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회개함으로 승리 (계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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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회개함으로 승리(요한계시록 2:12-17)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롯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으면,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그리고 난후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료에 대한 미움이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빈치는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다빈치는 즉시 그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걸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잘못된 대상을 내 마음에서 지어버리고, 용서와 사랑을 사랑하면서 그 자리에 예수님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버가모 교회
버가모는 성채, 요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버가모는 로마 총독이 주재한 도시로 아시아의 수도에 해당하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는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도서관이 있었는데, 장서 20만 권 이상을 소장했다고 합니다.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 신전, 아데나 여신, 아스클레피우스 의신 신전, 황제 숭배 등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버가모 총독에게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자들을 즉시 죽일 수 있는 사형권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3절에서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음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고 칭찬했습니다.
안디바의 충성
황제 숭배의 도시,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권좌란 사탄을 섬기는 중심지라는 말입니다. 이런 곳에서 버가모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중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있었고, 안디바는 사탄이 사는 버가모에서 죽음을 당했고, 죽음을 당할 때에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디바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안디바’ 이름의 뜻은 ‘모든 것을 대적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안비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외에 불신앙적인 일이라면 다 대적했습니다. 진리를 지켰습니다.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에 주신 메시지처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네가 생명의 관을 내게 주리라”고 하셨는데,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 성도가 바로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책망
14-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은 에베소 교회 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2:6절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은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교훈이란 무엇입니까? 성도들에게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즉,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모든 행위들입니다.
회개하라
이런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의 거짓된 교훈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와 같아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회개란 거짓 교훈의 가면을 벗깁니다. 회개란 단순하게 잘못 했구나!를 느끼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른 결과 비참해졌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어리석고, 속았다는 사실, 잘못 살았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해야 합니다.
담배 선전을 합니다. 폐암, 후두암, 설암에 대해서 경고를 합니다. 마약 중독의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나도 저렇게 죽겠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않으면 돌아서기 힘이 듭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의 고지, 내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결코 행동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습관화된 죄는 죽는 순간까지 반복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탕자의 회개
누가복음 15:17절을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때의 장면을 킹제임스 버전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And when he came to himself” 회개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아버지가 계시는 방향으로 돌아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행동을 말합니다. 전에는 마음과 몸이 세상에 있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다고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탕자에게 있어서 본래 자신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언제 자신이 가장 행복했습니까? 언제 사람답게 살았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입니다. 그때 행복했었고, 그때 사람다웠습니다. 탕자는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기뻐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렸습니다.
회개의 이유
16절을 읽어보면 왜 회개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내게(버가모교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 싸우리라고 말씀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날선 검의 주님의 직접 오셔서 교회를 정화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회개를 촉구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정화 능력이 생겨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려면 호흡을 해야 합니다. 병원의 산소 호흡기를 통해서도 호흡이 가능합니다. 산소 호흡기는 환자가 위급할 때에 필요합니다. 건강해지려면 스스로 자가 호흡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가 호흡하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회개하면 자생력이 생깁니다. 능력이 생깁니다.
좌우에 날선 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의 뜻은‘두 날 가진 검’이라는 말입니다. 비유적 표현입니다. 계시록 1:16절에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습니다.
로마 총독은 두 계층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우스 글라디이(ius gladii)라고 하는 검을 사용할 수 있는 총독과 그렇지 못한 총독입니다. 이우스 글라디아 검을 사용하는 총독은 재판권과 함께 사형권을 가지게 됨으로 사람의 생사권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재판관과 사형권은 세상 권세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사권은 세상 권세자들이 가진 생사권보다 더 강력합니다. 몸과 영혼을 지옥에까지 던져넣을 수 있는 권세입니다.
세속 감염증
칼의 효용을 생각할 때에 날선 검은 영적으로 큰 수술이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병명은 무엇입니까? 버가모 교회가 책망 받은 것,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교훈에 깊이 빠진 병입니다. 세속 감염증입니다. 세속 감염증에 걸리면 믿음이 점점 약해지고, 무능력해져서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해서 그리스도를 버리게 됩니다.
며칠전 제가 아는 분이 복강경 수술을 했습니다. 오른쪽 갈비뼈 밑이 아팠고, 심한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의사는 담낭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입원 후 수술을 했습니다. 세 군데 작은 구멍을 낸 후에 기계손을 배 속에 삽입한 다음에 오염되고, 유착이 심한 담낭을 제거했습니다. 더 큰 병이 생길 뻔했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제거되었습니다. 이 보다 큰 더 큰 수술을 하려면 더 예리하고, 강력한 수술 칼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감염시킨 감염원을 제거하기 위해서 긴급히 수술 칼을 입에 물고 왔습니다. 그 칼은 좌우에 날선 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속화된 교회, 믿음을 잃어버린 교회, 회개하지 않은 교회를 살리는 길은 대수술용 칼, 좌우에 날선 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죄로 오염된 우리의 혼, 영, 관절, 골수까지 치유하는 강력한 수술 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효용
좌우의 날선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한쪽은 생명을 살리는 치료와 보호의 기능을 합니다. 다른 한쪽은 죄와 사탄을 심판하는 권세로서 기능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칼을 가지고 세속에 감염된 교회를 치료하고, 사탄을 심판합니다.
요한계시록 19:15-16절에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기는 자가 받는 선물
1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둘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두 가지를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준다고 말씀합니다.
감추었던 만나
첫 번째 선물은 무엇입니까? 감추었던 만나입니다. 이 땅에 드러났던 만나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였습니다. 출애굽기 16:33절에 보면 항아리에 만나를 가져다가 그 속에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4절에도 만나가 항아리 속에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6:48절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와 비교하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원히 산다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의 항아리 속에 감추어 두었던 진짜 만나가 신약의 항아리,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바로 생명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게 됨으로 영생과 천국을 보장받게 됩니다.
흰 돌
또 이기는 자에게는 흰 돌을 준다고 했습니다. 당시 흰 돌이 사용된 네 가지 사례가 있었습니다. 첫째,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 표시로 흰 돌에 그 사람의 이름을 새겨 줍니다. 너는 자유인이다. 둘째,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에 배심원들이 재판 결과를 나타날 때 사용했습니다. 항아리 안에 흰 돌과 검정 돌을 넣고 흰 돌을 잡으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셋째, 연회장에 사람을 초대할 때에 흰 돌을 입장권 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넷째, 싸움에서 승리한 자에게 흰 돌에 이름을 새겨 줍니다.
정리하면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은 예수 이름으로 거듭난 성도의 새 이름입니다. 새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죄에서 자유, 무죄, 천국의 입장권, 승리자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새 이름은 받은 자 밖에 모른다고 했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신비입니다. 아버지의 믿음, 어머니의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자의 믿음으로 각 자가 상을 받게 됩니다.
회개함으로 승리
세속 감염증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반율법주의, 반도덕주의, 종교적 혼합주의, 타협주의, 이원론 영지주의,무절제주의, 무질서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회개가 최선의 치료제요 예방책입니다. 회개함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약속한 감추어 두었던 만나와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을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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