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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 (계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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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 (계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2-17) 


어떤 청년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주례자 앞에서 신부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신부입장 결혼 행진곡이 한창 울려 나오는데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내 식장이 소란해졌고 주례 목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축하객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이 족히 지나서야 신랑이 헐떡거리며 돌아왔는데 얼굴과 예복이 온통 물에 젖었고 게다가 검뎅이 칠로 뒤범벅이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주례를 계속해 주시지요?" 그 청년은 죄송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주례목사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신랑은 어디를 갔다왔습니까?" "목사님, 저는 소방수입니다. 신부의 결혼행진곡이 막 울려 퍼지려는 순간 화재 싸이렌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불을 끄고 지금 달려오는 길입니다." 신랑의 이 말에 남은 축하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정말로 책임감이 강한 충실한 소방수라며 칭찬해 마지 않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려면 자신에게 맡겨주신 위치를 충실히 지키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는 예수의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칭찬받은 것은 신앙생활이 극히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 믿음을 저버리지않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던 버가모(pergamos)는 20만권 이상의 양피 두루마리 도서를 간직한 정도로 세계적인 큰 도서관이 있는 유명한 문화중심도시이며,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권력과 정치의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황제숭배의 본거지이며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우스 등의 이교 신전이 즐비했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치료와 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에는 뱀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했었는데 이는 뱀을 숭배하면 각종 질병이 낫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뱀은 사단의 상징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곳을 '사단의 위가 있는 데'(13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버가모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가모는 사단의 지배력이 가장 강한 곳이며 그만큼 사단의 권위가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싫든 좋든 기독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 도시를 벗어나 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는 사는 곳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다해도 그곳이 예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 파송받은 곳이라는 믿음과 사상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거나 그 환경에 좌우되는 생활이 아니라 죄악의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간혹 지금 사는 곳보다 신앙생활이 쉬운 곳, 그리고 전도가 훨씬 용이한 곳에서 생활하면 신앙생활도 복음 전도도 월등히 나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않습니다. 어떤 예수 믿는 청년이 모 회사에 다니는데 그 회사 분위기가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않고 회사원들에게 복음 전도도 쉽지 않는 곳이어서 이곳보다 규모는 작아도 기독교인 사장에 대부분 사원들이 기독교인들인 작은 회사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모든 생활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시는 기독교인의 삶은 이 청년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과 직장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그곳을 벗어나 도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과 직장일수록 더욱 더 그곳에 머물면서 그곳 환경과 직장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살라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고 그곳을 복음으로 정복해야하는 사명을 지닌 것입니다. 기독교가 초대교회부터 신앙생활과 복음 전도의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도피해버렸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버가모는 황제숭배와 각종 이교숭배, 우상숭배 등 사단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가모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며 충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말은 어떤 이교세력과 우상숭배세력의 도전과 핍박에도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고 예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이름을 끝까지 증거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순교자 안디바는 터툴리안의 말에 의하면 놋쇠 가마에 서서히 구어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증거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사실을 알고 그에게 "충성된 증인"이란 예수 자신의 칭호을 주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 이름을 굳게 잡았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에도 충성을 다했던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널리 알려진 존 와나메이카는 세계 주일학교 운동에 크게 기여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백악관에서는 신망이 두터운 그에게 장관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으나 그는 정부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관이 되면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사양했습니다. 그는 "내가 장관이 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만약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내 고향 필라델피아로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면 장관이 되어도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래도 좋다고 승낙하여 그는 장관이 되었습니다. 장관 직책이란 놓쳐도 되지만 주일학교 교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직책은 결코 놓쳐서는 안될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미국의 장래를 위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시했던 미국의 주일학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미국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어떤 유혹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맡은 일에 충성된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충성된 증인이 되어 예수의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유별나게 살지 말고 조상적부터 지켜져 온 관습이나 도덕, 풍습이나 윤리를 따른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린다고 그게 뭐 잘못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림으로 자손들이 잘 되기를 빌며 자손들로 하여금 불효를 막고 부모를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며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자는 것인데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언뜻 들어보면 참으로 좋은 취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상숭배를 통해 후손들이 잘 되기를 비는 것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자손들로부터 숭배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후손들의 안위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에 제사상 받아 먹으러 올 수도 없고 자손들의 안위를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상을 차려놓으면 조상의 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얼싸 좋다하고 찾아와 숭배를 받기 때문에 결국 귀신 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상을 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우애하고 부모에게 공경하는 것도 주 안에서, 즉 하나님 말씀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이 세상 풍습이나 관습,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격리되어 살라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경멸하거나 증오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도덕이나 윤리 등 세상 사람들이 사는 표준보다 더 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일껏 제사상 차려 놓고 귀신들을 불러들여 부모공경, 형제우애 운운하므로 윤리 도덕을 귀신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므로 윤리 도덕을 하나님 수준으로 끌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세상 수준으로 끌어내려 세상 풍습과 관습을 따르게 하지 말고, 세상의 수준을 금세와 내세에 확실한 약속있는 기독교 수준으로 끌어 올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은 한 마디로 세상에 적당히 타협해서 쉽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버가모 교회 안에 일부 성도들에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검은 심판의 칼인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검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6:17)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 잘못과 죄악을 깨우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생활 내용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 수준에 살고 있다면 과감하게 살던 방식을 말씀의 칼로 절단하여 버리고 회개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않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므로 예수 이름을 더럽히면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심판의 칼이 되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 신앙의 성결을 지키며 주어진 직분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족제비과의 어민(ermine)이란 동물은 그 털이 순백이어서 비싼 털옷의 장식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어민은 자기의 털을 깨끗이 간수하는 것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이 본능을 이용하여 사냥꾼들은 어민이 사는 곳의 출입구에 더러운 물질을 발라 놓습니다. 어민은 오물이 없는 다른 쪽 입구에는 사나운 사냥개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털을 깨끗이 간수하기 위해 깨끗한 입구로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몸을 더럽히느니 죽음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세상과 타협하여 예수 이름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예수 이름을 굳게 잡고 죽음을 택하는 순교자의 성결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죽기까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충성된 증인으로 산 성도에게 예수께서는 "감추인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리라"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감추인 만나"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할 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감추인 만나"는 먹어서 죽지않고 영생하는 거룩한 생명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는 초대교회 당시 연회 잔치 초대권으로 <텟세라>라 불리우는 흰 돌을 주는 풍습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텟세라, 즉 흰 돌을 가진 사람만이 그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흰돌을 주시겠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권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은 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으로 이제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맛본 자외에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의 보증으로 주신 성령체험을 통해 여러분의 이름이 흰 돌 위에 기록된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불레셋 장수 골리앗이 칼과 창과 단창으로 이스라엘의 군대를 치러 나올 때 이에 맞선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 곧 적장 골리앗이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치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간단히 쓰러트리고 승리했습니다. 과연 다윗의 말대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며 그 이름,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세상 끝날까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것을 놓친다해도 예수 이름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예수 이름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리친 이후 다윗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다 겪으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인류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야 할 이유는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고 했습니다. 세상이 골리앗처럼 우리 앞에 서있을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으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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