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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기억하고 은총을 베푼 곳 (삼하9:1-8)

본문

은혜를 기억하고 은총을 베푼 곳


 


사무엘하 9장 1~8절


1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2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4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5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통일왕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헤브론에서 반쪽을 통치하던 다윗은 명실상부한 통일왕국의 왕이 된 것이지요. 이제는 전체 왕국을 대표할 변화가 필요했고, 예루살렘으로 왕궁을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은혜’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데, 어쩌면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새롭게 통치를 시작하며, 정치 경제 종교적인 현안들이 안정되고 나서 취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 은혜를 베풀려는 사람의 마음의 근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은혜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한지 아는 것이 중요할 듯합니다. 지난 주 책을 읽다 오늘 말씀과 연관이 되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상훈 선교사의 『사람을 사람으로』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간다에서 한 단체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것이 부정부패와의 전쟁이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패로 해고했던 우간다의 한 직원과 단 둘이 터놓고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답니다.



“너희 같은 무중구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너희들은 가난한 사람들 도우라고 보낸 돈으로 비싼 차를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다닌다. 너희야말로 우리의 가난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너희가 필요하다면 너희에게도 우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가난’이라는 독설의 메시지가 가슴을 찌르듯 파고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합리화의 궤변으로 들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면 그것이 반쪽이라도 현실을 그려낸 말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훈 선교사는 르완다에서 일하던 동료 술래만에게서도 그런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우리 르완다의 불행을 먹고 살아간다. 너희는 남의 나라의 비극을 알리고 그렇게 르완다를 위해 모금된 돈으로 이곳에 와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지만, 가만 보면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는 돈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모금된 전액을 르완다에 보낸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 것도 쉽지 않고,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도 쉽지 않습니다.



은총으로 가는 길목에서. . .


참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윗이 목동으로 있던 시절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지 22년 만인 37세의 나이로 통일 왕국의 왕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주변나라에 침략을 당하는 약소국이 아니라, 외부적으로는 영토를 넓혀가고 내부적으로는 평안을 유지해 나갑니다.


이 시기를 사무엘하 5장 1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자, 외부 주변국에서도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먼저는 두로 왕 히람이 사절단을 보내어 백향목과 목수와 석공을 보내줍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심을 깨닫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사무엘하 5장 12절.



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이 있는 그 자리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신 은혜이고, 주변에서 인정해 주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는 사람이 어떻게 은혜를 알겠습니까? 다윗의 삶에서 그래서 ‘은혜’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가 은혜를 깨닫는 한, 누군가에게 합당한 ‘은총’을 베푸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일을 합니다.



주변의 왕들도 다윗의 권위를 인정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막강한 권세를 가지게 되었지만, 사울과는 달리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기보다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과의 전투를 벌이기 위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사무엘하 5장 19절.



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배’가 아닐까요?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라를 통치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새 수레에 싣고 법궤를 이동하며 온갖 악기를 연주하며 퍼레이드를 합니다.


하지만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날뛰기 시작하고 ‘웃사’가 손을 내밀어 궤를 붙잡자 그의 범죄함을 인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모든 백성들과 다윗은 두려움에 떨며 의아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두려움 가운데서 3개월이 흘렀고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레위인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궤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사기 시대 이후, 사울 왕 때도 그렇고 그동안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아주 기초적인, 하나님의 법궤를 어떻게 옮겨야하는지, 이전에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는데도 아무도 모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울 왕은 이전에 놉에 있던 제사장들 85명을 죽이기도 했고, 위급할 때는 무당을 찾아갔던,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찾지 않은지가 너무 오래였던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그도 때마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쫓았던 사람이고, 실제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거나 묵상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3개월의 시간동안 다윗과 중직자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제대로 찾아보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동안 숱한 전쟁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3개월의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경외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레위지파 외에는 아무도 멜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도 불러서 레위 지파는 스스로 성결할 것을 명령하고, 모세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명령한 대로 하나님의 궤를 직접 제사장들이 장대에 꿰어 어깨에 메도록 명령합니다.


 


이제 기쁨으로 법궤를 옮겨오는 일만 남았습니다.


흥미롭죠. 말씀을 연구하고 법궤를 옮겨오는 방법을 알고 났더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과 기대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제 그 유명한 다윗이 춤을 추는 일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내 미갈이 다윗을 멸시하고 비난합니다.


