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눈물이 흐르는 사람들 (막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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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눈물이 흐르는 사람들 (막 14:10-31)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문제가 끝없이 존재합니다.
어느 순간에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나서 이제 끝났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로 고민하는 문제의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고통 보다 더욱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며, 또한 그 어떤 문제에 대한 대안이나 해결책이 없이 문제 자체 때문에 감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이 안타깝고 심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기초 지식을 먼저 정의한다면 사람들이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원인제공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가장 빠르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문제의 경우도 특징이 있습니다.
신자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거의 다 궁극적으로 신앙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가정문제, 자녀문제, 경제문제, 건강문제, 직장문제 등 신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은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영적인 질서가 파괴되어 있을 때 찾아오는 결과적인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교회와의 관계, 영적인 관계 때문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두 사람을 비교하며 정확하게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혹 어떤 문제로 시달리거나 문제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는 분들의 신앙을 카운슬링(counselling)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두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롯 사람 유다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오늘은 다른 각도에서 관찰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팔아먹은 사람이나 잔인하고 부도덕한 사람, 자기욕망에 노예가 된 사람, 돈에 미쳐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던 습관적 해석법에서 벗어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생각하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대단한 신임을 받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수의 사역 스탭(staff) 중의 제자들 가운데 경제를 담당하는 재정 책임자로 임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성실성과 공신력은 대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가롯 유다는 정의감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만찬을 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에 담긴 값진 나드 향유를 갖고 와서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가롯 유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300 데나리온 정도로 넉넉히 받을 수 있는 기름을 팔아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그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고, 성실하고, 정의감도 있었던 가롯 유다가 왜 그렇게 큰 실수를 저질렀고 마지막은 자살로 인생을 마쳐야 했느냐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니 자주 실수하고 문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큰 충격의 표본이라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와 같은 제자가 나중에 잘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면 훨씬 위로를 받게 되고 그의 증상과 같이 돈 문제로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돈을 Handling 하는 사람들에게 모델이 될 것인데 불행하리 만큼 그의 종말과 죽음은 처참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에 대해 이런 동정론을 펼 수 있습니다.
유별나게 못된 사람이라든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그의 최후 고통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지만 사실 가롯 유다는 별로 잘못된 제자로서 낙인이 찍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과가 나쁘니 무조건 나쁘다고 과정을 무시한 체 판단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롯 유다가 잘한 사람이라는 극찬론을 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왜 닮지 말아야할 인물로 성경은 소개하고 있는지를 보다 더 선명하게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가롯 유다의 결과인 자살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가 나쁘게되는 과정과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드러내 봄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가 가롯 유다의 잘못을 판단하는 방법도 좋겠지만 보다 객관적인 주님의 말씀을 추적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6:63-34을 보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다시 요한복음 6:70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가롯 유다가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의 문제’입니다.
가롯 유다가 망가지는 원인을 생명의 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말씀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생명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아는 것처럼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이렇게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의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예수가 죽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몸은 살아있지만 그의 영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주님의 말씀이 그 영이 죽은 것은 물론 그는 마귀라는 것이 두 번째 말씀입니다.
좀더 가롯 유다를 추적해 보십시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 다녔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었던 제자입니다.
그는 많은 시간을 예수의 전도여행에 동참했고 종교적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산상집회에도 참석했고 병이 낫는 곳이든지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영은 세상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인 본질에 변화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나 교회 일에 따라 다니는 것이 나의 영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 6:70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 중의 한사람은 마귀니라.”
이 말씀보다 더 끔찍한 말이 또 있습니까?
그러므로 가롯 유다는 잘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을 받았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고 그는 애초부터 중생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거듭남이나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교회에 나오고 뭔가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 일을 하는 정도로 예수를 믿는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영인가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영이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지금 내 중심에 예수께서 좌정하고 계신지를 보십시오.
당신의 영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직도 당신은 세상 사람입니다.
예수를 따라 다니는 것과 영이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시험들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지는 못합니다만 마귀입니다.
때문에 가롯 유다는 이미 사탄의 지배를 받고, 육체에 이끌려 살 수 밖에 없었고, 세상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는 끝내 죄를 저지르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주님께 호소할 마음도 없었고, 사탄을 내몰아내는 탄원적기도도 없이 결국 자기의 길만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고, 주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죄를 미워하게 되어있고, 죄에 대한 애통의 마음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성실하고, 정의감도 있고, 믿을만하고, 책임감이 있다하더라고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거나 주의 영이 없다면 그는 여전히 사탄이요, 마귀요, 죄의 종일뿐입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고 육체적 본능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면을 쓰고 살뿐 언젠가는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타락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경고성 메시지를 하신 것입니다.
지금 나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보십시오.
나의 신앙상태를 시험해 보십시오.
왜 내가 넘어지고 세상적인 생각들이 온통 나를 휘감고 있는지 바라보십시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든지 주님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은 죄를 멀리하며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영이 살아있으면 죄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 주를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가롯 유다가 이 믿음, 이 절대적 신앙원리, 이 믿음의 본질을 고민하기 시작했더라면 그 고민은 유다의 생을 다르게 인도했을 것이며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방 들고 학교만 가는 친구이지 무엇인가를 깨닫고 모르는 것을 알려는 자신의 영을 소생시키기 위한 애절함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가롯 유다가 완악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자리, 자신의 영을 점검하는 확인의 자리,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자신을 주께 비추어보는 자기 깨어짐의 자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다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회개의 영도 없습니다.
