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고후10:1-18)
본문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고후 10:1-18
1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들 합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대할 때에 강경하게 대해야 할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정을 따라서 처신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대하려고 생각합니다.
3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4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6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7 ○여러분은 겉모양만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면,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8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내가 좀 지나치게 자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이므로,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9 나는 편지로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10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로 쓰는 말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13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15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16 우리는 여러분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요,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17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18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도입: 비방당했을 때
여러분, 누군가에게 비방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을 향해 악한 의도를 담아서 말입니다. 저는 있습니다. 그것도 아끼던 이에게 말입니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배신감과 분노가 저를 사로잡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어떻게 그 비방을 풀어낼까를 심각하게 고민했었습니다. 그러다가도 악의에 대해 갚아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었습니다. 그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해서 마음과 생각이 정말 힘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누군가로부터 악의가 담긴 비방을 경험한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비방에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본문읽기 1) 비방당한 사도 바울
오늘 말씀의 사도바울도 이런 악의가 가득 담긴 비방에 맞서야 했던 것 같습니다. 비방을 한 자들은 아마도 11:5절에 나와 있는 “거물급 사도”라 스스로를 지칭한 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나 자신들을 자랑했습니다. 오죽하면 스스로를 “거물급 사도”라고 칭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랑에 힘을 더하고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차지하기 위해 교회의 창시자인 바울을 비방한 것입니다. 그 비방의 내용은 “1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는 강경하다”, “10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이런 내용들이었습니다. 교회 전승 중, 바울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 중에 그가 키도 작고 대머리에 눈에 질병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이 이런 그의 외모와 관련해서 인신공격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가 여기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7절에 “7 여러분은 겉모양만 봅니다.”라는 말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의 앞선 편지를 통한 쓴소리에 가뜩이나 마음이 상한 이들이 있던 모양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거물급 사도’라 칭하는 자들이 와서 바울에 대해 안 좋은 소리들을 늘어놓으니 이때다 싶어 그들의 말에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2 육정을 따라서 처신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대하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자신을 비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비방이 교회를 세운 바울을 공격하여 고린도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영적 공격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합니다.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8 ...그 권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이므로...
여러분 바울이라면 어떻게 변호하겠습니까? 만약 저라면 우선 그들에 대해서 조사하고, 그들의 약점을 찾아 잘못됨을 조목조목 따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말이죠. 그리고 제가 이 고린도교회를 세운 사람임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이게 보통의 변호 방법이죠.
본문읽기 2) 바울의 변호 방법 - 복음
그런데 바울의 변호 방법이 보통과는 다릅니다. 12절입니다.
12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자칭 “거물급 사도”과 다르게 자신들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싸움에 임합니다. 그 싸움의 방법이 3-5절 입니다.
3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4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육신의 방법이 아니라 다른 무기를 쓴다고 합니다. 이 무기는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무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무기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폴 워셔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여기에 늦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주최하시는 분들이 화가 나서 왜 늦었냐고 물어볼 겁니다. 그럼 제가 말하겠죠. 근데 꼭 용서해주셔야 해요. 제가 고속도로를 타고 운전하는데 타이어가 펑크 나서 타이어를 바꾸려고 내렸어요. 타이어를 바꾸고 있는데 그 나사가 떨어진 거예요. 잠깐 산만해지면서 전 이제 제가 고속도로에 있었던 것도 잊어버리고서는 나사를 주우러 도로로 나가서 나사를 주웠는데 나사를 줍고 제가 일어났더니 한 200킬로로 달리는 30톤짜리 트럭이 한 10미터 앞에 있는 거예요. 그 트럭이 저를 밟고 지나가서 제가 좀 늦었습니다. 이제 딱 두 가지 논리적인 결론이 있을 수가 있죠. 하나는 제가 거짓말쟁이거나, 둘째는 제가 미쳤거나 한 거죠. 여러분 말이 되나요? 30톤짜리 트럭처럼 큰 것에 부딪히고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럼 제가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뭐가 더 큽니까? 트럭이 큽니까, 하나님이 큽니까? 어떻게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딪혔다고 고백하면서도 온전히 변화하지 않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정말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 복음을 맞닥뜨리고 멀쩡할 수가 없습니다. 멀쩡하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자칭 “거물급 사도”들과 싸우려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대적자들과 싸우려는 이유가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이 세상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가 그 복음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복음에 완전하게 그의 견고한 요새와 그가 가지고 있던 교만이 철저하게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읽기 3) 복음의 영향 -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궁극적으로 말합니다. 17절입니다.
17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원래 자랑할 것이 많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즘 말로 소위 ‘금수저’였습니다. 유대인인데도 로마 시민권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당시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에게 배웠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자랑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이 깨달아지고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그의 모든 견고한 요새가 무너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그에게 있는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 3:7-8에서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후에도 사도로서 얼마나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까? 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더군다나 고린도교회는 바울 자신이 세운 교회입니다. ‘내가 세웠는데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충분히 이럴만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13절에 “13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그가 하는 모든 사역조차도 “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철저히 복음에 무너뜨림을 당한, 철저히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향한 악한 비방 앞에서도 자신을 변호하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 – 나를 자랑하는 우리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아가 충만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과 맞물려 온라인 1인 미디어가 급증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온라인상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 충만의 시대 상황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 안에서 소위 시험 들었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왜 시험에 들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서운함, 섭섭함입니다. 무엇에 대한 섭섭함일까요? ‘나’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고,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목사님은 ‘나’보다 아무개 권사를 더 예뻐하고, ‘나’를 왜 이런 취급을 해? 등등. ‘나’를 건드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건드리는 정도를 넘어 오늘 말씀의 바울처럼 비방을 당하면 어떻게 해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들을 동원합니다. 그걸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서 공격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보다는 얌전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정도면 괜찮아.’라는 착각이죠.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나 정도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야.’ 이런 착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여러분이 나쁘고 형편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잊고 사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엡 2: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서 철저하게 죄 된 자아가 무너진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나를 자랑하겠습니까?
