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 (왕하20:1-6)
본문
주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 왕하20:1-6, 막11:20-25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을 것 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성경에는 종종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야곱의 얍복강에서의 기도, 사자 굴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드린 다니엘의 감사의 기도,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모세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 일천 번제 후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기도, 귀신들린 딸을 위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의 기도 역시 그 중의 하나입니다. 히스기야왕은 믿음이 좋은 왕으로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 말기에 남쪽 유다 왕이었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에 앗수르의 18만 대군이 유다를 치려고 왔을 때 나라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서 앗수르의 산헤립이 보낸 협박편지를 펴놓고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라를 건진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왕하19:14~19).
그런데 이번에는 히스기야 자신이 중병에 걸리게 되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낮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켜 그의 병을 고쳐 주시고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 주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 때 다음 날 아침 지나가다 보니 뿌리째 말라버린 나무를 보고 베드로가 놀라 그 사실을 말할 때 주님은 23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놓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뻥쟁이라고 합니다. 전혀 실현성이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의 격언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때 산이 옮겨진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해결하는 사람을 가리켜 ‘산을 옮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믿음의 기도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하는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1.의심치 않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라가 위기를 만났을 때에도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모든 사정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밖에는 우리를 구할 자가 없음을 아뢰고 하나님만 의뢰하고 도움을 구한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중병으로 죽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낙심하고 절망에 빠지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눈물의 간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연의 섭리까지 거슬려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기적을 보이 시면서까지 마음을 바꾸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신약 본문 23절에서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적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의심하면 좋은 관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부부생활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에서도,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도, 거래처 간에 등 모든 관계에서 의심 하면 분열이 일어나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러나 믿고 신뢰할 때 평안이 있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약1:17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했습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아트 부크월드’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보다, 권력보다, 돈보다 더 좋은 것은 예수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은 제일 좋고, 제일 귀하고, 제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불수 없다고 해서 의심하면 안 됩니다. 의심하면 기도응답도 없고 믿음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한 것을 그대로 믿으면 응답되지만, 그냥 적당히 기도하면 응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바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기대합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을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기적의 발판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시행하는 일은 그 일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십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선교 헌금을 하는데 5살 어린이가 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기로 하여 일 달러를 헌금하였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어린아이의 뜻과 믿음을 중시 여겨서 성경을 보내는 중에 신약성경 한권을 더 샀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 어린이의 이름을 써서 인도에 함께 보냈습니다. 모두들 그 일을 잊고 있었습니다.
20년 후에 목사님이 인도에 들려 어느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 복음이 전해진 경위를 듣게 되었습니다. 20년 전에 선교사가 전해 주고 간 얇은 성경 한권이 믿음의 불씨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기념으로 간직한 그 성경에는 어린아이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도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만약에 어린이의 정성을 무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거창한 방법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작은 정성의 시작으로도 이루어집니다. 순수한 믿음에서 오는 작은 정성, 작은 헌신, 내가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매 달 헌신하는 작은 액수의 사랑의 헌신이 큰 불을 일으키는 불소시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의심치 않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2.간절한 기도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입니다.
히스기야왕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2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면벽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방법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겠다는 의사표시였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부와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많이 들여서 명약을 구해 볼 수도 있었고, 용하다는 유명한 의사를 동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 없는 왕이었다면 사울 왕처럼 무당을 찾아 갈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사화복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형선고를 내리셨는데, 약이 무슨 소용이 있고, 의사나 무당이 무슨 수로 나를 죽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자신의 죽고 사는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신앙의 사람과 불신앙의 사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습니다. 그는 눈물로 더욱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2절 하반 절에 “그가 심히 통곡하더라.”고 했습니다. 왕이 통곡하는 것은 체면이 손상되는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왕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요,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자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마땅한 자임을 알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처량하고, 비굴하고, 초라하고, 청승맞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울음은 그 눈물을 귀하게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이 됩니다.
