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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은 벗겨진다 (행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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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은 벗겨진다 (행9:10-19)



 


  




제가 초등학교 때, 강원도 원주에 살 때는, 민물견지 낚시를 참 좋아했습니다. 피라미부터 시작해서 많은 고기들을 잡았지요. 그리고 낚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갈 때면 물고기들을 흐르는 강물에 손질했어요.


 


  




먼저 물고기 배를 따야 하지요.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물고기들의 내장을 다 꺼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물고기 표면에 있는 비늘을 다 제거 해야만, 집에 가서 매운탕이나, 튀김을 해 먹을 수 있죠.


 


  




그래서 고기 표면에 있는 비늘을 잘 제거해야만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비늘 제거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18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그 눈에 덮여 있다고 하지요. 진짜 물고기 비늘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뭔가 그를 덮고 있었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부활하심을 목격한 제자들이, 이제 예수를 전하기 시작을 하지요. 예수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를 죽이면, 좀 수그러들어야 하는데, 예수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죠. 어떤 이는 예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순교를 당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예수를 믿기 위해 몸을 피하고, 몰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된 것이죠.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초대교회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을 해서 당시 교회와 예수 믿는 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사울은 아주 악명이 높은, 그런 못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만지실 때,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지요. 하나님은 사울을 이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즉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작정하셨지요.(행9:15)


 


  




사울이 변화되기 전에는, 교회를 위협하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 이었지요. 9장 1절에 보시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 또 2절에는, ‘남여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온다’ 이것을 보면, 사울의 변화되기 전의 모습은, 아주 과격한 성품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요.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대 제사장으로부터 다메섹에, 예수 믿고 숨어 있는 사람들을 잡아오라는, 공식 문서를 가지고,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죠.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시면, 스데반이 예수의 도를 전하다가 돌 맞아 죽는 순교로, 많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 졌는데, 이 다메섹에도 예수믿는 사람들이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알게 되었지요. 그때 아마 현상금도 걸려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그들을 잡기 위해서 바울이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메섹이라는 도시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주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요.


 


  




오늘 성경을 보면, 하늘에서 빛이, 홀연히 비추고, 또 음성이 들리는데, 바울이 그 빛을 보고 놀라면서, 땅에 엎어지면서, 그 음성을 향해서 물어보지요.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5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러분, 사울은 지금 돌아가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변화되었지요. 그래서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아주 새롭게 획을 긋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는 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 위에서 아주 잠시이지만, 그러나 매우 집약적이고, 큰 의미를 가진, 변화의 체험을 그는 하게 됩니다.


 


  




그 당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그런 상황이 되니, 바울과 함께 갔던 사람들이, 바울을 데리고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3일 동안에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다메섹에는 ‘아나니야’ 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었어요. 어느날 역시 환상 중에, 주의 음성이 아나니야에게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지요. 아나니야는 사울이 머무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삼일동안 보지 못하고, 누워있는 사울에게, 안수를 하지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18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시작) 안수하게 되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어요?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이 것이 떨어져 나가고, 사울은 다시 보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서 삼 일간에 실명이라든지, 또는 3일 후에 눈이 회복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눈을 떴다’ 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어요. 그동안 사울의 눈을 덮고 있었던,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그런 영적인 시각 장애를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18절 말씀에 나타나는 ‘비늘’이라고 하는 표현이, 아주 영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늘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치 물고기의 표피를 덮고 있는, 얇고 단단하게 생긴 작은 조각이지요.


 


  




그렇다면 그동안 사울을 덮고 있었던 비늘은 무엇일까요? 그 비늘은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깨지지 아니하는 고정관념일 수 있습니다. 사울 스스로가 해석하고, 그의 생각 속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오셨는데, 그의 생각 속에는 여전히 이 땅을 구원할 메시야는 아직도 오지 아니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것이다’ 라는 유대교 신앙이 그의 눈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비늘인 것이죠. (지금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지요. 메시야가 오셨는데, 오지 않았다고 기다리고 있지요)


 


  




이 땅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라는 놈(? 죄송합니다)이 나타나서, 내가 메시야라고 하니까, 뚜껑이 열린 것이죠.


 


  




그에게는 이 비늘이 벗겨지지 아니하니까, 예수가 예수님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죠. 그러한 비늘이 그를 덮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던, 이 바울을 예수님이 만나주신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주신 것이죠. 만나주셔서, 그의 눈에 씌워졌던 비늘을 예수님이 벗겨 주신 것이죠.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진정 만나는, 그런 변화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이죠.


 


  




여러분, 사실 예수님을 진정 만나려면 나를 덮고 있는, 이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이 비늘이 벗겨질 때, 진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얻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성경에 많은 사람들도)


  




예) 어떤 잘 사는 집에 운전기사가 있었대요. 그 운전기사는 부자이면서,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의 운전기사이지요. 사장님이 그 운전기사를 인격적으로 참 잘 대해 주었어요.


