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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더 강한 위로 (수2: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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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더 강한 위로 (수 2:23-24)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는 극심한 혼란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공백은 너무나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과연 백성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 것인지, 가나안 정복이라는 과업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여호수아는 걱정근심을 넘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호수아를 찾아오셔서 그 어느 때 보다 강하게 위로해 주셨다.



(수 1:2,9)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정말 너무 힘들 때는 아무라도 곁에 있어주면, 누구라도 안부 전화라도 한통 걸어주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얼마나 큰 위로가 됐겠는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힘을 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강하고 담대해졌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작전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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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여리고는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길목이면서, 전략적 요충지이다. 전쟁에서 정탐꾼을 보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전술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냈다는 것은 기필코 가나안을 정복하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 결심이 섰다는 증거이다.




여호수아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2명의 정탐꾼을 선별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여리고로 보냈다.



(수 2:1)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탐꾼들은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아니, 사실상 이건 위기가 아니라 그냥 작전 실패였다. 왜냐하면 정체가 탄로 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리고에 들어가자마자 들통 나고 말았다.



(수2: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보고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라. ‘수상한 사람이 성에 잠입했다’고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 몇 명이 방문했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사람은 정탐꾼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고, 언제 들어 왔는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



정탐꾼의 주된 임무는 ‘몰래’ 상황을 살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가 탄로 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즉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생각해 보라. 정탐꾼이 잠입했다고 하는데 여리고 왕이 그냥 가만히 있겠는가? 아니다. 붙잡아서 무엇을, 얼마나 봤는지 심문할 것이다. 또 역으로 정탐꾼들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정보를 파헤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여리고 왕은 정탐꾼들이 숨어 있는 곳-라합의 집으로 군사들을 보냈다(3절). 이제 정탐꾼은 죽은 목숨이다. 둘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천만 다행히도 여리고 왕이 보낸 군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라합이 정탐꾼들을 안전한 곳에 숨긴 후였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임기응변을 발휘해서 군사들을 저 멀리로 따돌리기 까지 했다.



(수 2:4-7)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어떤가? 감동적이지 않은가? 멜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왜? 라합은 정탐꾼들을 보호해준 것일까? 어쨌거나 라합은 여리고 사람이고 정탐꾼들은 여리고를 정복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정탐꾼들을 신고해서 한방에 인생 역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잡으러 온 사람을 돌려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이유가 뭘까?



(수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라합의 신앙 고백이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제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했다. 라합이 바라본 여리고의 미래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었다. 그래서 정탐꾼을 신고하고 여리고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쳐들어 왔을 때를 대비해서 어떻게 하면 목숨을 지킬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준 이유다.




이제 입장을 바꿔서 정탐꾼들에게 감정이입을 해보자. 라합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탐꾼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했다. 그런데 이방 민족이, 그것도 한낱 기생이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잡 미묘했겠는가? 어쩌면 정탐꾼들은 “우리는 이 여자보다도 믿음이 없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했다면, 지금쯤 가나안에 정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하면서 탄식했을 지도 모른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소문만으로도 믿음을 가졌다. 그런데 정작 그 소문의 주인공들은 믿음이 없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라합 하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라합의 고백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라(수2:9-11). ‘우리가’, ‘이 땅 주민들이 다’, ‘우리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무슨 말인가? 여리고 사람 대부분이 여리고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정탐꾼들의 신분이 그렇게 빨리 탄로 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리고의 모든(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워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낯선 사람을 보거나, 이스라엘 진영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즉각 반응하고 조치한 것이다.




아무튼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은 라합의 믿음과 용기, 지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이번 정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정탐꾼이 아니라 라합이었다. 라합은 여호수아 2장의 핵심 인물이다. 분량 면에서도 그렇고, 역할 면에서도 그렇다. 흥미롭게도 라합은 여호수아 1-2장을 통틀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부른 사람이다(9-11절). 굳이 비교하자면 하나님의 강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은 여호수아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많이 불렀다.



이렇게 라합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라합이 어떤 사람인가? 이방여인이다. 그냥 이방여인도 아니고 아모리 족속의 매춘부였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 볼 때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심판의 1순위였고, 여리고를 정복하게 되면 가장 먼저 처치해야 할 부류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여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더 많이 불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은 라합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라합과 그녀의 가정만큼은 안전하게 지켜 주셨다.



(수6: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살려 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라합을 살려 주신 것이다. 그런데 라합은 그저 단순히 목숨만 건진게 아니었다. 그 후로 라합은 이스라엘 중에 거주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살몬이라는 유다지파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낳아서 보아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보아스는 훗날 룻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오벳이 태어나는데,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다(마1:5-6). 그리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다! 얼마나 놀라운가?