자랑은 죄입니다.
혹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까지 자아가 해결되지 않고 나를 자랑하며 산다면 점검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전히 내가 가진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이생의 자랑은 사라졌는데, 내 신앙의 경력과 직분과 사역 등을 이생의 자랑과 별반 다르지 않게 자랑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점검해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가?’ 왜냐하면, 나를 자랑하는 것이 곧 영적인 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만 봐도 그렇습니다. 뱀이 그들을 어떻게 유혹합니까?
창 3: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게 된 아담과 하와 안에는 ‘나’의 눈이 밝아져서,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내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도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창 11: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한 일이 바로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보십시오.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높아지고자 하고, 자신들을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시도를 언어를 흩으심으로 무산시키셨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두 가지 말씀만 봐도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이미 일어난 사건임에도,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처럼 ‘나’를 주장하는 육신의 연약함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목사의 영적인 상태가 위험하다는 신호가 있다고. 목사가 우스갯소리로라도 자주 ‘내가 뭘 했어요.’ 이런 말을 하고 있다면, 그 목사의 영적 상태가 위험하다는 신호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거 제가 만든 거예요. 너무 잘 만들었죠?’‘제가 이런 걸 참 잘 합니다.’ 이런 말들 말입니다. 선배 목사님의 말이 제게 정말 동의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영적으로 다운되어 있을 때, 종종 그런 유혹에 빠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앞에 무너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8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곧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마치 멸망할 자들이 보듯 어리석고 가장 큰 절망의 상태로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어리석고 극한의 절망과 같은 십자가로 우리 인간의 모든 교만과 죄를 부서뜨리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나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철저하게 무너져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복음 앞에서 여러분의 전적인 무능력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은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에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무기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복음에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면 우리는 누군가 나를 비방하고, 나에 대해 건드린다고 내가 가진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시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그 한계 안에서, 허락하신 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자랑도 철저하게 주님 안에서 자랑하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코로나19가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또 유기성 담임목사님께서 이 어려운 때에 이제 교회 다니는 것으로만 만족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교회만 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가? 오늘 말씀의 표현으로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입니까?
복음 앞에서 무너짐이 은혜입니다.
목사 부부수련회 때 한 사모님께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지금 저의 마음은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충만해서가 아니라, 너무 밑바닥까지 저 자신을 보게 하셔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고 있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게 하시는데, 너무 수치스럽고 비참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기 영광, 자기 자랑, 자기 사랑, 자기 기쁨, 자기만족, 선한목자교회에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10년째 듣고 배우고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제가 너무 복음적이지 않은 거예요.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공동체 사모님들에게도, 그 사실이 드러나서 정말 너무 괴롭고, 저의 믿음이 흔들릴 정도로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십자가의 예수님이 바라봐지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너무 영광스럽게 저에게 다가왔고, ‘너는 나의 교회라. 너는 나의 영광이라.’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참 많이 울면서 예수님 위해 살겠다라는 마음의 간절함이 다시금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러 작고 많은 갈등 가운데 놓여 있고, 또 소소한 많은 선택들이 제 앞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가는 과정이 저는 너무 참 치열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기준 삼아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부흥의 때를 겪고 있고,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 깨달아지고 비참해지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주일 설교 원고를 써야 하는데, 말씀이 써지질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해왔는데, 못 쓰겠는 겁니다. 너무 자괴감과 분노와 복잡한 감정들이 심해서 결국에 설교를 못 쓰고 성전기도를 나왔습니다. 사실, 너무 소리 질러 기도하고 싶었는데 다른 분들의 기도를 방해할 수 없어서 그저 눈 감고 주님을 불렀습니다. 기도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시간을 그렇게 예배당 한구석에 눈을 감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시간을 통해 주님께서 제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격 없지만, 그래서 정말 사소한 것 하나도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깨닫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정말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심이 감사했습니다. 그날 제 예수동행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어제 밤부터 쉽지 않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암흑과 같았고, 분노와 자괴감 등의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여전히 저는 자격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설 때 정말 나 자신의 나약함과 죄인 됨으로 좌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나의 견고한 요새와 같은 자아가 철저하게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내 자신이 비참하게 무너지는지요. 정말 주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정말 주님이셔야 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너진 상태가 오히려 하나님의 부흥의 시작입니다. 내가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이 절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절망이 주님만 드러나는 소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런 경험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소망 있는 자입니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실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없다면, 여전히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여겨지고, 나를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면, 오늘 말씀 듣는 여러분 가운데 복음 앞에서 견고한 요새가 철저하게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는 그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맺는말: 복음 앞에서 무너진 자만이 주님 안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철저히 무너진 자만이 주님 안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마지막 말씀처럼 “18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