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빈곤에서 탈피하라 (계3:14-19)
본문
영적인 빈곤에서 탈피하라! (요한계시록 3:14~19)
“성령 충만 하십시오! 신앙의 길을 잘 달리시길 바랍니다. 결코 물러서지 말고, 이 번 한 주간도 하늘의 큰 면류관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면서,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 모두의 심령 속에 영접하기를 원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간에도 무더위를 무릎 쓰고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과 세상일에 바쁘게 쫒기며 살다가 다시금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前 주에도 저는 먼 곳이라고 치면, 먼 곳인 경남 함안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정말 숨이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성령께서 임하셔서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는 가운데 바쁜 한 주간을 보냈음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믿음의 성도들도 이러한 바쁜 삶의 연속 속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령들이 강퍅해지며 마음들이 굳어져 감을 볼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교회 분들이야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 계신다면, 스스로가 깨달으시고 이 시간을 통하여 마음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굳어진 심령들이 녹아내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만약에 굳어 있거나 닫혀 있는 마음들이 계신다면, 주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들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진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영접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도 그러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신 성도들을 기뻐하시며. 끝까지 책임져 주시면서 눈동자 같이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우리들 주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대로 문 밖에 세워 두고 있는 형식적인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제가 보기에도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육신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문명의 편리함 속에 풍요하고 편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각종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편리하게 해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지금의 삶이 바로 천국이 아닌가? 하고 착각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생각과 행동들은 분명히 잘못된 착각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육신의 세상은 과학문명이 풍요한 사회를 이뤄놓았지만, 이러한 문명 뒤에는 엄청난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뭄과 홍수, 그리고 굶주림은 물론이요, 각종 질병들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물질문명은 우리 육신들을 편리하게 해 주었지만, 반면에 현대인들은 영적으로 더욱더 무지해져만 가고 있고,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신앙생활들이 점점 더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믿음의 성도들조차도 이 육신의 삶 속에서 풍요한 생활에 젖어 즐기며 살다 보니, 그동안 간직했던 믿음들은 간곳이 없고, 한 발은 교회에 또 한 발은 이 육신의 세상에 올려놓고 적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약 20여 년 전에 소설가이며, 칼럼니스트였던 이만재씨가 비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다가 40대 후반, 늦깎이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자신의 100일 간의 일상생활의 삶을 담고 있는 ‘막 쪄낸 찐빵’이라는 책을 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 책은 기독교계의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부상을 하여 많은 크리스천들이 읽었으며, 그 책의 영향력으로 한때는 ‘찐빵 신드롬(Syndrome)’을 일으키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책의 저자인 이만재씨는 가수출신인 윤형주 장로님에 의해 기독교에 입문을 한 후,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삶인 체험담을 일기 형식으로 저술하였는데, 그 중 한 대목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구기터널 옆 계곡에서 또 보신탕에 소주 한 잔. 참 이상한 일이다. 하필 교회 가기 전 날인 토요일이면 술 먹을 일이 발생한다. 아무래도 나는 평생 시험받으며 살 팔자인 모양인가 보다. 술도 좋고, 찬송도 좋으니 이걸 어쩌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자인 이만재씨의 개인 신앙에 대해서 우리들이 평가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오늘날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신앙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의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랄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라오디게아 도시는 로마시대의 상업과 경제의 도시로 물질이 풍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골로세 사람이었던 에바브라디도에 의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풍부한 도시에 세워진 이 교회는 부요한 교회요, 자기만족과 무사 안일에 빠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목적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 하나 잘하는 것이 없었으며, 다만 육신이 누리는 부요만을 자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육적으로는 부요할 줄 모르나, 영적으로는 가난하고 빈털터리처럼 주님 앞에 그 무엇 하나라도 내어 놓을 것이 없는 빈곤한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빈곤상태는 역겨울 만큼 미지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했으면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모습을 보시고 “토하여 내치리라!”고 엄히 꾸짖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바탕으로 금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벧엘 교회와 성도들은 물론 집회를 다니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올바른 영의 양식을 먹여야 하는 책임자로서 매우 두려운 마음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저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한 믿음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 만약에 토하여 내치신다면, 그동안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들이 다 수포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육신의 삶속에서 더 이상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다만 지옥의 막장에서 이를 후회하며 울면서 이빨을 갈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우리 주님께서는 단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성경을 통하여 “너희들이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는 권면의 말씀을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5절에서 말씀하신 “차든지 더웁든지란? 무슨 뜻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 말씀의 뜻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에 있어서 영적인 신앙생활이 분명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음료수나 차(茶)도 미지근한 것보다는 차가우려면 아예 차갑든지, 뜨거우려면 아예 뜨겁든지 해야 제 맛이 나듯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는 신앙인들의 모습이라면,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안타깝게도 우리들 주변에는 이런 어중간한 믿음인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형식적인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모습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름만 목회자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지 말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믿음으로 사는 이면적인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표면적인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들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의 외식적이고 표면적인 신앙생활을 아주 신랄하게 책망을 하셨던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하지만 여러분! 