사무엘하 6장 20절 말씀을 보세요.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그러거나 말거나, 다윗은 장막 안에 법궤를 옮기고 번제와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감사 예배합니다. 그리고 레위지파 아삽과 그의 형제를 날마다 규정대로 섬기게 하고, 율법 책에 있는 규례대로 아침, 저녁마다 제단 위에 번제물을 바치게 합니다. 시편 131편은 예루살렘 성전에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올라가며 부른 노래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제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뿐 아니라, 잊을 수 없는 한사람 ‘요나단’을 기억하게 됩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은총을 베풀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 나라가 안정이 되자, 사울의 혈육 중 살아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화의 근원이 될 만한 모든 씨를 말리려는 의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왕권이 바뀌면 이전의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무엘하 9장 1절에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1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이제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야 할 은총이 무엇일까요?


사무엘상 18장부터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특별한 우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둘의 운명적인 이야기는 사무엘상 18장 1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이 만남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전쟁터의 영웅이 된 다윗이 누구인지 소개하는 자리에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후로 요나단은 늘 다윗의 편에 섭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할 때마다 그를 변호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다윗을 구해 줍니다. 그로 인해 사울왕은 자신의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 할 정도로 분노하기도 합니다.


늘상 불안했던 다윗에게 요나단은 위험을 알려주고 피하도록 도와줍니다. 사무엘상 20장에 있는 한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초하루가 되면 왕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관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극도로 화가 나 있던 사울 왕 앞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다윗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요나단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충신을,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을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이 죽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절대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고 설득하면 다윗이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믿을 수 없었고, 둘은 이런 작전을 씁니다.


사무엘상 20장 19절에 ‘에셀바위’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 바위는 다윗과 요나단이 마지막 언약을 맺었던 바위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사무엘상 20장 42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다시 작전으로 돌아와,


초하루 잔치가 열릴 때, 다윗은 바로 그 에셀 바위에 숨어 있기로 합니다.


그리고 잔치자리에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지 아닌지를 요나단이 알려줍니다.


다윗이 숨어있는 바위를 향해 요나단이 화살 셋을 쏘고 사환에게 찾아오라고 할 것입니다. 그 사환이 화살을 찾으러 갈 때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일 뜻이 없으니 돌아와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화살을 쏘고 사환에게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잔치 자리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마지막으로 변호해 보지만 사울을 불같이 화를 내고 아들 요나단조차 창으로 찔러 죽이려고 합니다.


요나단은 밥도 먹지 않고 슬퍼합니다. 그리고는 작전대로 행하여 다윗을 떠나보내게 됩니다.


42절의 마지막 언약을 뒤로 한 채 말입니다.


이제 다윗의 삶에 광야가 시작됩니다. 비참한 도망자의 삶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의리와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다윗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과 질문이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겠다고 합니다. 그에게 그런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요나단을 생각하면 은총을 베풀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인하여 누군가에게 은총을 베풀까요?



무엇보다 다윗이 기억하는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대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을 기억하지만, 편안해 지면 은혜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목도하는 바지만,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 신앙을 지키는 것보다, 축복을 누리며 살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고 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하 7장 1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고 잃었던 법궤를 찾아온 후에 찾아온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그리고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보았고,


무엇보다 사무엘하 6장에서 법궤를 찾아와 기뻐하는 다윗의 모습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6장 14절.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고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다윗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그의 아내 미갈 다윗을 조롱합니다. 어떻게 왕의 체통을 망각하고 그렇게 춤을 출 수 있냐고 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겠느냐고 힐난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1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있는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삼으신 ‘은혜’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뛰노는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는 말입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과 그의 후손을 축복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자 다윗이 그 축복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사무엘하 7장 18절.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이런 다윗의 신앙 고백을 생각한다면 로드발에 살고 있던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은총을 베푸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므비보셋과 로드발


다윗이 은총을 베풀기 위해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은혜를 베풀기 위해 나섭니다.


말씀을 보며 묵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총을 베풀겠다’는 선한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을 실행하기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할 도리를 다 했고, 사울과 아들들, 아브넬 장군과 이스보셋을 장사지내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 역시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은총을 베풀기 위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기 위해 ‘로드발’에 사람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진심을 알았기에 누군가가 말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집에 ‘시바’라는 종이 있다고 말입니다. 만일 다윗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죽이려 했다면 시바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바를 찾아 다윗은 다시 묻습니다. 사무엘하 9장 3절.



