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삼하6:6-10)

본문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사무엘 하 6:6~10


 


다윗은 모든 일을 행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서야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삽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기란 정말로 힘이 듭니다.


설령 이룬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 또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용함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재물이나 명예를 누리면서 살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때문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공도 실패도 모두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의 지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성공 한다는 것, 이 불변의 진리를 알고 행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별하여 행하고 그 분의 의중을 어떻게 해서 알고 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성경을 통해서, 또는 주의 종의 말씀 가운데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딪치는 것들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떠한 감동에 의해서 확실하게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을 하시고 우뢰와 천둥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열리지 않고 뜨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만 한다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실패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재물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나라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제물을 바라보는 눈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얼마를 버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재물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쓰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며 나에게 주어진 여건 가운데서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헌신 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를 드렸느냐 보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함으로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헌 했느냐가 중요하듯이 말입니다.


 


1.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목적이 선하면 결과도 선하게 나타납니다.


목적과 결과가 선하다 하더라도 과정이 불순하면 안 됩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는 선한 과정과 선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든지 그 일에 연루된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설령 돌아서 갈지라도 우리는 악한 방법으로 선을 이루려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방법은 쉽고 빠르고 풍성한 것만을 추구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며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일만을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예 : 소돔왕 - 재물은 가지고 사람만 보내라 - 소돔왕으로 인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자신의 힘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 오직 하나님에 의해, 그의 영광)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방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아무리 정성껏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것은 무가치합니다.


차라리 남루하고 낡아 빠진 천막에서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 정성껏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시된 성경을 통해서 다 말씀하셨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각 사람의 중심에 있는 양심을 통해서나 주의 종을 통해서, 또 각가지 방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에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아침에 드리는 예배, 한 낮에 드리는 예배, 저녁에 드리는 예배, 모두 중요 하지만 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냐가 중요하고, 어떤 마음으로 드려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그리고 시시 때때로 드려지는 헌신과 감사와 모든 찬양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의 연속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삶 속에서의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공적인 예배만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여 진정으로 매일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드려지는 예배를 잊고 살고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닌 내 중심의 삶으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나의 방식대로 행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해 놓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쁜 일이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나의 방식을 하나님께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니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어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고 싶어 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하나님의 처소를 아무 곳에나 방치해 두지 않아야 한다는 좋은 생각에서 이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다윗은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생각과 같이 그 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고 기뻐하며 만족해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원칙이 어떤 것인지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에 옳은 대로 백성들의 수고를 줄여 주기 위해 편리한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궤를 수송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다윗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수고와 정성이 들어있는 헌신의 마음을 원하셨기 때문에 특히 구별된 사람들에 의해서 정성껏 옮겨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들이 힘을 들이지 않고 빨리 운송해서 빨리 하나님의 궤를 자신이 있는 처소로 모셔오고 싶은 마음과 백성들이 힘들고 번거롭지 않게 해 주려는 백성을 위한 마음에서 이렇듯 편리한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선한 마음을 품고 행했던 다윗의 마음과는 다르게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법궤를 운송하던 중에 수레를 끌던 소가 날 뛰게 됨으로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손으로 잡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시는 것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키 위한 충심으로 법궤에 손댄 웃사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러나 웃사의 죽음은 자격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궤를 만짐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방한 죄가 있었습니다.


웃사의 사건은 사람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모시려고 했던 출발 지점에서부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에 의해서 운송 되어져야 하는 것을 짐승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고 행한 결과로 주어진 징계입니다.


그러나 징계만을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며 그러한 중에도 위로하시고 하나님께서 뜻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 주십니다.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법궤를 이송도중에 포기했을 때에 오벧에돔이란 사람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빼앗길 수 있는 조건임에도 자신의 집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볼 때에 하나님의 징계는 그 징계에 담긴 진정한 뜻이 사람에게 위협하고 경고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참되신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징계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정한 방법이나, 부정한 마음, 부정한 모든 것들로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자격이 없으니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모시려고 한다면 복이 없고 오히려 징계가 따릅니다.


