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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반석입니다 (삼상2:2)

본문

주님은 나의 반석입니다./ 사무엘상 2:2




18세기 영국에 토프래디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토질이 좋지 못하고 기후가 고르지 못한 시골교회를 목회했습니다. 목사님은 흩어진 성도를 심방하면서 위로하고 권면하며 힘을 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어느 날 심방 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큰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피할 곳을 찾다가 큰 바위 밑에 들어가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 밑에서 말할 수 없는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목사님은 그곳에서 반석 되시는 주님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서 적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모진 폭풍우 가운데서 아름다운 찬송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만세 반석이십니다. 


본문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에게는 아내가 둘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한나였고 또 한 사람은 브닌나였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늘 슬펐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엘리제사장을 통해서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처음에는 기도하는 한나를 보고 술에 취한 줄 알았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오래 기도했는데 마음속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를 오해해서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했습니다. 한나는 자신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슬픈 것이고 자신의 심정을 통한 것뿐임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엘리는 한나를 축복했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한나는 엘리제사장의 축복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얼굴에 근심이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한나는 믿음대로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젖 때기까지 기른 후에 아이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실로에 갔다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2:1-10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입니다. 한나의 기도 중에 가장 돋보인 부분은 6,7절입니다. 한나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아멘


본문에서 한나는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세 가지 고백을 했습니다. ➀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구별되시는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는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➁주 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의지할 분이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고, 자신이 믿고 따를 분이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➂우리 하나님과 같은 반석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에게 유일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반석은 넓고 편편한 큰 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반석이라는 단어보다는 바위라는 단어에 더 익숙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시편 18:2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0:4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는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는 가사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고백을 할 때 보면 “주님은 나의 반석입니다.”라는 고백을 종종 듣습니다.


금년에 김반석 전도사가 우리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왔습니다. 반석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은 아닙니다. 특별한 이름입니다. 이름을 아주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주님을 반석 삼으라 혹은 반석 같은 믿음의 삶을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을 것 같습니다.


설교 제목은 ‘주님은 나의 반석입니다.’입니다. 사실 제목을 ‘김반석이 아닌 주 반석’이라고 하려다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수정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이 우리의 반석이라는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나의 반석이 되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1. 주는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1) 주는 환란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잠언 30:24-28에 보면 작지만 지혜로운 것 넷을 말합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25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26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27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28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습니다. ➀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입니다. ➁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입니다. ➂떼를 지어 다니는 메뚜기입니다. ➃왕궁에 거하는 도마뱀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나오는 것이 사반입니다. 사반은 바위 너구리라고도 합니다. 생긴 것은 비버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사반은 적들이 나타나면 바위 사이에 숨습니다. 사반이 바위 사이에 숨으면 사자나 곰처럼 힘센 짐승들도 사반을 잡을 수 없습니다. 바위는 사반에게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만날 때, 문제를 만날 때, 감당하기 어려운 적들을 만날 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몸에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말을 듣고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며 심히 통곡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열왕기하 20:5을 보겠습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15년 연장 시켜주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으로부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김삼환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명성교회의 한 구역장이 강도를 당했습니다. 남편은 아직 퇴근을 안 했고, 얼떨결에 강도를 당했기 때문에, 그 구역장님은 아이들하고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구역장님은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면 이 구역장님처럼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구역장님이 기도하는 동안 강도는 집안 구석구석 샅샅이 뒤졌지만 집안 어디에서도 돈을 찾을 수 없으니까, 이불을 들추고 이불 속에 있는 구역장님 오른 손을 붙잡고 칼로 찌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불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기도하던 이 구역장님에게 갑자기 담대함이 생기더랍니다. 그래서 한 손으로 강도의 칼을 잡아 빼앗았습니다. 순식간에 생긴 일이라 강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칼을 빼앗겼습니다. 칼을 빼앗긴 강도는 오히려 여자 구역장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칼을 보고 겁 안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분이 이불 속에서 산삼을 먹었겠습니까? 이불 속에 무슨 무기가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구역장님이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자, 주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구역장님이 강도를 만난 상황에서 피난처가 되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환난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2) 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출애굽기 33:22-23을 보겠습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살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허물을 가진 인간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반석 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모세를 반석 틈에 두셨고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셨습니다. 여기서 반석은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장차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날을 피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심판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로마서 3:23-24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말이며 좀 더 확대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최후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 안에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 결과 최후의 심판을 통과하게 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으로부터 피난처가 되십니다.