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아직 므비보셋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사무엘하 4장 4절에 보면 아주 짧게 그의 대한 이야기가 스쳐 지나갑니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그는 그렇게 다리를 절게 되었고, ‘로드발’이라는 곳에서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로드발’은 ‘목장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의 뜻처럼 그곳은 황량한 곳이었고, 마길이라는 사람이 므비보셋을 데리고 숨어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이야기 중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이 부분일 것 같습니다.


삼하 9장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5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은총이란 무엇일까요?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은총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이 빛나는 것입니다.


은총을 입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은총을 베푸는 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을 만났을 때, 그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는 다윗의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다윗이 지금까지 행한 일로 보건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종’으로 자신을 여기지 않았을까요? 6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가장 비참한 것은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죠. 므비보셋의 자존감이 바닥입니다. 8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다윗이 베푸는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에서 ‘죽은 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게다가 죽은 개는 버려져 부정할 뿐 만 아니라, 돌아 볼 가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은총을 베풀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7절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



은총은 신분을 바꾸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을 만 한 자에게 베풀 때가 아니라,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에 감동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다윗의 삶이 참 감동적인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예측할 수 없는 일, 사람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일을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찬양이 있죠?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고아에서 아들로 거절에서 응답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저주에서 축복으로 원수에서 연인으로


창기에서 신부로 바꾸어 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다윗은 두 다리를 절고 있었던 므비보셋의 신분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다윗의 은총은 그의 신분과 삶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문맥으로 보면 므비보셋의 거처를 알려준 ‘시바’라는 종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울왕의 재산을 갈취했던 것 같습니다. 시바는 하인들을 데리고 호의호식 하고 있을 때에, 그의 주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은 황량한 곳에서 도망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다윗이 므비보셋을 위하여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더 이상 절름발이라고 업신여기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더 이상 원수의 아들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과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9장 10~11절



10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11 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여기서 우리가 잠깐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 ‘시바’의 삶입니다.


시바라고 하는 사람은 사울 왕이 죽자 마땅히 섬겨야할 주인을 버리고 재산을 가로챕니다. 사울이 나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은인이 아니었겠습니까?


다윗이 그가 가로챈 모든 것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라고 하자, 그 명령을 따랐지만 그것을 자신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참 후의 일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할 때의 일인데, 사무엘하 16장 1~4절에 보면 시바가 많은 음식을 가지고 다윗을 찾아옵니다.



그 때에는 사울왕의 집안에 속한 사람 시므온이 대 놓고 도망하는 다윗을 저주할 때인데, 다윗은 당연히 시바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분개했겠습니까?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준 므비보셋이 자신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신을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은 그렇게 쉽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바는 다윗이 도망가는 그 틈을 타 다시 가로챘던 재산을 찾으려고 모략을 꾸몄던 것이죠. 므비보셋은 절름발이라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도망자의 길을 가는 다윗에게 이렇게 후한 대접을 하니 그의 마음을 훔치기에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습니까?



하지만 진실을 감춰질 수 없는 법이고,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9장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일어난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에 복귀하자 므비보셋에게 그 때에 있었던 일을 묻습니다. 왜 함께 도망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이 이렇대 대답합니다. 사무엘하 19장 26~27절.



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성경은 시바와 므비보셋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므비보셋의 말을 들은 다윗은 재산을 시바와 나누라고 합니다.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진짜 므비보셋이 자신을 배신했다 할지라도 요나단과의 언약을 생각하여 끝까지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었든지,


다른 하나는 비록 시바가 잘못했지만,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갈 때 자신과 식솔들, 그리고 군대를 위해 음식을 가져와 대접했던 일에 대하여 원수로 갚지 않고 은혜로 갚는 일이야 말로 가장 다윗다운 일이었다고 말입니다.


음식을 가져온 시바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 속에 있지 않았을까요? 사무엘하 16장 4절


 


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중요한 것은 다윗의 삶에서 일관성 있게 보이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그는 성실하게 갚는 사람이었고, 당시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가 베푼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역사는 ‘순환’ 되는 것입니다.


은총을 경험한 자들만이 그 은혜를 베푸는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바, 하나님이 아니고는 지금 자신이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만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어 줄 수 있습니다. 아까 보았던 사무엘하 7장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시죠.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이 고백 하나로 다윗의 인생을 이해하고, 다윗이 행하는 일들의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만이 은총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겸손이 그 삶을 복되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은총을 베풀리라’ 우리 인생에 꼭 기억해야 할 문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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