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사람이 되자 (행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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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사람이 되자 (행4:1-22)
비범한 사람이 되자
(행4:1-22)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1.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동쪽 미문(the Beautiful Gate)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이 미문 앞에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서 날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성전 문 앞으로 운반되었습니다. 구걸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미문에 옮겨다 놓은 것입니다. 그곳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들로부터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관습(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따라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길에 바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유는 그 시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따라 베드로와 요한은 늘상 보던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며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함께 하시던 성령께서 특별히 감동케 하셔서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의 감동에 따라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며, “우리를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단지 돈 몇 푼만을 적선해주기를 바랄뿐이었는데 왠 두 사람이 갑자기 자기를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하자 얼떨결에 평상시보다 뭔가 대단한 것, 아니면 더 많은 돈을 얻는가 보다 생각하여 집중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말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이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걷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정상인이 된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완전히 정상인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걷고 뛰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좋았겠습니까? 성전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 늘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았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는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앉은뱅이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순간 그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겨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성령의 역사가 그 앉은뱅이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40년 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된 이 사람은 그 뒤로 계속해서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행3:16)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에서 완전하게 고침받은 이 사람이,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리마다 항상 함께 해서 그 증인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들이 성전 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아주 멀쩡해져 사도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2. 이렇게 성전 한 가운데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예수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보고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갔습니다. 이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가 성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현장에 나타나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사람들로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허가를 받아야 마땅한데도, 이들 사도들이 그러한 허가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은 불법이라며 사도들을 체포해간 것입니다. 여기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는 성전관리책임자로 대제사장의 오른 팔이며 참모장이요 총 관리인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사도들을 체포하러 왔던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의 특징은 부자이며 귀족이었습니다. 수(數)로는 많지 않았지만 영향력이 대단히 컸던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이 바로 이들 사두개인들의 비위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사두개인들은 영(靈)의 존재나 내세(來世), 천사의 존재,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이들 사두개인들은 부자 귀족이었기에 자연히 친(親)로마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부와 안위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현상유지에 역행하는 소요(騷擾)사태였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식민지에 대하여 관용적이었지만, 군중의 소요사태에 대하여는 무자비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민중의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되면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소요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세력에 대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 정부와의 협력하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것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체포하여 제거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즉각적으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처음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들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도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획적으로 음모 선동을 통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계속해서 증거한다면, 자신들의 위치와 기득권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은 뻔하기 때문에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이들을 체포한 것입니다. 두 사도를 체포한 이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날이 저물자, 해가 지면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을 못하게 되어있는 유대 랍비 법에 따라 재판에 회부(回附)하지도 않고 감금시켜 놓았습니다. 이들 두 사도가 이렇게 체포되어 구금되었지만, 사도들의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이를 믿는 사람들이 남자 어른만 무려 오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전도에 대한 박해와 핍박이 시작되었지만, 복음 증거는 꺾이지 않고 날로 확장되어가고 있었습니다.
