라고 그 첫번째 원리를 배웠다. 사랑은 섬김과 봉사의 원리이지만, 그보다 먼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무엇으로 구원받았는지를 알 수 있느냐 하면, 적어도 요한일서에 따르면,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되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까 하는 것을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몸인 교회 곧 형제자매를 어떻게 섬기는 생활을 할 것인가를 다룬 것이고, 오늘은 그 다음으로 나아가서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섬길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바꾸어 말하면 “성도의 인간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맺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두뇌를 갈고 닦고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을 잘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10%인데 비해 대인관계를 뛰어나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85%에 이른다.” 무슨 말인가? 머리가 좋고 똑똑해서 성공할 확률보다 대인관계를 잘해서 성공할 확률이 8배 이상 더 높다는 것이다. 이 통계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일을 잘 못해서 해고 당하는 경우보다 대인관계를 잘 못해서 해고 당하는 경우가 두 배에 가깝다고 한다. 그만큼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 성도들은 믿는 자보다 믿지 않는 자들과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우리는 불교처럼 머리 깎고 산 속으로 들어가서 도 닦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셨다. 우리는 좋으나 싫으나 세상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사명이란 바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빛이 되는 것은 선지자적 사명이요, 소금이 되는 것은 제사장적 사명이다. 그렇게 우리는 좋으나 싫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빛과 소금의 사명을 세상 속에서 이루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굉장히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수준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 삶의 수준이란 경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돈 많이 벌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다녀야 빛과 소금이 된다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경제력이 아니면 무엇인가? 바로 선한 영향력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해 좋은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 큰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원리는 18절에 있고, 두 번째 원리는 21절에 있다.
<18절> 첫 번째 원리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이다. 여기 단서가 붙어 있는데, “할 수 있거든”이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는 경우가 없고 전부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그만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또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할지라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좋은 관계로 지내다가 결국 원수가 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도 이런 한계를 인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우호적이기보다 적대적인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우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믿고 처음 신앙생활 하면서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가 이런 것이다. “우리끼리 잘 살자.” 그래서 어떤 성도를 보면 교회 안에서는 형제자매들과 화목하게 잘 지내는데, 세상 사람들과는 아예 등지고 담 쌓고 사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잘 지내는 그런 사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물론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부터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시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서 불신자들을 섬기고 사랑하여 그들을 변화시키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필요한가? 그들과 적대 관계를 만들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원수를 만들지 말라는 말씀도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 원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 <21절>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하게 대한다고 해서 똑같이 악하게 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불신자가 우리에게 욕을 한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내 오른쪽 뺨을 치면 나도 오른쪽 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내 왼쪽 뺨도 돌려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 시대에 주신 법으로 세상 사람들을 상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 주신 율법이다. 그것은 공의의 원칙에는 부합하지만, 사랑의 원칙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악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영혼을 구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악으로 갚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원리를 첫 번째 원리와 접목해서 생각해 본다면, 세상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해 그들처럼 똑같이 악해지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이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친구를 왕따 시키는 경우가 있다. 왜 친구를 왕따 시켰냐고 물어보면 “왕따 당하기 싫어서요.”라고 대답한다. 또 세상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술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같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도리어 예수 믿는 사람이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술 친구가 되지 않으면 전도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세상 사람들과 술자리를 같이 해서 술을 마시면 그 당시는 분위기가 좋겠지만, 그들이 돌아서서 뭐라고 할까? “예수 믿는 사람도 똑같이 술 마시네.” 하면서 손가락질 한다. 자기들이 술 마시는 것은 괜찮고 예수 믿는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은 손가락질 하는 것이 세상이다. 물론 성경이 술 마시는 것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도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면서 동시에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두 가지 큰 원리인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원리를 마음에 새기고 본문을 들여다 보자. 본문에는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 네 가지 지침이 나온다. 이 네 가지 지침은 논리적인 순서가 없다. 그래서 비교적 지키기 쉬운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겸손한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16절> 무슨 말씀인가?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그래도 겸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만하고 불손한 사람에게까지도 겸손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믿는 자들끼리 모여도 그렇지 않은가? 모임 중에 보면 꼭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고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거만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어휴, 꼴보기 싫어. 두고 봐라. 그러다가 큰 코 닥친다.’ 이런 심리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 연합회 활동을 하다보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장로님 중에 어떤 분이 목사님들에게 말을 툭툭 놓는 분이 계셨다. 그 분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친하고 가깝다고 해도 가까울 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겸손한 이웃이 되라는 것이다. 