신약 본문에서 주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보고 놀란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주님은 대답으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들이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 안에 사는 사람이고, 주님을 영접하고 사는 사람이며,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요,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까지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너는 나의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영국의 런던에 가면 웨스트민스터 채플이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캠벨 몰겐 목사님이 시무할 때 이 분은 날마다 살아가는 커다란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매일 오후 저녁 무렵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 런던의 하이드 파크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날 갑자기 딸이 아버지하고 공원 산책을 며칠간 못하겠다고 얘길 하면서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합니다. 얼마나 이 아버지가 서운했겠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몰겐 목사님은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아버지에게 드릴 성탄 선물로 아버지가 신으실 슬리퍼를 만드느라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탄절 날 아침 이 선물을 받으면서 몰겐 목사님은 사랑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무 고맙다.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니?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아비는 슬리퍼 선물보다도 네가 나와 더불어 같이 손잡고 산책하는 것이 이 아빠는 훨씬 더 좋단다." 우리 주님도 아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시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간구한 응답도 중요 하고,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주님은 ‘그런 것 다 좋지만 나와 좀 같이 있지 않을래? 나와 같이 대화 좀 하지 않을래? 나와 같이 교제 좀 하지 않을래?’ 하실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깊은 기도와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진실한 신앙의 삶이 뒷받침 되는 기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의 신앙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믿는 다고 말하며 행실은 믿음에서 떠나 죄의 길에 선 이중적인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히스기야왕이 대부분의 다른 왕들처럼 바알을 섬기고 타락되어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다면 아무리 통곡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하나님의 마음은 요동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은 다른 왕들과 달랐습니다. 분열왕국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암흑기 시대였습니다. 일어나는 왕들마다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과 함께 섬기는 영적 간음을 행하고, 온 나라에 우상을 들여와 타락시키는 일들을 도맡아 했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왕이 되는 즉시로 종교개혁을 일으켜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철폐 하였습니다. 여러 산당들을 제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놋 뱀을 부수고,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통치하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기도할 때 이런 자신의 모습이 진실한 것이었기에 자신이 행한 일들을 돌아보시고 기도에 응답 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진실한 신앙의 삶이 뒷받침 되는 기도는 힘이 있고, 그 기도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귀한 요소가 됨을 알아야겠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평소 우리의 바른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위급할 때 담대히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바른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기도할 것을 말씀 하시면서 본문 막11:25에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 대한 불평, 불만, 불화, 다툼, 미움 등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한 기도는 상달도 안 되고 응답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기도응답을 받고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데 반드시 제출해야할 필수 구비서류와도 같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용서도 안 되고 응답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허물, 잘못, 약점을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과 죄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등 뒤로 던지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 듯 던져버리시고, 빽빽한 구름이 사라지듯 사라지게 하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기시리라, 기억도 아니 하시고 흰 눈보다, 양털 보다 더 희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일, 지난 과거사건은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또한 용서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 만한 가치도, 조건도 , 이유도 없이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달리신 그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하면 용서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용서해야 응답받고, 용서받고, 사랑을 받고, 마음에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용서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뭄이 들어서 물이 몹시 귀한 때에 농촌에서는 물싸움을 할 때였습니다. 한 성도가 밤새도록 수고해서 논에 물을 대어놓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 잤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았더니 이웃 논임자가 논둑을 터서 물을 다 자기 논으로 빼앗아갔습니다. 당장 달려가서 그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싸우고 싶었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꾹 참고 다시 밤을 새워서 논에다 물을 대고 들어와 잤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았더니 그 이웃 논임자가 또 논둑을 터서 물을 훔쳐갔습니다. 그 사람은 몹시 화가 나서 당장 달려가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꾹 참고 목사님에게 달려가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지 말고 어느 것이 서로 사는 길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이번에는 물을 한 번 더 빼앗긴 셈 치고 그 사람의 논에 물을 대어주고 당신 논에 물을 대십시오.”
그 성도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 원수 같은 사람의 논에 몰을 대주고 자기 논에 물을 대어놓고 집에 와 잤습니다. 그랬더니 아침 일찍이 그 고약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찾아와서 “예수님 믿으면 그렇게 착한 사람이 됩니까? 나는 당신이 달려와서 싸우자고 할 줄 알았는데 제 논에 물을 대주다니요. 저도 예수님 믿고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한 사람의 사랑으로 용서한 선행이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히스기야왕처럼, 신약 본문의 말씀처럼 용서하는 진실한 신앙의 삶이 뒷받침 되는 기도를 드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의심치 않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입니다.
◐.진실한 신앙의 삶이 뒷받침 되는 기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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