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수 있음이 최고의 복입니다. (삿15:14-20)
본문
기도할 수 있음이 최고의 복입니다./삿15:14-20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광야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야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야곱은 그 인생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이 큰 은혜 때, 그 때가 야곱이 광야에 홀로 던져진 비참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피난 길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야하는 초라한 상황,
자기가 그렇게 아끼던 가축들과 가족들은 다 강을 건너게 했지만
정작 자신은 죽음이 두려워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비겁하게 홀로 남아 있는 상황,
딸이 당한 성폭행에 대한 보복으로 아들들이 일으킨 최초의 집단 살인사건은
온 가족을 몰살 위기에 처하게 한 상황 등이 그랬습니다.
야곱에게 이런 광야의 시간들이 영적인 눈을 열고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널드 맥컬로우는 [광야를 지나는 법]이란 책에서
오스왈드 챔프스의 말을 인용하여 참 의미 있는 말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좌절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보물은 어둠속에 숨겨두신다.
아무리 찬란히 빛나는 별이라도 밤이 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낮이라야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낮이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을까요? 아니요....그게 아니요...
도리어 낮이기에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 멀고 먼 하늘 끝에 있는 그 수많은 별들,
그 별들이 쏟아내는 찬란하고 황홀한 별빛 축포들은 낮이 지나고 밤이 되어야 합니다.
밤이라도 사방을 밝히는 불이 꺼진 밤, 캄캄한 밤, 깊은 밤이라야
하늘에서 쏟아지는 황홀한 별빛 축포들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밤이 왔습니까? 고독합니까? 외롭습니까?
잠을 자야하는 시간에...이런 저런 걱정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까?
자꾸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까? 그 눈물이 베개를 적시게 됩니까?
그것은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과거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고 우리 인생 전체를 회상해봅시다.
여러분의 인생이 / 잘나갈 때 /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그때 하나님을 볼 시간이 있었습니까?
그 때는 아마도 하나님을 볼 수도 볼 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광야 시간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아무도 나의 힘도 도움도 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거기다 나 역시도 내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고,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온 하나님의 축복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생의 분수령.◑
이렇게 하나님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찾고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우리가 배운 삼손의 삶의 중심점이 무엇입니까? 자기과시, 자기 자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치적 쌓기와.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급기야 사람을 천명이나 쳐 죽였습니다.
시신을 두 무더기로 쌓아놓았습니다. 그 시신더미를 보고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명을 죽였도다..
얼마나 노래했든지 그는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이게 육신의 갈증일 수 있지만 육신의 갈증 때문만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갈증이라면 천명을 죽인 삼손이 그것 하나 해결을 못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까요?
14장에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죽였습니다.
그 후에 시신에서 겉옷과 속옷을 벗겨온 삼손입니다.
성경의 말씀이니 그런가보다 할 수 있지만...저는 혼자서 이 장면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 갑니다. 그것도 속옷까지
이런 괴기스러운 일을 아무나 할 수 있을까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의 옷을 빼앗아 왔던 삼손이
갑자기 개가천선하여 남의 물을 빼앗고 우물을 빼앗는 것은 정말 나쁜 짓이다.
나실인은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물을 달라고 부르짖었을까요?
이~~~이~~ 건 아니지요? 아닙니다...
육신에 필요한 물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삼손이 느낀 이 목마름은 육신의 갈증, 육신의 목마름이라기 보다...
자기 내면의 갈증, 내면의 목마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되는데...
삼손의 기도를 봅시다. 18절입니다. 같이 읽어봅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삼손의 일생에 기도한 내용은 성경에 딱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이 그 첫 번째 기도이고...두 번째 마지막 기도가..
16장 다곤 신전에서 죽기 직전에 하나님 앞에 마지막 힘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횟수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삼손이 기도하게 되었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내적 갈증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기도함으로
이것이 분수령이 되어서 16장에 자신이 더 큰 어려움에 처하니 다시 기도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국가나 교회나 개인이나 분수령 또는 분기점, 혹은 전환점이 있습니다.
분수령, 분깃점, 전환점...사전적 의미를 보면 조금씩은 틀리겠지만...
거의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한 단계에서 전혀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점,
이 전환점이 분수령 또는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정말 중요한 분수령 혹은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승천 후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의 제자들과 후의 제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전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자기 욕심에 가득찬 제자들이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무기력한 제자들이요. 오합지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전 2장에 성령강림의 체험을 한 후에 완전 다른 제자들이 됩니다.
나는 그 때의 그 상황이 기독교 역사를 바꾼 분수령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 체험을 한 제자들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행6:1절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한국교회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중차대한 진리 문제로 갈라지고 나누어진 일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된 가장 큰 이유는 대게 행6:1절의 이문제입니다.
