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명절 (신24: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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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명절(신24:19-22)
명절을 주일날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명절을 따라 이미 고향을 찾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절을 그렇게 반길 수 없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좋아하고 명절이면 찾아가서 따뜻한 정을 나누어 가지고 갑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민족 명절과 문화는 성경에 나와 있는 우리 기독교의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명절을 지킬 때,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감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가족이 사랑으로 결속하게 되고, 더욱 돈독한 사랑을 다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명절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녀들에게 뿌리의식과 자존감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우리 민족은 오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민족문화와 명절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잘 정리해서 지켜 나가면, 우리 민족도 세계 어느 민족 못지 않게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돌봄의 명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난하였습니다. ‘대동법’(大同法) 이라는 ‘토지개혁법’ 을 강행하였던 인조임금 때 정승 김육(金堉)이 빈부가 섞인 이상적인 마을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촌락(村落) 구조로 빈반부반(貧半富半) 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머슴을 둘 정도의 부농층이 10%, 자급자족하는 중농층이 40%, 땅 한때기 없는 품을 그날그날 팔아야 먹고 사는 영세층이 40%, 늙거나 병들거나 고아거나 과부거나 노농력이 없어 남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당장 죽는 피보호층이 10%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 사이에는 굶어 죽었다는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극심한 흉년이 와도 다같이 먹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은 5가지 아름다운 풍습이 우리 조상들에게도 있었습니다.
(1) 복곡(福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몫으로 일정량의 곡식을 내어 이곡(利穀)을 놓습니다. 그리고 그 곡식으로 마을의 빈자, 행려병자, 노약자, 병약자들에게 베풀면 그 베푼 것만큼 그 아이가 복을 받는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정말아름다운 우리조상들이었습니다.
(2) 마당쓸이
당장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마당 빗자루를 들고 새벽에 부잣집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청하지도 않은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고 집으로 가만히 돌아옵니다. 주인이 일어나 누가 쓸었는지를 조사하여 머슴으로 하여금 그 집에 며칠 먹을 양식을 보내주는 아름다운 관습이 마당쓸이입니다.
(3) 서 덤
좀 넉넉한 집은 매일 밥을 지을 때 집안식구수보다 3명쯤의 밥을 더 해 두는 습관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가난한사람이 찾아 올 것을 대비하고 사는 아름다운 습관이 서 덤 입니다.
(4) 산나물서리
옛날의 보리 고개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픔을 참아야 했습니다. 이 때 산촌의 여인들은 산나물을 한광주리 캐어 머리에 이고 잘사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장독대로 가서 그 산나물을 내려놓고 필요한 간장, 된장, 고추장등의 부식을 말도 없이 퍼갔던 습관입니다. 그래도 그를 도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5) 내장나누기
명절 때면 마을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돼지나 소를 공동으로 잡아 나누었습니다. 이 때 살 고기는 나누어 가지지만...내장은 마을의 가난한 노인 고아들에게 나누어 주어 온 마을이 명절을 지냈습니다.
이 같은 아름다운 풍습이 일찍이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도 이러한 제도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즉 돌봄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서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을 돌봄의 명절로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남겨두어야 합니다.(19-21)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사실상 이 지구상에는 언제나 돌보아 주어야 할 대상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진자는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주며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똑같이 선행을 해도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는 그 선행으로 자신이 무엇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선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또는 부정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보상심리로 선행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선행을 하는 사람들마다 그 동기와 목적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 동기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 돕고 섬기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갚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두 큰 계명을 첫째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얼마나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중심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사실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 쓰라고 주신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활용하도록 맡기신 것이고,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내 것처럼 생각해버립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자기 집을 위해 쓰는 데는 아낌없이 쓰면서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달라고 하시면 아까워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얻은 소득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늘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종류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신명기 14장22절 이하에 보면 "매년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소득을 얻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내용의 십일조입니다.
이 십일조를 드리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소득과 물질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써야 하는 청지기임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십일조는 구제의 십일조입니다.
신명기14장28-29절에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라"고 말씀합니다. 매년 드리는 '소득의 십일조' 말고, 3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구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 구제의 십일조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쓰여 집니다. 29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분깃이나 기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농지가 없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지을 땅이 없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바로 그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을 형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임져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지칭되는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인간적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 수 있도록 땅의 소출 가운데 일부를 남겨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해도 그만이고 하지 않아도 그만인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사실 명령은 복종밖에 없습니다. 권면이 아닙니다. 권유가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갖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바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함께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고는 아무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를 외쳐 부르짖고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성장은 이루었지만 사회와의 교감은 부족하다는 평을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 속으로 좀 더 깊고 힘 있게 파고들어야 할 때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보다 더 많이 사회를 향하여, 즉 어려운 이웃을 향하여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내가 누릴 것 다 누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앙의 삶은 어렵습니다. 우리도 밭이나 과일 나무에서 얼마를 남겨 두었듯이 우리의 소유의 일부, 아니 소득의 일부를 떼어내는 아픔을 동반할 때에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신앙의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남겨두시기를 바랍니다.