이와는 반대로 더웁다고 하는 것은 열심 있는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을 말합니다. 때문에 교회에는 열정적으로 뜨겁게 활동적이고 열심 있는 성도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고 각종 예배와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주님의 일에 온전한 말씀을 바탕으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봉사는 성도들이 교회에는 많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벧엘 교회 성도님들처럼 어렵고 힘든 이웃사람들을 보면, 도와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여 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여러분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남들을 도와주는 그러한 여러분들을 온전한 믿음을 가진 뜨거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은 어디를 가더라도 여러분들의 그 뜨거운 참된 믿음을 자랑할 수가 있었으며, 또한 여러분들이 그러한 믿음으로 함께해 주셨기에 서로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협력함으로서 여러 가지 복지사업을 할 수가 있었음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에 오늘날 수많은 교회 안에는 아주 영, 육간에 지성적이면서 차가운 분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차갑다는 말은 정적(情的)인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그다지 활동적이지는 않으나, 만약에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면,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냉정한 분별력으로 교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그런 역할들을 잘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시원하게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뜨겁든지 차갑든지 두 가지 유형의 달란트를 가진 성도들이 다 있어야 교회가 성장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듯 미지근한 성도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성도들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질책을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미지근한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주님의 나라 확장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조그마한 일도 감당치 못하고 시험에 들어 곧장 넘어지고 맙니다.
, 또한, 자신들의 삶속에서 고난과 시련이 닥치면 이를 감내하지 못하고 언제라도 주님을 떠나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에 또 예수를 믿다가 손해만 오는 것 같고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돌아서서 또 떠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도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도 목사지만 안타깝게도 목사들도 그런 분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경고를 귀담아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이 교회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너무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3장 17절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아멘!
이와 같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당시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세상적인 물질의 풍요함만을 누리면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랑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영적상태를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시 본문 15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으며, 그들의 문제점들과 그들의 잘못된 부분들, 그리고 그들의 불신앙적인 모습들을 다 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본문 19절 하반부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나쁜 점들만 보시고 지적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장점들과 칭찬할 만 한 것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중에도 수고한 것들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자기 자신의 생각과 방법 때문에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행히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기회를 주심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다시금 충성할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은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촉구를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잃었던 신앙’과 ‘나태한 신앙’ 그리고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을 버리고 일어서라!’고 권면의 말씀을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그동안 세상에 속하여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온전한 믿음으로 다시금 회복하여 일어설 때, 주님과 함께 하는 ‘축복된 만찬의 자리’에 참예케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먼저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나를 향하신 살아계시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육신의 세상에 현혹되어 살아가면서 잠시 동안이라도 주님을 순간순간 잊어가면서 그동안 저와 여러분들의 게으르고 나태했던 신앙생활을 주님의 말씀대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인 3장 18절의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의 핵심인 세 가지 방법으로 나뉘어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새겨서 한결같이 변치 않는 온전한 믿음으로 이 육신의 삶을 저버리고 영적인 삶만을 소망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18절)
성경에서 말하는 불로 연단한 금이란? 언제나 변함이 없는 든든한 믿음을 나타내 줍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이 벌고, 그 물질들로 인하여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은 돈이나 물질이 많은 자들이 아니라, 믿음이 부요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에서 보지 못하였노라!”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애처롭게도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자신들이 지닌 물질의 부요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이만하면 이 육신의 세상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보실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적인 모습들은 가난하고 곤고하고 벌거벗은 형편없는 모습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이 육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재물만을 의지하고서는 결코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육신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물이 어느 정도는 유익을 줄 수는 있어도 재물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육신의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주님을 잃어버린다면, 인생전체의 삶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하지만 여러분! 여기서 “사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의 영생을 아무런 값도 없이 거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사모하고 애쓰며, 수고하는 희생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저 시간이 되는 데로 가면 가고, 오면 오고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결코 발전하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에 멈춘 앉은뱅이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오늘날 왜 우리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뜨겁거나 차지도 않으며, 그것도 모자라 전쟁에서 진 패잔병들처럼 나약하고 무기력해 졌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한 심령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희생과 수고, 그리고 헌신하는 봉사가 따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10달을 채우지 못하고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난 미숙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기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물질의 부요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았을 뿐, 이웃과 타인을 위해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하고 