나에게 겸손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오만하고 불손하게 대해도 나는 겸손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실 처음에 울릉도에 와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해양경찰에 자주 들렀었다. 소장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소장님이 바뀌고 새로운 분이 오셨는데 이 분이 나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말을 하시는 게 아닌가? 아무리 어려도 목사인데 반말을 하시니까 그 다음부터는 자동적으로 발길이 끊어졌다. 그런데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소장님 생각이 났다. 나에게 말을 낮춘다고 해서 내가 안 만나려고 한다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에 용기를 내어서 다시 겸손한 이웃이 되어 찾아 뵈려고 한다. 우리는 다 그런 사람들이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겸손한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만하고 불손한 이웃이라도 겸손한 이웃이 되어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둘째, 공감해 주는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15절>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어려운가, 아니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어려운가? 제가 보기에는 전자가 후자보다 어렵다. 물론 함께 울어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웃이 슬픈 일을 당해서 울고 있는데 항상 내 눈에서 눈물이 나는가? 아닐 때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이웃의 집에 초상이 나도 눈물 한 방울 안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인지상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함께 울어주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나도 그런 슬픔과 아픔을 당했다고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이웃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즐거워하고 웃을 수 있는가? 이웃이 잘 돼서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을 때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까? 이웃이 더 좋은 차를 사게 되었을 때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까? 우리 집 애는 취직이 안 돼서 놀고 있는데 이웃 집 자녀가 승진을 하면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까? 함께 즐거워하기는 커녕 배가 아파 견디지를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다. 남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지 말고, 이웃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비극이 어떤 사이에서 일어났나? 형제 사이에서 일어났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자신은 거절 당하고 동생은 잘 되니까 가인이 어떻게 했나?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 그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질투의 기질이 DNA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어떤 형제 목사님 두 분이 있는데, 동생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는 부흥하고, 형님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의 교회가 잘되고 은혜스럽다는 말을 형님이 들으면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이다. 목사도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공감의 시대다. 성도는 특별히 공감해 주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그런 이웃이 되어주시기 바란다.
세 번째는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14절> 축복은 누구나 좋아한다. 저는 심방을 가면 예배 중에 먼저 축복을 선언한다. 그 가정을 위해 복을 빌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원칙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원칙이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 어느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먼저 평안을 빌어주라는 것이다. 만약 그 집에 그 평안을 받을 자가 있으면 빈 평안이 임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빈 평안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를 축복하는 이웃을 축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대적하고 박해하는 이웃이라면 그런 이웃까지도 축복하는 일은 결단코 쉽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박해라고 하면 신앙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말하는데, 우리는 사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는 그런 나라에 살고 있지는 않다. 물론 아직도 어떤 성도는 불신 가정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는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신앙 때문에 받는 박해는 없다. 특히나 이웃이 우리에게 박해를 가하는 경우도 없다. 스데반이 당한 것처럼 우리에게 돌을 던지는 이웃도 없고, 예수님이 당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채찍질 하거나 가시 면류관을 씌우거나 십자가에 못 박는 이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항상 우리가 이웃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입에서 축복만 나오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오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한다. 과연 우리 입에서 축복과 찬송만 나오는가? 아니면 때로는 저주도 함께 나오는 것은 아닌가? 나는 축복만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한 입으로 축복과 저주를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그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경우에도 이웃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신다. 우리를 박해하는 이웃까지도 스데반과 예수님처럼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며 축복하지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게 하는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19~20절> 20절 말씀은,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어려울 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마실 것을 갖다 주면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얹는 것과 같다고 한다. 뜨거운 화로를 머리에 얹은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화들짝 놀라며 벌쩍벌쩍 뛰겠는가? 원수인 줄 알면서도 가서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면 그 사람은 머리로부터 전신이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불에 녹아버린 마음에는 복수의 칼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일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도 다 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가? 십자가의 원수였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 우리들이다. 나 때문에 주님이 못 박히셨고, 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 이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도 가서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원수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원수에게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원수가 어디서 참 사랑을 경험하고 회개하겠는가? 비록 손양원 목사님처럼 원수를 양아들 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배고플 때 먹이고 목 마를 때 마시울 수 있는 이웃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 할 수록 우리 실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면 할 수 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돌에 맞아도 저주하지 않고 용서하며 기도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사랑으로는 참된 이웃 사랑이 불가능하다. 성령 충만하여 십자가의 사랑이 내 안을 가득 채울 때 비로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하여 원수까지도 저주하지 않고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는 복된 날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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