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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없어서 그리로 가느냐 (왕하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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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없어서 그리로 가느냐 (왕하1:1-4)




모든 사람에게는 양면성이 있다.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고, 선과 악, 공과 과가 공존한다.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좋거나 완전히 나쁘지 않다. 국가 지도자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저마다 공과 과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공이 더 큰 지도자가 있는 반면에 과가 더 큰 지도자가 있는게 사실이다.


 


국가 지도자 중에서 공이 현격하게 더 큰 사람을 흔히 성군이라고 한다. 반대로 과가 현저한 사람을 폭군이라고 한다. 물론 폭군의 사전적인 정의는 “사납고 악한 임금”이다. 쉽게 말해서 공포 정치를 펼치는 폭력적인 왕이다. 하지만 비록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금의 핵심 역할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의 삶을 평안케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에, 공보다 과가 많은 임금은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폭군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초대 왕 사울의 즉위를 시작으로 왕정 시대를 열었다. 제 2대 왕 다윗 시대에는 통일 왕국을 이루었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풍요와 번성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때는 그야 말로 모든 면에서 승승장구였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높이 오를수록 그만큼 추락할 위험성도 커지기 마련이다.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위태위태하고 불안 불안했다. 그러다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부터 급격하게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한다.


 



 


사울부터 솔로몬까지는 그래도 과보다는 공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편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울의 모습은 과가 많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과에 치우친 왕은 아니었다. 사울은 초대 왕 치고는 통치를 썩 잘했다. 국내 정세도 상당 부분 정돈했고, 외세의 침략도 제법 잘 막아냈다(삼상14:47,52).


 


다윗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공이 큰 왕이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범을 보였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셨겠는가?(행13:2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을 후대의 모든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으셨다. 다윗처럼 하면 잘했다고 칭찬 받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전치 못하다’는 책망을 받았다(왕하22:2. 왕상15:3).


 


이처럼 다윗은 여러 방면에서 공을 세우고 모범을 보인 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다윗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질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밧세바 사건과 인구조사 사건이다. 이때 하나님은 다윗을 호되게 꾸짖으셨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통치 초반에 해당되는 일이고, 통치기간 전체를 놓고 보면 ‘지혜의 왕’이라는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의 통치는 후반부로 갈수록 공보다 과를 더 많이 저질렀다. 어리석게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했다. 지혜의 왕이 어리석은 왕으로 몰락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무시 할 수 없는 공을 세운 왕이었다.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었고, 영토를 확장했고, 부국강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울부터 솔로몬은 과도 있었지만 엄연히 공이 있었다.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은 과가 압도적으로 컸다. 그래서 사실상 공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르호보암 통치 시대에 나라가 남과 북으로 두 동강나기 때문이다. 북쪽 지역을 북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 지역을 남유다라고 하는데, 이때부터 이스라엘 역사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개의 분열국가로 기록된다. 그래서 이 시기를 분열왕국 시대라고 부른다.


 


나라가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당연히 왕도 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했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초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 후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왕들이 등극과 폐위를 반복했다. 그나마 남유다의 왕들은 다윗의 계보를 잇는다는 정통성도 있었고, 통치 기간도 안정적이었고, 개 중에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왕도 있었다(왕상15:11-13). 그러니까 명백한 공이 있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야심가들의 음모와 배신으로 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그만큼 통치 기간도 짧았다. 그리고 왕권이 바뀔 때 마다 왕들의 상태는 악화일로를 거듭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왕상15:26,34, 16:19,25). 그 중에서도 절정은 아합 왕이었다. 아합은 그야말로 폭군 중에 폭군이었다. 신앙적으로 악하기 짝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폭정을 일삼았다.