빈곤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금은 불에 들어갈수록 정금이 됩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도 때로는 시련을 통과하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놓고 몸부림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자라고 성숙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보다 더 견고하게 굳어지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함이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부요한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금은 수많은 세월이 가도 결코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뜨거운 용광로 속에 있을지라도 불 가운데서도 결코 타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도 정금 같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 어떠한 조건과 환경가운데서도 결코 변치 않는 한결같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운 것은 너무도 쉽게 조건과 환경에 치우쳐 이를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지 못하고 변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만이라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변치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지전능 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 분이심을 바로 알고 이를 지켜 행하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십니다. (18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가 좋은 옷을 입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허영심이 지나쳐서 오래전에 있었던 부유층과 권력층이 연관된 옷 로비사건처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사건으로 인하여 강남에 있는 유명교회의 권사들이 개입이 되는 바람에 예수를 믿는 성도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다보니 그때 사건이 뚜렷이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허영의 옷을 입지 말고, 영의 신령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흰옷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서 말씀하신 흰옷이란? 의(義)의 옷이요, 성결(聖潔)의 옷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흰옷은 하늘나라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입고 갈 정결한 예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라고 치부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육신의 수치는 가릴 줄 알면서도 영적 수치는 가릴 줄 모릅니다. 또한, 주님께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온통 어지럽히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또한, 입술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고 태연하게 가식적인 믿음의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 성도들은 그런 분들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자들은 온 몸의 감각이 무디어져서 자기 몸이 썩어져 가고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도 아무런 통증도 못 느낍니다.
이처럼 영적 감각이 무딘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성도들은 수많은 시련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줄도 모르고,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끝내는 영, 육간에 실패를 당하거나 넘어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주님께서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저와 여러분 모두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노크 소리를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흰옷은 바로 의의 옷으로서 곧 의로우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는 예수로만 옷을 입어야 합니다. 때문에 예수로 옷을 입은 성도들은 구별된 자들이요! 거룩한 자들이요! 성결한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거룩하고 성결하며, 깨끗한 삶을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 그리고 능력만으로는 이를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때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하고, 또한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여야 가능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흰옷을 입은 자들임으로 그 흰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날마다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 여러 가지 죄악들을 회개하며 육체의 정욕을 피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믿습니다.
그리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흰옷을 덧입은 성도들만이 모든 삶에 있어서 주님과 영원히 동행할 수 있음을 믿으시고 이를 행할 수 있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셋째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18절)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저와 여러분들에게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온전한 믿음을 떠나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졌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물질과 정욕, 그리고 명예와, 이기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 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두워진 눈에는 이 육신의 세상에서 썩어 없어질 것들만 보게 됨으로서 그것만이 최고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무가치하게 보여 지고,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하늘의 모든 신령한 것들이 얼마나 귀하게 보여 지는지 모릅니다.
한때 제가 그런 체험을 직접해본 당사자이기에 더욱더 실감이 납니다. 몇 년 전에 작정기도를 하면서 산속 기도 굴에서 금식을 하던 중에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찮은 돌맹이부터 숲속의 나무와 풀들, 그리고 각종 산새들까지 하나님의 오묘하신 창조의 신비를 느낄 때, 그 당시 저 자신이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며 꼭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여러분들도 영생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천국의 기업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지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의 사명을 확신하고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깨닫는 영적인 눈이 열려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벧엘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서 승리하는 미래를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하는 영적인 눈이 열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육신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잠시잠깐 보이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들뿐입니다. 즉, 영원한 것들은 이 육신의 땅위에는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이 세상의 번영과 호화로움에 결코 눈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가롯 유다가 사단의 술수에 넘어갔으며,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탐심을 부리다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은 ‘풍요한 사회’속에서 물들어가는 우리 모두의 가련한 영혼들의 실상을 밝히 깨닫고 영혼의 부요함을 다시금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영혼의 부요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영적인 가난으로 헛된 시간을 보내다가 만약에 어느 순간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으로부터 토하여 내침을 받고야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영적 무지와 가난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를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의 미지근하고 나태한 신앙을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을 향해 그동안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축복의 약속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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