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보다 설렘으로 (민1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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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보다 설렘으로 (민 10:11-16)
뭔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설레는 마음도 있지만, 전혀 낯선 것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하려는 용기를 쉽게 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마음 한쪽 구석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보다 설레는 마음이나 새로운 것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큰 사람, 그래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늘 새로운 것을 해보려는 사람은 우리는 개척자라고 부릅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 사람들이 쉽게 가려하지 않는 길을 용기 내어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겠다고 하는 산악인들, 개척하고 도전하려는 마음이 강한 그 산악인들을 이끄는 사람이 셰르파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전문 산악인들조차 가보지 않는 전혀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갑니다. 그러면 그런 셰르파를 따라가는 산악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아직 가보지 않은 히말라야입니다. 셰르파가 나를 인도하고 나와 함께 하지만 처음 가보는 등정에 셰르파를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셰르파와 함께 산에 오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등정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히말라야 등정에 나섰던 사람들 가운데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도 부기지수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산악인이라고 하는 엄홍길 씨도 비록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에 성공한 사람이지만, 그도 늘 성공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엄홍길 씨가 히말라야 16좌 등정에 성공한 것이 지난 2007년 5월 31일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그는 38번 히말라야에 도전했고, 그 가운데 20번은 성공했지만 18번은 등정에 실패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산악인이라고 하는 그도 거의 절반 가까이는 등정에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989년 8091m의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는 이미 네 번의 실패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최고의 산악인도 그럴진대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비록 셰르파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길을 갈 때 설레기도 하지만 두려움도 갖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실패할 때 찾아올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인 목숨을 잃는 상황도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히말라야에 등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그런 설렘과 두려움이 있음을 느끼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마음의 감정과 느낌을 잊으려 하겠지만,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그런 설렘과 두려움을 늘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설렘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살았습니다. 비록 나중에는 40년이라는 긴 세월로 인해서 우리처럼 설렘과 두려움에 둔감한 채 살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하던 중에 어쩌면 가장 설렘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날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후 두 번째 해 두 번째 달 20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13개월 하고 20일이 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지 석 달 만에 시내산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내산 아래에서 약 11개월 가까이 머물러 있었고, 오늘 본문은 드디어 시내산을 출발하여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을 향한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시내산 아래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설렘이고 또 두려움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아래 머무는 11개월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경험을 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아래 11개월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머물게 하신 이유가 분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24장에 기록된 시내산 언약의 핵심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을 맺게 되고, 언약백성으로 이스라엘은 공식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 11개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준비시키시는 훈련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인 성막(출애굽기 25:8)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행해 갈 때 어떤 조직력을 갖추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하는 날입니다. 이제 시내산을 출발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 기간 동안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들은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새롭게 출발하게 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시내산을 출발하는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데, 여러분 그들은 어떤 마음이 더 컸겠습니까? 두려워하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설레는 마음일까요? 물론 분명 그들에게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11개월 동안 걷지 않았습니다. 거의 1년을 걷지 않다가 새롭게 걷기 시작해야 합니다. 광야를 걷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어떤 적군이 나타날지, 또 언제 맹수나 전갈들이 공격해 올지 모릅니다. 광야를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상황이기에 그들의 마음에는 분명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은 그런 두려운 마음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애굽에서 탈출해 나올 때부터 그들은 시내산을 바라보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야할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서 애굽에서와 같이 억압받는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이 되어서 사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압제를 받을 필요가 없이,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아래에 머무는 11개월 동안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발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땅으로 가기 위해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더욱 설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을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그들에게 출발신호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11절)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는 출발신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출발하라고 신호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출발 신호와 함께 시내산을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다는 것만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두로 유다 자손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유대 군대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이끌었고.” 여기에서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군대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진영의 군기’라는 말은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 맨 앞장 서는 군대의 깃발을 말합니다. ‘진영별로’라는 말 역시 군대의 한 조직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앞장 서 나가는 유대지파를 부르를 때 그냥 ‘유다지파’ 이렇게 부르지 않고 ‘유다 군대’라고 부릅니다. 