 


엘리야가 맞서 싸웠던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는 아합이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여기에 더해서 고작 포도원 하나 차지하려고 무고한 사람(나봇)을 음해한 사건만 봐도 아합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아합은 전무후무한 폭군이었다. 다윗이 성군의 기준이었다면, 아합은 폭군의 기준이었다. 어떤 왕이든 아합처럼 하면 하나님께 “악하다”는 책망을 받았다.


 


(왕하8:18) 그가...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아합은 폭군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아합의 통치 기간 동안 백성들은 숱한 전쟁과(왕상20:1) 끝없는 건설노역과(왕상22:39)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에 시달렸다(왕상17:1,18:1).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우상숭배로 들끓었다. 이 모든게 아합이 저질러 놓은 참상이었다. 아합의 폭정이 계속되는 한 백성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져 갈 것이고 신앙상태는 더욱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아합의 권세 역시 영원하지 못했다. 아합은 아람과 전쟁을 치르던 중에 허망하게 전사하고 만다.


 


(왕상 22:34-35)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왕상 22: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폭군의 기준이자 대명사였던 아합 왕이 죽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까? 어떤 왕이 그 자리를 대신할까? 지난날의 과오를 딛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까? 아니면 여전히 악화일로를 계속하게 될까? 열왕기하는 바로 이 전환의 기로에서 시작된다.


 


 


아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른다.


 


(왕상 22:51)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아하시야의 통치 기간은 엄청나게 짧았다. 겨우 2년이다. 왕정 시대에 통치 기간이 짧은 경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선왕의 통치 기간이 너무 길어서 애초에 늦은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경우


둘째, 반란이 일어나서 왕권을 찬탈 당한 경우


셋째, 질병이나 기타 사건 사고로 요절한 경우.


 


아하시야는 이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왕하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불행은 혼자 오지 않고 쌍으로 온다”더니 왕이 크게 다친 것만 해도 큰일인데, 그보다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합이 죽자 그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던 모압이 북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이다.


 


(왕하 1: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모압의 배반과 심각한 부상. 둘 중에 어떤 문제가 더 급선무일까?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아하시야의 통치 기간이 고작 2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모압의 배신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2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아하시야 정국이 자리 잡기도 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하시야는 모압의 배반을 신하들에게 맡기고 치료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전쟁터로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하면 아버지처럼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아하시야로서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이렇게 개인이나 국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당시는 제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신에게 뜻을 묻곤 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각자 신봉하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뜻을 구했다. 아하시야의 경우를 예로 들면 모압의 배반을 어떻게 다루야 할지, 전면전을 펼쳐야 할지 아니면 다시 한 번 우호적으로 접근해야 할지, 질병이 언제쯤 나을지, 만약 낫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신에게 물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답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물을 것이냐이다. 내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가까운 사람에 묻든지, 그 문제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에게 묻든지, 아니면 내 문제를 가뿐하게 해결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묻든지, 아무튼 적합한 대상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부적절한 상대에게 답을 구한다면 그건 단순히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하는 헛수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 답을 내려 줄 수 있는 합당한 대상에게 심각한 결례를 범하는 일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다.


 


어떤 학생이 수학 수업 중에 모르는 문제가 나왔다. 그런데 그걸 수학 선생님께 묻지 않고 굳이 국어 선생님을 찾아가서 묻는다면 이건 수학 선생님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수학 선생님으로서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어떤 부인이 가정의 대소사를 남편과 의논하지 않고 외간 남자와 긴밀하게 상의한다면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남편으로서는 불쾌함을 넘어 분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하시야는 누구에게 답을 구했어야 할까? 국가 원로들에게 물어야 할까?? 가족들과 상의해야 할까? 아니면 주변 국가의 왕들에게 의뢰해야 할까?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아하시야가 의지해야 할 적합한 대상은 오직 한분, 하나님 밖에 없다. 아하시야는 당면한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아하시야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엉뚱한 곳-정확하게 말하면 너무나도 부적절한 곳에서 답을 구했다.