왜 저편 사람에게는 떡을 두 개주고, 우리 편에게는 한 개만 주느냐..는 문제라는 겁니다.
왜 저편 사람들은 요직에 몇 사람이나 앉는데...우리 편에게는 한 자리만 주느냐는 겁니다.
이 문제를 잘못 풀면 교회가 분열되기에 딱 맞은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 때 사도들은 특단의 결단을 합니다.
행6:3,4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오르지 기도하고 말씀만 전하는 사역의 정신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때 위기가 닥쳤을 때...정치적으로 풀려고 해서 안됩니다.
그러한 상황이 닥치면...교회는 오르지 기도하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겁니다...아멘입니까?
실제로 사도행전의 성경을 주욱 읽어보면 기도함이 끊이지 않습니다.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2장은 성령강림 장인데...말할 것도 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행3:1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라고 하고
행4:24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기도했다는 거죠?
이런 내용으로 주욱 쓰여진 성경이 사도행전이니...사도행전을 기도행전이라고 합니다.
기도하므로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니 교회도 변화되었습니다.
기도가 교회와 제자들의 분수령이었다는 겁니다.
이는 오늘 우리교회도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제자처럼 삼손처럼 내 인생의 분기점을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지금과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으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기도하는 기도하는 또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하셨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내일 새벽이 기대됩니다.
받아서 합니다. 반석교회 모든 성도가 / 새벽기도 하는 날 / 기적이 일어난다...아멘입니까?
◐기도의 핵심-하나님이 주인 됨◑
왜 기도가 한 개인의 분기점이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삼손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18절에 기도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라고 합니다.
삼손은 자기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주께서...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자신을 종이라고 합니다.
참된 기도요... 이 주종 관계가 확실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날 기도하다가 참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됨은..내 기도가 너무 어린아이 같은 기도만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어느날 새벽에 기도하다가 내가 무슨 기도했지? 생각해보니 딱 4가지를 기도했더라구요
1) 필요한 것 주세요... 2) 도와주세요..
3) 해결해주세요 4) 잘되게 해주세요.
뭐 이런 기도만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어린아이라도 이런 어린아이가 또 있겠나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중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주객이 뒤바뀐 모습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쿠테타에 성공한 종처럼, 종이 주인을 끌고 다니면서 내 뜻대로 해결하라고 합니다.
기도는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오...나는 그분의 종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기도가 바뀌면 믿음이 바뀝니다.
구약성경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구약성경에는 항상 상반된 두 종류의 사람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개인과 개인을 대비시킨 것을 꼽아보면
누구나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가인과 아벨이 있지요?
제사장 중에는 사무엘과 엘리가 있고요, 왕중에는 다윗과 사울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누어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은 주인의 차이점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창13장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양과 소가 많아지니 서로 다투게 되는 갈등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같은 가족의 목자들끼리 다툼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롯과 결별하기로 합니다.
조카 롯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선택권을 쥔 롯이 어떻게 결정을 하는가를 봅시다...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어 무엇을 봤다는 겁니까?
눈을 들어 본 것 까지는 좋았는데...요단에서 소알까지의 땅을 본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살아계신 주 하나님..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세상을 본 것입니다.
혹 오해는 하시면 안됩니다...사람이 사는 곳이 땅인데 땅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 곳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찬515, 눈을들어 하늘보라 살아계신 주하나님...살아계신 주 하나님을 먼저 보라는 겁니다.
성도가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차지하여 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14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을 읽는데 저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숨겨진 숨은 그림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아브라함이 땅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찾아오셔서...야..아브라함아 나만 바라보고 있지 말고...너도 눈을 들어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겁0
즉 성경을 깊이 들어가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갈라설 수 밖에 없도록
그 환경을 이끄신 그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서로 갈라서게 하셨느냐...그 숨은 의도와 뜻이 무엇이냐?
창13장에 하나님의 숨은 의도와 뜻은 누가 나를 주인 삼는가를 보시고자 하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고 주인을 삼지 아니하고의 그 기준점이 뭡니까?
하나님께 묻고 행하느냐...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롯의 일생은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좋은대로 결정해서 갑니다.
그 결과가 말로 할 수 없는 참혹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는 곳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오늘도 아브라함은 하늘을 처다보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종입니다...종의 주권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물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물어야 합니다.
항상 묻고 쉬지 말고 묻고 범사에 묻고 또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난이나 문제가 여러분 앞에 닥쳤습니까? 그것은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 축복이 어떤 축복입니까? 기도하게 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때에 기도하게 되면 전과 후가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됩니다.
달라질 수 밖에 없음은 기도는 하나님은 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입니다...종은 주인에게 물어야 합니다.
날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묻고 또 물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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