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크냐? 이런 질문 하지 않는 사람! (눅9: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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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이런 질문 하지 않는 사람! (눅9:46-5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눅 9:23, 쉬운성경) 예수님께서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 고집을 꺾는다,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자기 부인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집을 부리면서 누군가를 온전히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려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이게 첫 단추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 말은 죄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묵인하지 않으신다. 죄를 움켜쥐고서 거룩하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다. 그분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죄를 죽이면서 따라가야 한다. 이게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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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르침을 이해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내용을 이해했는지 여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해한 내용을 그대로 실행하는지 여부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지각이 뭔지 그 뜻을 몰라서 지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지각이 뭔지 뻔히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지각을 한다. 이런 경우라면 ‘지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아는 만큼 실행하느냐이다.
마찬가지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를 제대로 이해했느냐는 단순히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 말의 뜻을 ‘알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제자들은 제자도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채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경쟁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제자들이 서로 변론을 일으켜 가며 누가 큰지 따진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온 세상을 통치할 군주로 여기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런 군주로 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지난 3년 동안 내쳐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출세하고 성공할 일만 남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미리미리 서열을 확실하게 정해 놓는 것이었다. 그때 가서 하면 이미 늦다. 미리 선을 긋고, 싹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 그래서 누가 더 크냐-“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게 마땅하냐, 누가 한자리를 차지해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야말로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자기들끼리 김칫국을 한 사발씩 들이 붓는” 꼴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의 어긋난 경쟁심과 욕심은 제자들 사이에서만 발동하는게 아니었다. 제자들은 누구든 조금이라도 자기 자리를 위협할 것 같으면 미리 그 싹을 밟아 버리려 했다.
(눅 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어느 날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를 따르라고 제안했다. 이게 말이 좋아 “우리와 함께 하자”는 거지, 따지고 보면 “내 밑을 들어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요한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요한은 “이제 부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지 말라”고 금지 시켜 버렸다.
여기서 요한의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다. 요한의 주 관심사는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다. 요한은 ‘자신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니까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는 것 까지 가로 막은 것 아니겠는가? 만약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면, 그 사람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든 말든 관계없이 앞으로도 계속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요한은 유치하고 극단적인 이분법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다 적대 세력으로 바라보았다. 만에 하나 그런 사람이 나중에 경쟁자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골치 아프다. 그때는 자기 말을 더 안 들을게 분명하다. 그래서 진작에 싹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게 요한 한 사람 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제자들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을 반영한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면, 그 자리에는 요한 외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눅 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자기들끼리도 경쟁심을 불태웠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다 자기를 부인 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제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정작 제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제자도를 가르치셨다.
(눅 9: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눅 9: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장 작은 사람이 사실은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빽을 만들어야 한다. 빽을 만들려면? 아부를 떨어야 한다. 누구에게 아부해야 하는가?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에게 아부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나보다 약한 사람, 아랫사람에게는 아부 떨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다. 제자들이 12명 중에서 가장 큰 자가 되려면-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께 아부를 떨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뜬금없이 “나 말고, 어린 아이에게 잘해 주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이야 어린이의 인권이 많이 보호되고 있지만, 그때는 달랐다. 그 당시에 어린 아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존중 받지 못했다.
어린 아이를 대접해 줘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특히 출세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에게 잘해주라고 하신다. 무슨 뜻일까? 성공과 출세를 바라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말고, 그런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뜻이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는 말씀 속에도 동일한 의미가 담겨 있다. 만약 누군가가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뭘까? 하나 밖에 없다.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 때문에, 순전히 그 이유 하나로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자세로-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라면 제자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경계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이유에서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제자들을 위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사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자들이 미처 행하지 못한 일-제자도의 길을 이미 걷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제자도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배우게 된다. 제자도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그 이유와 목적이다, 우리는 왜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가? 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인가?
이를테면 건강관리를 위해 술을 끊고 담배를 끊듯이, 출세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굽신거리듯이,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옷 안 입고, 가고 싶은 곳 안 가듯이 그렇게 자기 절제를 하는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일까?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자기를 부인했느냐를 놓고 누가 더 큰지를 다투는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건 마치 누가 더 겸손하냐를 놓고 서로 교만을 떠는 것과 같다. 이건 기껏해야 교만하기 위한 겸손에 불과하다. 겸손이 교만의 도구로 전락하는 꼴이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게 뭔지 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게 당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제자도의 길을 걷지 못하는게 아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대로 지켜 행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신앙을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을 수단화하고 무기화 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영생과 구원을 얻는 것, 그 이상의 목적은 없다. 신앙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수단 삼에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욕심을 신앙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이다.
2.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대접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대접하지 않는 것은 철저하게 상대방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내 뜻에 따르면 허락해 주고, 내 뜻을 따르지 않으면 불허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는 자세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할 자세이다.
3.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르쳐 줄 때 힘써 배워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것만 해도 이번이 벌써 두 번째이다. 반복해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그만큼 어리석고 무지했다는 뜻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가르쳐 주는 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 아멘으로 반응하라. 설교를 통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을 때, 힘써 배우라.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절호의 기회이다.
말씀을 맺겠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제대로 된 자세로 따라는 자이다. 누가 큰 자인가? “누가 크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눅 9:48)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자세로 주님의 길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여러분들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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