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활용법1 : 고난 위로 걷기 (고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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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활용법1 : 고난 위로 걷기 (고후1:3-5)
고린도 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첫 번째 편지는 고린도 전서이다). 고린도는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 이 시간에 그 문제들을 다 꺼내놓으려면 차라리 고린도전서를 설교 하는게 더 나을 정도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말썽이 많았다.
그 중에서 고린도 후서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큰 문제 하나만 밝히자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불신이었다. 쉽게 말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그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하면 그 다음은 더 이상 진전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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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나를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설교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설교를 잘하든 못하든 그래도 여러분이 일단 들어 주기라도 하는 것은 내가 ‘목사’라는 그 사실 만큼은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려면 일단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부터 해소해야만 한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첫머리에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후1:1)”고 선언 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전체를 통해서 그간의 오해와 편견들을 하나씩 해명해 나간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할 수 있는 많고 많은 얘기 중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당했던 일을 가장 먼저 꺼냈다.
고후1:3-11을 대충 훑어 봐도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고난’, 그리고 ‘위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사도성을 해명하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왜 고난과 위로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을까? 뒤집어서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바울이 당한 ‘고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다.
고린도는 상업 도시로, 무역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한마디로 제법 잘 사는 동네였다. 물론 잘 사는 동네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에나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공존하는 법이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성도들 중에는 부유한 사람도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빈부격차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고전11:17-34).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념(가치관)이 있었다.
그게 뭐냐, 이왕이면 ‘가난한 것보다는 부유한 것이 더 낫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것 보다는 아무래도 만사가 다 형통한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이 중에서 실패해도 아무 상관없다거나, 실패하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라. 우리는 다 실패와 어려움을 싫어한다. 성공과 형통을 좋아한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곳 마다 어려움을 겪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에도, 복음을 전하는 중에도, 심지어는 전하고 나서도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심각한 고질병도 안고 있었다. 바울이 얼마나 큰 고난을 당했는지, 고린도 후서에 기록된 것만 한번 보도록 하자.
(고후 1:8-9, 쉬운성경)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 지방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해, 삶의 소망조차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고후 11: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렇게나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야말로 고생고생, 생고생을 다 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바울이 당한 고난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중대한 신학적인 문제를 야기시켰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예수님께서 세우신 진정한 사도라면 그렇게 심각한 고난을 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어떤 접근 방식(사고방식)이냐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너는 일 년 내내 한 번도 안 빠지고 꼬박꼬박 교회 나가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헌금도 그렇게 열심히 내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 “너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가 안 되니?”라고 묻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사실 교회 다니고 헌금내고, 기도해서 이루어진게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예 시치미 뚝 떼고 “사실 나 교회 그렇게까지 열심히는 안다녀, 기도도 그렇게 열심히 안 해” 이렇게 대답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고후 1:3-5)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다른 것은 다 생략하고 첫마디만 보도록 하자.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가?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 이것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고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배척까지 당했다. 이 얼마나 억장 무너지는 일인가?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해명의 편지를 쓰는데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고백을 가장 먼저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숨기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별일 아닌 척 하지도 않았고, 속상하고 억울하다고 토로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고난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고난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깨달은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전에 먼저 성경이 말하는 고난의 종류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성경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크게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으로서 당하는 고난. 잘났든 못났든, 인간이라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간단한 예로, 건강관리를 아무리 잘해도 누구나 한번쯤은 다 감기에 걸린다.
둘째, 자초한 고난. 말 그대로 자기가 원인을 제공해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가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다면 이건 인간으로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자초한 고난이다.
셋째, 거룩한 고난. 이것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바람에 당하게 되는 고난을 가리킨다. 역설적이게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다보면 오히려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이 당한 고난이 바로 이 세 번째 고난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고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의 사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접근 방식이 완전히 잘못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바울이 깨달은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이 발견한 고난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나의 고난은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는데 유익한 도구가 된다.
둘째, 성도는 고난 속에서 믿음이 굳게 자란다.
“바울이 발견한 고난의 두 가지 의미” 중에서 오늘은 첫 번째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바울은 그렇게 극심한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난의 하나님이 아니라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누구누구야, 힘을 내거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렇게 위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비슷한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을 이겨낸 사람을 통해서 위로를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동병상련을 통해 위로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방법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얘기가 바로 이 뜻이다.
(고후 1:4, 쉬운성경) 하나님은 우리가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할 때 위로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여러 환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가 겪은 고난과 비슷한 고난을 겪은 사람이나, 혹은 자기 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한 사람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큰 위로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난(그것도 세 번째 의미에서의 고난)을 당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고난 중에 위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역할-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이고, 고난 중에 위로를 받는 이유 역시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고후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자,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불행인가? 비극인가? 아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는 길이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위로자가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관점에서 접근한다.
아무리 그래도 고난이 없는게 낫지, 고난이 있어서 좋을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고난을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지,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생각조차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정 반대다. 고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선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도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고난이 있는게 아니라, 고난이 없는 것이다. 고난이 없으면 위로자로 쓰임 받기 힘들다. 고난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위로 받을 일도 없고, 받은게 없으니 당연히 전할 것도 없다. 기독교는 나의 꿈과 목표를 이루고 안락한 삶을 약속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 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게 뭘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어디로 가셨는지, 어떻게 되셨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그러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그렇다. 죽음의 길이다. 고난의 길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8)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표현만 다를 뿐 결국 똑같은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고난을 피하고 형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일부러라도 고난을 받아야 된다”, “고난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당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간으로서 자연 발생적으로 겪게 되는 고난이든, 내가 자초한 고난이든,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이든, 그 어떤 고난이든 간에, 그것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욱 이끄는데 쓰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고난 위로 걷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우리는 고난 위를 기꺼이, 그리고 의연하게 걸어가는 사람이다.
둘째, 우리는 고난 가운데 위로를 거둬들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둔 그 위로를 다시 뿌리는 사람이다.
말씀을 맺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하는 분이시다.
(사 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그런데 바울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고난 가운데 위로를 베푸시는 이유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귀한 도구로 삼으시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러분은 어떤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가? 어떤 자세로 고난을 대하고 있고, 어떤 마음으로 고난을 견뎌내고 있는가?
혹시 고난 중에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기 바란다. 그리고 그 힘으로 고난을 이겨내기 바란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쓰임받기 원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우리는 고난 위로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난 위로 걷는 여러분들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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