2.복을 받는 일입니다.(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모든 사람들은 복 받기를 다 좋아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것은 사랑받고 복 받는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내리막길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 살려고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일에 공연한 수고와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났다가 갈 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일생이라고 합니다. 일생동안 어떻게 살던지 자유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일생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며 복 받아 성공적인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성공적인 삶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 받는 삶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복 받는 믿음으로 복을 많이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물질적인 축복받지 못하면 비참하고 신앙의 상처가 되며 넘어지거나 낙심합니다. 건강의 복을 받지 못하면 사람구실, 성도구실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의 것, 재능, 지혜, 지식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 주시는 복을 받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 받는 일에는 양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형제에게 양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을 받아야 돌보아 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잘못된 길로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을지라도 다시금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이 말씀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참 소망을 주는 귀한 약속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복 받는 삶을 어렵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되고, 얼마든지 가능한 일 속에 하나님은 복을 담아 두셨습니다. 더불어 어떻게 하면 그 복을 다 놓치게 되는가도 경고를 덧붙여 두셨습니다.
그와 관련된 대표적인 기록이 신명기 28장이나 레위기 26장입니다. 그 성경에 나타나는 복과 저주를 갈라놓는 대표적인 단어는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도 삶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은 중요한 단어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반드시 준행되어야 합니다. 복은 염원한다고 우리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복을 찾아서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복으로 안내해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 생활의 결과가 하나님이 보장하신 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집 없는 사람, 아버지 없는 자녀, 남편 없는 여인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되었을 때, 그리고 나그네 되었을 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여 택하셨으니 그들도 나그네 된 사람, 고아와 과부처럼 약한 사람들을 변호해주고 사랑하며 조건 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날은 사람들이 이전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회는 더 각박하고, 정이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눔의 정신이 점점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들을 향한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서론에서 말씀을 하였듯이 우리 조상들은 이웃들과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미풍양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잔치를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기뻐했습니다. 애경사가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함께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면 음식을 주고, 의복을 나누었습니다. 심지어 새나 짐승까지도 배려하였습니다. 감을 따도 까치밥을 남겨 두었습니다. 콩을 심어도 넉넉하게 심어서 땅속의 벌레도 먹고, 공중의 새도 먹고, 그리고 나머지를 사람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삶은 이웃들을 향한 배려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이 점점 메마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남의 손에 있는 다른 것을 보고 부러워합니다. 우리 안에 나누고, 베풀기를 싫어하는 이기심이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적입니다.
사도행전 20장35절에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성도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실천할 때 복이 오는 것입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내 것을 가지고 나눌 때 하나님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돕는 것은 자기가 복을 받는 일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란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이는 범사에 형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복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난과 궁핍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의 명령입니다.(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명하노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본질을 말한 것입니다.
'종'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재물을 얼마나 소유를 하고 살아가게 되든 상관없이 그들의 본질은 종입니다. 만약 그들이 '종'이라고 하는 본질에서 떠날 때 그들 가운데 종과 같이 눌리고 무시 받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종은 약자입니다. 압제 당하는 자입니다. 고통 속에서 사는 자이고 세상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삶을 불행으로 여깁니다. 약자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약자의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을 때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 나오는 약자, 즉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본모습이 바로 그와 같았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기 힘 포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읽어보면 애굽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하여 가다가 그들 앞에 조 그만한 어려움만 만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셨던 놀라우신 구원의 능력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또 기적을 베푸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살던 때를 기억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러워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과 불평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잘못을 깨우치는데 광야40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에 살던 때를 그리워하거나 그때 일을 기억하고 그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일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려면 신앙의 바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처지, 어떤 환경에 처해있다 해도 우리는 창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좋게 인도해 주시리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안 된다, 절대로 안되지! 하는 부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고는 바로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성도란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절대로 부정적인 사고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또한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권사님이나 집사님 들은 먼저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보기에 좋게 상황을 만들어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억하고 절대 의지해야 할 하나님은 바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즉 애굽의 노예 생활을 기억함으로 그 감격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아주 아름답고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밭에 곡식을 벨 때에 이삭을 남겨 놓아라. 만일 거기에 한 단을 놓고 돌아왔거든 도로 가서 가져올 생각을 말아라. 배고픈 나그네를 위하여 버려 두어라. 감람나무 열매를 딸 때, 포도를 딸 때에도 말끔히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남겨 두어라."
이것은 너희가 애굽에서 종이었지 않느냐? 너희가 남의 상에서 얻어먹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너희도 남겨 다른 사람들이 그 남은 것으로 배를 부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어먹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얻어먹는 사람들에게 후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남에게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이제 너는 남을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억할 때 하나님 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기억할 때 이웃을 바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아니할 때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곧 섬김의 삶입니다.
섬기는 삶은 연약한 자에게 손을 내밀어 힘과 용기를 주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소망을 불어 넣습니다. 탄식하는 자에게 새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리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며, 함께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섬기는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바로 ‘나눔’입니다. 섬김은 언제나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눔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가장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던지심으로 우리에게 최고의 섬김을 보여 주십니다. 생명의 나눔, 그것이 바로 최고의 섬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존재보다는 소유의 가치에 집착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쌓아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강조합니다. “주라, 나누라, 베풀라, 섬기라, 봉사하라, 구제하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라고 명하십니다.
나눔은 모든 행복의 근원입니다. 재물을 나누는 것은 조금 나누는 것이고, 지혜를 나누는 것은 많이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모두 다 나누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가지고 만 있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나누어 줄 때 느낍니다.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맞이한 설 명절이 약한자를 돌보는 보람된 명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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