유다지파만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닙니다. 15절에서는 가장 앞장섰던 지파 가운데 잇사갈 지파에 대해서도 ‘잇사갈 자손 지파의 군대’라고 표현하고, 16절에서도 ‘스불론 자손 지파의 군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왜 시내산을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마치 잘 짜여진 군대의 모습처럼 설명하고 있을까요? 물론 그들이 애굽에서 막 나올 때처럼 오합지졸은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런 단순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출동하기만 하면 그들 앞에 가로막을 그 어떤 적도 없을 것입니다. 남자 장정만 60만 명입니다. 바꿔 말하면 군대로 조직된 인원만 60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60만 명의 군대조직을 갖춘 나라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진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 점령하는 것쯤은 문제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오합지졸을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군대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새내산을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을 점령할 일만 그들 앞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행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란광야까지 갔습니다. 바란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고 두려운 광야’(신명기 1:19)라고 알려진 곳입니다. ‘바란’이라는 단어는 ‘빛나는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태양빛에 반사되는 모래가 눈부시게 빛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만큼 태양빛이 뜨겁게 작렬하는 곳입니다. 또한 그 지역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된 낮고 험한 언덕과 메마른 모래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인간이 거주하기에 결코 적합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란광야는 가데스바네아 바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가데스바네아를 지나면 가나안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광야에까지 왔다고 하는 것은 가나안 땅에 아주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바란 광야가 사람이 거주하기에 아주 험난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가나안 땅에 가까이 왔다는 것 때문에 더욱 설레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란광야를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이곳에 어떻게 장막을 칠까?’ ‘이곳에서 어떻게 며칠을 머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바란광야를 생각하면서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회상했다는 것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기대감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형통하고 평안한 길이어야 하는데, 그리고 우리가 다다른 곳이 살기 좋고 머물기 좋은 곳이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평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은혜를 주셔서 어려움도 없게 하시고, 건강도 지켜주셔서 병도 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이 바란광야와 같은 곳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때로 불평이 찾아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힘들게 살아왔는데, 내게 주어진 보상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이끄시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지만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러다가 더 큰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어 나오는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시내산에 출발하며 바란광야에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이 3일이었는데, 그들이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바란광야에 오는 내낸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바란광야에서 멈춘 이유는 그곳이 그들에게 쉴만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바란광야는 정말 사람이 살기 힘든 곳입니다. 아니 잠시 멈춰 쉬는 것도 쉽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만한 곳으로 그 바란광야를 선택하였고, 그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때로 다다라 있는 곳이 우리에게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1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로 준비하게 하시고 시내산에서 출발한 그들을 사람 살기 힘든 바란광야로 이끄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어려움이 연속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 만든 곳으로 이끄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보다 앞서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곳이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내산 아래는 광활한 평지와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고, 곳곳에 샘과 우물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가까이 그곳에 장막을 치고 머물고 있어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여 처음 장막을 친 곳은 시내산 아래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 바란광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올해 살아야 할 삶이 지난해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만 때로는 어제 살았던 삶보다도 오늘 살아야 할 삶이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분명한 것은 어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머물고 멈추어 서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앞서 가셔서 준비하신 곳입니다. 그걸 우리가 확신한다면 지금의 삶이 더 어렵고 힘들더라도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든 삶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큰 문제가 있는 자리라 하더라도,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곳이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견디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놓고, 가장 안전한 곳에서 우리를 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쉴만한 곳으로 안내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도착한 그곳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란광야에서 가데스바네아를 지나가면 곧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를 통과해 바로 가나안으로 들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민수기의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다베라에서 악한 말로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기브롯핫다아와에서는 탐욕 때문에 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또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13-14장에서는 가나안 땅 정탐에 나섰던 12명 중 10명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면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보고를 할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에 동조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을 불신하며 밤새도록 통곡했습니다. 그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를 지나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며 살아야 했습니다. 바란광야에서 끝낼 수 있는 고생을 그들은 더 오랫동안 이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삶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원망하거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때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욕망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아낙자손과 같은 거인이 나타나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도다.”(신명기 32:10-11)
여러분, 지금 삶이 조금 불편하십니까? 지금 여기가 바란광야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이끄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십시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가장 복된 자리에 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으로 기대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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