웃사의 죽음은 자격이 없는 자가 법궤를 만졌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선한 뜻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아닌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뜻이 옳다고 자신의 뜻대로 하다가는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안 되고,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제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자신이 칭찬을 듣기 위해서 한다면 무엇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선한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 하면서도 내 뜻대로 행하고 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대적하고 왜 안 되느냐고 따져 묻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서 정성껏 행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옮기던 일에 실패를 하고 하나님께 화를 내고 분을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시작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이송해야 할 방법을 몰랐던 다윗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무지함에서 비롯된 비극에 대하여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에도 자기가 뜻한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했다면 결과 또한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하고 정성을 대해서 행했지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 평양 어느 마을에 올꾼이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따르는 충직한 종이었는데, 너무 충직하다 못해 어찌 보면 바보스럽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인이 이 올꾼을 급히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올꾼아! 너는 내일 아침이 일찍 용강에 좀 다녀와야 하니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여라.” 그리고는 그 이튿날 아침에 주인은 올꾼을 용강에 보내기 위해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찾고 동네를 다 뒤졌지만 그가 보이지 않자 주인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저녁때가 되자 올꾼이 피곤한 기색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네 이놈, 올꾼아! 내가 어제 분명히 네놈에게 오늘 용강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거늘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는 거냐?”


그러자 올꾼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님, 저는 지금 주인님의 말씀대로 용강에 다녀오는 길인뎁쇼.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헌신인 것입니다.


주인의 의중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헌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내 일을 하거나 또는 일을 다 끝마친 후에 내가 이루었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라고 시키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할 때에 우리들의 가치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 되는 일에 열심을 내어 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도 있으나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너무 신뢰하다보니 하나님의 일이거나 아니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 판단 기준으로 행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르치는 때가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 말씀을 날마다 듣고 묵상하는 생활가운데서 어떠한 상황에 적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종인 목사님을 통해서 선포 되어지는 말씀 중에서 내게 주어지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남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내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 할 때에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라야 진정으로 살아있는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남이야 어떠하든지 내 영혼이 살아야 남도 살릴 수 있으며 먼저 내 영혼이 병들지 않아야 다른 이들이 병들었거나 잘못된 길에서 헤매는 영혼도 생각할 수 있고 또 옳은 길로 인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은 죽어 가는데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할지라도 영혼이 강건한 자의 한마디 권고가 죽어가는 영혼으로 백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권위가 있고 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생명력이 넘쳐남으로 주변의 많은 영혼을 옳은 길로 인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일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고 그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도 같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이러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뛰어 놀 수도 있어야 하고 그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 털어 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어떤 것은 더럽고 추해서 내려놓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것은 너무 죄송스러워서 내려놓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다 내려놓고 자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신의 체면과 자신의 권위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기뻐 뛰고 춤을 추며 그 앞에서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이렇게 순수한 모습은 경건의 모양으로 경직된 상태에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다윗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격식을 갖춘 예배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 대한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격식을 갖추어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항상 경직됨으로 자유하지 못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닙니다.


형식을 갖추어 예배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 앞에서 뛰놀며 자유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떨어야 할 때에 경직된 사람도 우습지만, 격식을 차려서 존경을 표해야 할 때에 재롱을 떤다면 그것은 재롱이 아니라 경망스러운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친다고 하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시지 않는데 어떻게 순교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고통을 참고 인내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순교의 고통보다 더 큰 기쁨을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시기 때문에 고통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보다 더 큰 소망을 주시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생각과 의지로 어찌 그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뛰놀며 먹고 마시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며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안에 참 기쁨이 있고, 참 평안이 있으며, 참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그는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복을 누리는 진정한 승리자이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 방법에 순종하여 진정한 복을 장구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3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