라합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입성하는 그 당시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되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라합을 믿음의 선배(영웅)들의 반열에 올리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비록 이방여인이었고,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을 굳게 믿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생명을 지켜 주시고 신분을 바꿔 주셨다. 라합은 이제 더 이상 이방여인이 아니다. 기생도 아니다. 라합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민족이고, 믿음의 증인이다. 그동안 홀로 외로이, 두려움 가운데 믿음을 지켜 나가고 있었던 라합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은 라합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강하게 위로해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라합 만 위로해주신 것이 아니었다. 정탐꾼들에게도 은혜 베풀어 주시고 그들도 강하게 위로해 주셨다. 여기서 정탐꾼의 신앙 상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반적인 상태를 반영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본문을 가만히 눈여겨보면 정탐꾼들이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혹은 주도적으로 믿음의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딱 두 번 믿음의 말을 하긴 하는데,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라합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한 것 뿐이었다. 라합이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줄 알고 있다”고 고백하니까(수2:9-11) 정탐꾼들은 그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 너를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다(수2:14). 정탐을 마치고 여호수아에게 보고 할 때도, 자기의 말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라합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할 뿐이었다.



(수 2:23-24)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는 말은 주어만 바꾸었을 뿐이지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했던 말 그대로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탐꾼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음을 감지할 수 있다. 비록 라합이 했던 말 그대로 반복하긴 했지만, 그 안에 정탐꾼들의 믿음과 확신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보고 할 때에 마치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처럼 “그 땅을 우리 손에 주셨다!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정탐꾼들의 이러한 보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여호수아가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모세에게 했던 믿음의 보고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민14:6-9). 무슨 말인가? 정탐꾼들에게도 믿음이 생긴 것이다!



만약 정탐꾼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보고 했을 것이다. “여리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다고 합니다.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때문에 간담이 녹았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똑같은 내용이라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과 간접적으로 말하는게 얼마나 차이가 큰지 모른다. 예를 들어, “그 집 음식 참 맛있더라”고 하는 것과 “그 집 음식 참 맛있다고 하더라”는 어감이 전혀 다르다. “맛있더라”는 내가 직접 맛을 보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맛있다고 하더라”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단순히 옮기는 것 뿐이다. 어쩌면 정보 면에서는 후자가 더 정확할지 모른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그 내용을 확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놓고 보면 “맛있다고 하더라”는 “맛있더라”에 비교가 안 된다.



정탐꾼들은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더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보고했다. 정탐꾼들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어디서 이런 확신이 생겼을까? 하나님께서 라합을 통해 정탐꾼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탐꾼들은 정탐에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여리고에 들어가자마자 정체가 탄로 나고, 군사들에게 추적당하고, 기생이 숨겨줘서 겨우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이걸 어떻게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건 명백한 실패였다. 누구라도 실패하면 의기소침해진다. 마음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정탐꾼들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는가?



군사들을 피해서 숨어 있는 동안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두렵고, 처량하고, 서글펐겠는가? 어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런 정탐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다. 라합의 고백을 통해 소망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믿음을 주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한 번 더 크게 위로해 주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었다.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낸 것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가 아니라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첫 걸음, 첫 번째 작전개시로서 정탐꾼을 보낸 것이다.



이렇게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정탐꾼들의 보고는 너무나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정탐꾼들의 보고로 인해서 여호수아는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확신을 넘어 실제로 일이 잘되어 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 모른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에 시험을 치르다 보면 “이번 시험 느낌이 좋다. 잘 본 것 같다”는 확신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아니다 다를까 예상대로 시험을 잘 봤다. 성적이 쑥 올랐다.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확신했던 일이니까 별 감흥이 없는가? 아니다. 좋다. 엄청 좋다. 어쩌면 내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확신했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확신했기 때문에 덤덤한게 아니라, 확신했기 때문에 더 기쁘고, 더 감격적이다.



정탐꾼들로 부터 ‘여리고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 주셨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여호수아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정탐꾼을 통해 여호수아에게 강한 확신과 믿음을 주셨다.




말씀을 맺겠다. 하나님은 라합을 구원하시고, 믿음의 역사를 쓰게 하셨다. 아직까지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셨다.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던 여호수아에게 더 큰 믿음과 담대함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리고에서 베풀어 주신 더 강한 위로이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시는 여리고이다. 여러분이 만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손길이다. 여호수아와 정탐꾼과 라합처럼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은 저마다 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실한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정탐’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라합과 정탐꾼과 여호수아를 위로하셨다. 어람나 능력이 크신가? 동시에 얼마나 세밀하고 자상하신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기 바란다. 하나님의 더 강한 위로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도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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