 


2. 주는 나의 생명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에 물을 구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놀라운 사건을 일으켜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7:6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잡고 반석 위에 서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반석을 치니 반석이 깨지며 반석에서 생수가 쏟아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반석에서 나온 생수 때문에 죽음을 면했습니다.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준 것입니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날 때 반석이 깨지면서 생수가 흘러넘쳤습니다. 반석의 깨어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수가 필요할 때, 오직 반석을 통해서 생수를 얻었던 것처럼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4: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진리이시고 유일한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37-39을 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목마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생수의 강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생명이 살아납니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으로 불리는 칠레의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아타카마 사막은 연평균 강수량은 15mm 정도입니다. 이 사막의 일부 지역에는 무려 4천년 동안 비가 내린 흔적이 없는 곳이 있을 정도로 건조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천체 관측을 방해하는, 공기 중의 구름과 수증기가 거의 없어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전파망원경인 'ALMA'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2015년 3월 어느 날, 선인장조차 자라지 않는 이 불모지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상이변 때문에 비가 한바탕 내렸는데, 당시 사막 일부 지역엔 하루에만 23㎜의 비가 내렸습니다. 아무것도 살 수 없다고 여겨졌던 사막에 생명수가 쏟아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비가 그치자 척박한 사막 땅 곳곳에서 파란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싹에서 줄기가 자라 꽃망울이 맺히더니 분홍색 당아욱 꽃으로 만발하였습니다. 인류 관측 사상 가장 척박한 곳이라 여겨진 아타카마 사막이 꽃밭이 되었습니다. 땅을 뒤덮은 수백만 송이 꽃 때문에 사막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의 영혼은 아타카마 사막보다 생명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는 불모지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 속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생수의 강 때문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반석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3. 주는 나의 기반이십니다.


식물은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포아폴은 사막이나 황무지 어디서나 자라는 풀입니다. 이 풀은 겨우 5㎝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지만 뿌리는 전체 길이를 합하면 600㎞가 넘는다고 합니다. 겉은 보잘 것 없지만 뿌리는 땅 속 곳곳을 장악하며 물을 빨아올립니다. 그래서 포아폴은 어떤 척박한 토양에서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포아폴의 생존비결은 보이지 않는 뿌리에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포아폴과에 속하는 호밀을 발견했는데, 그 호밀은 6,228㎞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기반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16:18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주님이 세우십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반석 위에 세우셨습니다. 이 반석이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비전교회는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신뢰해야 하지만 목사를 신뢰하는 것만으로 안 됩니다. 성도들이 열심을 내야 하지만 열심만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반이 되셔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15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의 기둥과 터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반이 되어야 하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기반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개인의 신앙의 기반도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합니다. 여의도는 모래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63빌딩을 지었습니다. 모래사장 위에 63빌딩을 지을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요? 모래 속에 어마어마한 암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을 지을 때는 기반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었어도 기반이 약하면 무너집니다. 그래서 튼튼한 기반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짓는 집은 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고난이 와도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기반이 부실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고난이 오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왜 신앙인들이 쉽게 시험에 들고 자주 흔들립니까? 그것은 신앙의 기반이 잘못 되었기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신앙의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신앙은 문제가 발생하면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분의 이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환난이 와도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신앙의 기반이십니다.


 


4. 주는 나의 동반자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0:4을 보겠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 음료는 반석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반석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르는 반석이었습니다. 여기서 따르다는 말은 ‘함께 가다, 동반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정리하면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주었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으며,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다니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과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마태복음 28:20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있는 글일 것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위에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짝은 내것, 또 한 짝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삶의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보았네/ 그때는 내 인생이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때 거기에는 한 짝의 발자국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지요?/ 주님께서 대답하시었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이여/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결코 떠나 있지 않았단다/ 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짝의 발자국/ 그것은 내 발자국이니라/ 그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주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믿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니엘서 3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높이는 약 30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왕은 그 신상을 두라 평지에 세우고 낙성식을 했습니다. 낙성식에는 바벨론의 고관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음악에 맞춰서 금 신상에게 절을 해야 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선포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였기 때문에 금신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 중에 왕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풀무불 가운데에서 건져내실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풀무불을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군인 몇 사람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니엘 3:25을 보겠습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왕이 보니까 분명이 풀무불 속에는 세 사람이 던져졌는데 네 사람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풀무불 속에 들어간 세 사람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풀무불 속에 있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불러내서 보니 그들은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도 그대로였고 심지어 불 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9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금년에 제가 받은 신명기 20:1 말씀도 우리 교회가 받은 말씀과 내용이 동일합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저에게 적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동반자이십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늘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확신을 갖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믿음을 갖고 평안을 누리는 2021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은 나의 반석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반석 되시는 주님이 믿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나눴습니다. 1. 주는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환란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심판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2. 주는 나의 생명이십니다. 3. 주는 나의 기반이십니다. 4. 주는 나의 동반자이십니다.


성경을 들고 믿음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환란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심판으로부터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내 인생의 견고한 기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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