 


(왕하1:1-2)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아하시야는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세붑을 찾았다. 바알세불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신으로, “파리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바알세붑이 어떤 존재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블레셋 사람이 섬기는 신이든, 모압이 섬기는 신이든, 파리의 주인이든, 모기의 주인이든, 심지어 진짜 신(神)인지, 가짜 신(神)인지도 크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아하시야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마치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하시야는 우상숭배자였다.


 


사실 아하시야가 바알을 의지한 것은 이번 한번 만이 아니었다. 만약 이번에만 이례적으로 그랬다면 ‘우상숭배를 저질렀다’고 하지, ‘우상숭배자’였다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 수학여행 때 사찰 몇 번 방문해 봤다고 해서 불교 신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사람을 불교 신자라고 하는가? 수시로 절에 드나드는 사람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불자’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하시야는 그저 단순히 우상숭배를 저지른게 아니라, 철저하게 우상숭배자였다. 그렇다. 아하시야는 어쩌다 한번 실수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바알을 찾은게 아니었다. 아하시야에게는 이게 일상이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하시야는 일생동안 바알을 의지했다. 그러다보니 위기의 순간에도 늘 하던 대로 바알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열왕기서는 아하시야를 ‘아합의 길- 죄악 되고 미련한 멸망의 길’로 걸어간 자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왕상 22:51-53)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아하시야의 문제는 난간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친게 아니었다. 모압의 배반도 아니었다. 아하시야의 근본적인 문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었다. 아하시야를 추락시킨 것은 다락 난간이 아니라, 불신앙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불신앙을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왕하 1:2-4)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왕하 1:17)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서두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고, 모든 통치자들에게는 공과 과가 있다. 다윗에게도 과가 있었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아합이라고 해서 왜 공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공은 높이 평가해 주셨지만, 아합의 과에 대해서는 처절하리만큼 철저하게 드러내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지만, 아합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멀리 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다윗의 가장 큰 업적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긴 것이었고, 아합의 가장 큰 과오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준으로 왕들을 평가하셨는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능력이나 외모, 성격, 이런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진작부터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신앙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고, 인간 왕은 대리 통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대리’ 하는 사람이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일을 맡긴 사람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리 통치자인 인간 왕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통치를 맡기신 분-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충성스럽게 따르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신앙’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들을 평가할 때 신앙을 기준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아하시야는 낙제점이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고,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게 자명한 바로 그 순간에도 우상을 의지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의지했던 우상은 허상에 불과하다. 우상은 아하시야의 질문을 들을 수도 없고, 답할 수도 없다. 당연히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할 수가 없다. 딱 잘라 말해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우상을 의지했으니 결과는 뻔한 것 아니겠는가? 아하시야는 끝내 병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왕하 1: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생을 우상숭배자로 살아온 아하시야를 벌하셨다.


 


둘째는 아하시야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하시야는 아무것도 아닌 우상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이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한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아하시야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었다. 하나님은 그저 아하시야의 선택을 존중해주셨을 뿐이다(민14:28-30, 롬1:26).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다. 아하시야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중차대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모압의 배반을 처리하기에는 몸이 성치 않았고, 치유에 전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아하시야는 바알세붑을 의지했다. 그에게 하나님은 없는 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하시야가 그토록 의지했던 바알세붑은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그토록 무시하고 외면했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주관하셨다. 아하시야의 가장 큰 문제는 모압의 배반이 아니었다. 난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가장 의지하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들고 찾아간다. 여러분은 누구를 가장 먼저 찾아가는가? 누구에게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가? 혹시 아하시야처럼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찾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왕하 1:3)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하나님이 없어서 그리로 가느냐?” 모압이 배반하든, 난간에서 떨어지든, 코로나가 창궐하든, 시험에 떨어지고 취업에 실패하고 사업이 어려워지고 관계가 깨어지고 인생에 어떤 문제가 들이닥치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 물으러 가길 바란다. 그러면 하님께서 친히 응답해 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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