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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성도의 삶과 축복 (롬1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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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성도의 삶과 축복(롬15:4-13)


 


지구에서 가장 추운 남극에도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생존을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곳으로 떠나게 마련입니다.


어떤 종은 추위를 피해 아예 남극을 떠났습니다.


조금이라도 먹이가 풍부한 지역에 자리를 잡은 종도 있고,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곳으로 움직인 종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황제펭귄은 남극 중에서도 가장 춥고 먹이도 많지 않은 혹독한 내륙으로 이동했습니다.


제 아무리 남극에 사는 동물이라 해도 영하 40도의 추위는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펭귄들은 허들링이라는 방법으로 무리를 지어 살아갑니다.


모기향 모양처럼 줄을 서 바깥쪽에 있는 펭귄들이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안쪽에 보호받던 펭귄이 밖에서 버티던 펭귄과 교대하며 추위를 이겨냅니다.


이렇게 조금씩 희생하며 서로의 체온을 지켜주자 황제펭귄이 머무는 남극의 가장 척박한 내륙은 오히려 천적도 없고 새끼들도 안전한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 됐다고 합니다.


혹독한 추위를 이기며 남극 내륙에서 살아가는 황제펭귄의 이야기는 어쩌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기독교 진리를 향한 공격과 비난이 얼마나 거세어집니까?


남극의 영하 40도만큼이나 거세진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공격을 이겨내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인의 교회에도 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문제가 없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 때문에 약해지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이기고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걱정하고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하는 로마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나누어져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교회에서 같은 성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교회 성도들이지만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한 뜻이 되지 못하고 속으로 심한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먼저는, 같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날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떤 날이 중하냐? 중한 날과 중하지 않는 날에 대한 갈등으로 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날 뿐만 아니라 먹는 문제가 그들을 또한 갈라놓았습니다.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과 그것이 신앙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사람과의 갈등입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갈등이었습니다.


14장의 말씀이 날과 음식의 문제로 갈등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15장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에 대하여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적인 배경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 오던 유대인들과 그것을 모르고 사도 바울이 전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이방인들과는 정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믿으면서도 구약이 가르쳐주는 율법의 여러 가지 내용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행태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차이가 큰 만큼이나 해결하기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쉽지 않다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도 옳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든지 해결하고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14장 15장 두 장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중에서 2장도 많은 분량입니다만 특별히 실천적인 면을 가르치는 12장부터 치면 5장중에서 두 장을 이 일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짐마차용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산 말은 보통 한 마리가 대략 3,175 kg을 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 마리가 끌 수 있는 짐은 산술적으로 약 6,350 kg이 됩니다.


그러나 팀을 구성해 적절한 훈련을 시키면, 두 마리의 말은 약 11,340kg의 짐을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짐의 세 배가 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협력하는 시너지의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이와 동일합니다.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할 줄 알고,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 되는 것처럼 힘 있고 행복하고 보기가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고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주님도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에서 우리와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로마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마음도 바로 하나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하면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이런 바람을 갖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00교우들아 너희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진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가 되는 일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야 할 줄 믿습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되고 서먹서먹하고 나누어져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에 앞서서 하나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하나 되는 일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각자가 나름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도들은 성경의 교훈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성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자라난 환경이 다르고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교회처럼 하나가 되기 어려운 곳은 없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런 교회에서 그 쉽지 않은 일을 위하여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로마 교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먹는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고 채소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기는 우상에게 드려진 재물이기 때문에 이것을 먹으면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강한 자는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럴 때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니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기까지, 강한 믿음이 될 때까지 참아라, 인내하라, 그럴 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갈등은 그것이 가정의 문제이든 교회의 문제이든 사회의 문제이든 그 원인을 살펴보면 서로에 대하여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못됐다고 즉시 비판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인정을 하지 않고 틀렸다고 말을 합니다.


함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가르치는 하나 됨의 비결은 비판하지 않고 나와 다름을 받아주고 끝까지 참고 이해하고 인내하는데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을 받고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부부가 점점 늙어가는 대도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급한 마음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한 나머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부부는 아내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했을 때 그 결과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고 하나 됨의 축복이 깨져버렸습니다.


하갈이 아들을 믿고 몸종의 본분을 이탈하여 여 주인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중간에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인내했어야 했는데 인내하지 못했을 때 그 가정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 됨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서로 인내하고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말을 참아야 하고 남을 정죄하는 일을 참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버리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행하면 시원할지는 몰라도 거기에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갈등의 불씨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성장할 때까지 참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이해하고 깨달을 때까지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시기까지 참으시기 바랍니다.


인내하고 참고 기다릴 때 우리의 공동체는 하나 됨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한 하나 됨을 위하여 성도들은 서로 받아야 합니다.


 


7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지금 로마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대적하고 등을 돌리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서로 받으라,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르면 다른 대로, 틀리면 틀린 대로 서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마음과 뜻이 같아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고 서로 틀려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 틀리고 다르면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가 싸우고 경영자와 노동자가 싸우고 정당이 싸우고 남북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서로 틀리고 서로 달라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는 구절이 비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다는 말은 한 마디로 사랑으로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죄인이고 영원한 심판의 대상이고 마귀의 자식인 우리를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다는 말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받으셨습니다.


오늘 나와 다르고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뜻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인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가가 고멜을 받아들인 것도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있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갖고 서로 받아들이고 서로용납하게 될 때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열방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9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열방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는 구약성경의 인용입니다.


12절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인데요,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방이, 모든 민족이 구원의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야 구세주를 보내신 것은 이방인들을 비롯한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열방이 구원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받지 못하고 하나가 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아버지를 섬기고 한 주님을 섬기고 한 성령을 섬기면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서로 나누어질 수 있겠습니까?


같은 믿음을 갖고 같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자는 그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는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고 말씀하면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한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자녀 된 우리는 마땅히 하나가 되어 아버지를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지 않겠습니까?


모든 열방이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500여명이었습니다.


그 500여 명 중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였을 때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나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어디에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합니까?


하나 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의 축복은 넘치는 즐거움과 평강인 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이 축복을 누가 받을 수 있고 누가 받지 못합니까?


같은 믿음생활을 하더라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늘 갈등을 일으키고 담을 쌓고 사는 자는 이 축복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승천을 목격하고도 하나가 되지 못한 380여 명의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성도들만이 이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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