3. 베드로와 요한이 구금된 이튿날, 사도들을 심문하고 재판하기 위해 유대 최고의 의회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과 대제사장과 그의 문중들, 장로와 서기관 등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을 총망라해서 모였습니다. 이들이 사도들에게 던진 첫 번째 심문한 말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대부분이 학벌이나 문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갈릴리 해변의 어부들, 다시 말해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경멸조로 심문을 시작한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는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온전하게 고쳤다는데,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통한 악령의 힘을 이용해서 그러한 이적을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들 사도가 악령의 힘으로 그 사람을 고쳤다면 유대 종교법에 위법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심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는 말을 바꿔 말하면, ‘너희가 행한 이적은 마귀의 권세, 마귀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이름”은 이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 아주 지독한 불경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 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신성을 모독하는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간교한 질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문제삼은 것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낫게 된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 일을 행했던 방법과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일을 행한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시비하며 파헤치는 것은 시기심이 가득한 교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 유지를 지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한 죄를 범한 죄인으로 몰아, 로마 당국에 고발하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다시 퍼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따를 것이라는 두려움도 깔려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의 흉악한 흉계와 음모를 알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증거합니다. 본문 8-12절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온전하게 고침받게 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하게 고침받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이같은 증언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셈인 것입니다.” 는 말씀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라고 따졌을 때, 이같은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 어떤 집주인이 있었는데 그가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에,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의 종들을 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바깥으로 쫓아내어 죽였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저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그에게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스러질 것이요, 이 돌이 어떤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시118:22) (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거역하는 자들은 떨어지는 바위 밑에 있는 항아리가 깨지듯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채고,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군중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21:42-46)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구약성경을 자유롭게, 그리고 정확하게 인용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행하셨던 말씀들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거침없이 증거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듣고 난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놀라움과 유규무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4:13-14)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예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트집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 이들의 담대한 증언에 압도되어,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사도들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도들이었으나, 성경에 대한 정통하고 능숙한 사도들의 논증은 가히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아연 실색케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학문이 없다”는 말은 율법의 복잡한 규례와 궤변술의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범인(凡人)”이란 말은, 특별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이, 보통 이하의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산헤드린은 베드로와 요한을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문가도 아닌 한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범인, 凡人)이 소위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변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보혜사(변호사)가 되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학문적 조예나 직업적 지위를 압도하는 영적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산헤드린이 해야만 하는 일은 사도들의 증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협박과 공갈로 사도들을 위협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진리의 영,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자 그들은 달리 반박할 근거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제자들에게 두드러진 점은, 진리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받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主)님으로 고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진리의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때는 어려운 상황이 되면 비겁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진리를 깨닫고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그 진리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 학식이 없어 할 수 없다는 핑계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충만하여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비범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그 진리대로 살고자하는 자에게 세상의 위협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8-9)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므로 용기있고 비범한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믿음의 위인들을 가리켜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비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진리의 영, 성령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여 비범해진 사도들의 신앙고백적인 설교에 기가 죽은 산헤드린은 “나가라!” 라고 명령한 뒤에 저희들끼리 서로 갑론을박(甲論乙駁) 논의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어 그저 사도들을 협박해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의회에서 나가게 한 뒤에, 서로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합시다.” 며 별다른 뾰족한 대책이나 없이 그 두 사도들에게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심문을 마쳤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 하자,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백성이 모두 그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할 방도가 없어서, 다시 위협만 하고서 놓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도들의 단호한 태도는 실로 담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기적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히11:38)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말에서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겠다는 말로 유대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권위가, 오히려 불법을 행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담대한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하나님과 진리보다는 자기들의 교권 유지를 위해 대중을 더 무서워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임을 확실하게 백성들에게 증거한 통쾌한 증거였습니다.
산헤드린의 협박이 사도들을 회유(回遊)하기에 너무나 무력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순간적이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이 영원한 것임을 사도들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인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선택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웰스(H.G.Wells)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이웃 사람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 것이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실로 사람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인 죤 녹스는 “하나님을 극진히 두려워 했기 때문에 아무 사람의 얼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감추어져있는 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바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음성만이 크게 들리는 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범한 사람의 비범한 삶은 성령이 충만하여 세상에 대하여는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분의 음성이 항상 크게 들려지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한 마디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들의 용기와 담대함, 그리고 그 비범함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진정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삶 속에서는 무한한 용기와 담대함이 솟아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는 예수님의 원리를 철저히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자들에게는 “자기”란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 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한 때 자기 판단으로도 정말 형편없는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 도중 말을 더듬었을 뿐만 아니라 어찌나 허둥대었든지, 끝나고나니 이 설교는 완전히 실패였다는 좌절감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니 그 형편없던 설교를 축복하소서.” 그리고 그 주 내내 그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다 말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결심하기를, 다음 주일에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설교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리라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확실히 그 다음 주일 설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설교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흐뭇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 밤만큼은 어린 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설교의 결과는?”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설교는 마흔 한 명의 회심자를 낸 반면 그 위대한 설교는 단 하나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스펄젼 목사의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형편없었던 설교는 들어 쓰셨으나 그 훌륭한 설교는 버리셨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없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Christian Digest) 성도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충만하시므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비범한 능력과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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