이것이 큰 아픔입니다.
그리고 가롯 유다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체질입니다.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 중에 나를 팔자가 있다고 말씀 하실 때 가롯 유다는 서슴없이 끔찍하게도 나 입니까하며 자기를 드러 내며 아닌척하는 위선을 보게 됩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나타내는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앞세우는 자는 용서를 빌거나 애통해 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는 하나님 앞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회개할 기회가 세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까지 포기했습니다.
요한복음 13:26의 최후의 만찬석상에서.....그 떡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었더라(요 13:30). 그 떡 조각을 받아먹은 가롯 유다의 쓸쓸한 장면을 봅니다.
그는 엎드리지 못했습니다.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22:47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예수님의 얼굴에 입맞출 때, “유다야 네가 입맞춤함으로 인자를 파느냐” 고 물으실 때 선생님하고 엎드릴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마태복음 27:1-6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로 결정된 이후.....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도로 갖다 주며 성소에 던져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후회하고 뉘우쳤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가롯 유다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며 통곡하며 쓰러질 일입니까?
살 수 있는 길이 있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했습니다.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가롯 유다를 닮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가롯 유다를 보면서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2의 바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이제라도 주님을 받아들이며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데 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가롯 유다와 반대되는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같은 제자 베드로입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방황하는 신앙, 다혈질 성품, 즉흥적이고 비논리적인 사람으로 종합적인 기질 테스트나 성품 검사를 하면 가롯 유다보다 훨씬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앙고백도 하고 예수님도 열심히 따라다녔지만 그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란 말까지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최후는 가롯 유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0절).
예수께서 심문 당하는 가야바의 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비겁하게 서 있는 베드로, 마침 집안에 들어섰을 때 어떤 여종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 아니요! 그때 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세 번씩이나 그리스도를 배신합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양심을 찌르는 뇌성, 영혼을 찢는 닭 울음소리에 자극이 되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나 밖으로 뛰쳐나가 한없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닭 울음소리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마음을 가르는 천둥소리였습니다. 가슴을 찢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은 닭 울음소리가 아니라 자연의 소리나 세미한 소리가 들려도 마음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는 나약한 자기존재를 알면서 우둔한 자신을 보면서 그 소리에 눈물을 흘렸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외면한 지난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나! 당신의 십자가를 외면했던 못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참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베드로에게는 새 출발의 날이었고 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는 날이었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향해 새로운 발을 내딛는 제2의 주님의 제자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살아온 지난날을 깊이 깨닫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서 통곡하는 베드로를 주님은 아셨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누가복음 22:61은 증언해 주고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을 보고 계셨으며 어떻게 행동할지 끝까지 눈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닭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을 찢는 제자의 모습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가롯 유다처럼 돌려줄 돈도 없었고, 만나야할 대제사장이나 원로들도 없었고, 자기 목숨을 끊을만한 강인함은 없었지만 그에게 있는 오직 하나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였습니다.
자신을 알고, 말씀 앞에 굴복하고, 통곡하며, 참회할 줄 아는 사람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욥기 16:20에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던 욥을 하나님은 아셨고, 시편 6:6에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고, 시편 56:8에 나의 눈물을 병에 담으소서라고 고백했던 다윗을 하나님은 사용하셨고, 예레미야 9:1에 내 눈은 눈물 근원이라고 고백한 예레미야를 쓰셨고, 누가복음 7:38에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여인을 기념하셨고 눈물로 기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참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복입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신자가 사랑 받는 신자입니다.
산상수훈 중에서도 주께서 말씀하시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마 5:4).
지난 일 년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이제는 원망도, 후회도, 불평도, 아파하지도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지난날의 나의 나됨을 다시 점검하고 주의 말씀에서 멀어졌었고, 내 멋대로 살아오고, 정욕으로 살아왔고, 죄와 함께 했던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참회하는 곳에 주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 병이 마른 사람인지 모릅니다.
참회하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 완악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은 눈물을 흘려보십시오.
당신의 눈물 병의 눈금만큼 주님을 사로잡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눈물 병에 채워진 눈물만큼 주께 사랑을 받게 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유형뿐이 없습니다.
가롯 유다처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며 마지막 비극으로 끝나는 사람과 베드로처럼 비록 실수도하고 잘못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의 영이 살아있어 참회하고 돌아서서 주를 위해 생을 살아가는 축복된 인생으로 끝내는 사람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가롯 유다의 유전인자를 받은 사람인가요?
아니면 베드로의 유전인자를 받은 사람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모습을 알고 깊은 회개 속에서 새날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고백이 담기고, 주를 위해 살겠다는 각오가 담긴 눈물을 흘려보지 않겠습니까? 눈물을 흘리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서 말입니다. 비록 눈물이 얼굴에는 흐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심이 울고, 이성이 울고, 영이 울 수 있는 참된 회개가 있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계시록에 있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4-5).
새롭게 새로운 날을 향해서 달려갑시다.
눈물을 씻겨 주시는 주님 앞에 서십시오.
지난 일을 잊으십시오. 앞으로 하나님이 베푸실 축복을 바라보십시오. 참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가십시오.
지금은 우리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하면 지난날의 예수를 부인한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실수한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죄가 나를 붙잡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쓰실 것입니다.
지난날은 참회하고 새날에 대해 희망을 갖고 준비합시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종들이 됩시다.
그리고 주님과 나만이 아는 그 깊은 고백이 담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감격하여 우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그날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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