 


  




그는 가끔씩 차안에서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인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아도, 사장님이 말씀하시니까 운전하면서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어느 날 사장님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하지요.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자네가 내 차를 가지게나.” 그 운전기사는 너무 기뻐서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 사장님은 덧붙여 말합니다. “그리고 그땐, 자네 부인과 함께 넓고 좋은 우리 집에 와서 살도록 하게.” 다시 한 번 그 운전기사는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 사장님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자기의 모든 재산과 땅을 다 가져도 좋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이 운전기사는, 너무 좋아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사장님이 한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한 부부는, 너무 좋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사장님의 집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자네, 이 밤중에 웬일인가?” “아, 사장님 이제 알았습니다, 전 그 자동차가 싫습니다.” “여보게, 자동차가 싫다고? 왜 그러지?”


 


  




“저는 사장님의 집도, 사장님의 돈도, 그리고 사장님의 넓은 땅도 다 싫습니다.” “그럼, 자네가 원하는 게 뭔가?” “저도 예수 믿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도 사장님처럼, 가장 좋은 소망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 운전기사의 눈에 있던, 그 비늘이 어는 순간, 떨어져 나간 것이죠.


 


  




여러분, 오늘 사울에게도 그가 가지고 있던 비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그 비늘이 벗겨진 것이지요. 그의 눈에 있는 영적인 어두움이 벗겨진 겁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 벗겨진 가장 큰 비늘은 무엇일까요? 그에게 깨어지지 않는 고정관념이지요. “예수는 가짜다! 메시야는 아직 오직 않았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자들을 잡아 넣어야 된다” 라고 하는 깨어지지 아니하는 고정관념이지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자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깨어지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예) 여러분, 비가 오면 우산을 쓰는 건 당연하지요. 그래서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더구나, 어린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올 때,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쓰지 않고 가는 어린 아이들이 있어요.


 


  




그러면 누구나 다 이런 생각을 하지요. “부모들은 뭐하나, 비가 오는데, 우산도 챙겨 주지 않고” 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어느 국민이나 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산 이예요.


 


   




유럽에 가본 사람은 압니다. 비나 눈이 올 때,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요. 왜 그럴까. 유럽인들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지요.


 


  




어린이가 우산을 쓰고 걸으면, 앞이 가려져서, 더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우산을 들기 때문에 손이 자유롭지 못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우산을 안 쓰고, 우비나 레인코트를 입도록 교육받는데요.


 


  




여러분, 고정관념은 우리들의 생각과 안목을 좁게 만들어요. 사울은 그 ‘고정관념의 비늘’이 이제 깨어진 것입니다. 메시야, 즉 ‘예수님은 아직 오직 않았다. 아직도 기다린다!’ 그 고정관념에서, 예수 믿고 순교하고,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 그의 고정관념이 깨어져 갑니다.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혹시 아직, 나의 깨어지지 아니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 비늘이 나를 막고 있는지는 않는지요? 주님을 바라보는데 내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은, 없는지요?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고요.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나를 덮고 있는 비늘 때문에, 제대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내 가슴깊이 만난 적이 언제인가? 내가 정말 순수하게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던 때가 언제인가?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가 내 눈에 비늘이 점점 생겨서, 그것이 나를 막고 있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랜 반복과 습관 속에서, 내 속에 어느덧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비늘이 덮여져 있어,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는 않는가?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서 이러한 비늘이 벗겨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바로 이것이지요. 특별히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자녀들을 덮고 있는 이 비늘!!


 


  




여러분, 사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 비늘을 씌워졌을 수도 있어요. 부모에게 순종하며 교회 다녔던 그 아이들에게, 우리 부모의 이원화된 삶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이 비늘을 씌워졌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깨달아야 하는 그 시기에, 잘 못된 비늘을 자녀들에게, 부모가 씌워졌을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 눈에, 덮여져 있는, 영적인 어두움의 비늘을 벗겨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비늘’이 성령의 은혜로 벗겨지기를 원합니다.


  




10장 44절을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시작)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성령이 누구에게 내려왔다고 했어요? 말씀을 듣는 누구에게?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했어요.


 


  




여러분, 이 영적인 비늘이 벗겨지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로 나와야만 된다는 것이죠. 비늘을 벗길 수 있는 방법은, 말씀의 자리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머물게 해야 하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일이 있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겁니다’. ‘바쁘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겁니다’. ‘너무 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예배 먼저 드리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녀들이 말하지요. “엄마 저 너무 바뻐요. 이번 주는 예배 빠질게요” “그래, 알았어! 이번 주는 빠져!”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바쁘니까 예배 1시간만 예배 드리고, 말씀 듣고가?” 이것이 되어야지요.


 


  




여러분, 이 세상에 어두움의 비늘을 끼고 사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그 비늘이 떨어져서 새로운 빛을 보면서 사는 것이 좋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을 돌이켜서, 위대한 교회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덮여 있는, 그런 비늘을 벗겨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눈에 있는 비늘을 벗겨 주시고, 하늘의 놀라운 영광을 볼 수 있는 그런 부흥의 역사가, 여러분 안에 일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덮고 있는 세상의 안목과, 세상의 정욕과, 욕심이~~ 우리 눈에, 비늘이 되어, 점점 두껍게 덮여져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 비늘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먼저 내 눈에 있는 비늘을 벗겨달라고, 성령이 나를 붙잡아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임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고, 주의 말씀을 통해서 그 성령이 충만하여, 우리를 덮고 있는 영적이 비늘이 벗겨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자녀를 덮고 있는 어두움의 비늘을, 하나님 벗겨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느끼고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비늘은 벗겨집니다!! 사울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을, 오늘 나에게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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