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만 바라보며 가요 (창19:16-29)
본문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만 바라보며 가요/창세기19;16-29
향나무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히게 됩니다.
유명한 미술가 ‘루오’가 남긴 재미있는 제목의 판화가 한 점 있습니다.
그 판화의 제목은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입니다.
괴롭히고 아픔과 상처를 주고 죽음까지도 주는 도끼날일지라도 독을 묻혀주지 않고 오히려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런 삶입니다.
비방하며 멸시하고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하니 용서하여 주소서”
타는 목마름을 견디며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는 나를 찍으려는 수많은 도끼날들이 사방에서 번뜩이고 있습니다.
찍히더라도 오히려 내 속에 있는 예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아프더라도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향기를 나누고 베풀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요 믿음이요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믿음은 향나무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향기로 가득한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흔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P4
오늘은 다사다난했던 2020년의 마지막으로 예배드리는 주일이다.
지난 1년 동안 창세기를 주일마다 묵상하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오늘은 2020년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척이나 고민하였다.
그런데 2020년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너무 많다.
특히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해서 국가와 사회의 기반이 되는 서민층이 와르르 무너지고, 예전에 없던 기나긴 장마와 연거푸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서 농작물까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서민들의 삶이 너무나 힘들어진 한 해이다.
아마도 이 여파는 다가올 2021년 새해에도 여전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전쟁 때에도 쉬지 않았던 예배를 교회에서 드리지 못하도록 국가지도층들의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인하여 너무나 어렵게 살아왔던 한 해이다.
소위 자신들만 청렴결백하다고 떠들던 이들이 법무부장관에 임명되면서 대혼란을 일으켰던 두 사람의 오만함과 더러운 면들을 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았던 2020년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으로 열리는 2021년을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으면 마음이 간절하다.
물론 2021년에도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계속될 전망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대하며 새로운 소망과 꿈과 비전을 가져야겠다라고 다짐해 본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죄악, 동성애 죄악을 직접 목격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성을 유황불로 심판하기로 결정하신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죄악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간의 기본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우상숭배의 죄악과 영적인 간음의 죄악은 그래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간의 기본질서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수컷과 암컷, 남과 녀로 만들어주셨다.
동물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한정된 식물이기는 하지만, 어떤 식물에도 수컷과 암컷을 따로 만들어주시면서 서로 생식하고 번창하도록 만들어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들어주시면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주셨다.
생물학적인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성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중성으로 불안전한 사람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자기 기분과 마음에 따라서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었다가 하는 이상한 젠더라는 성을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남자와 여자라는 두 성을 만들었을 뿐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불안전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함으로 자녀를 출산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계승해 나가는 것이 인간을 비롯한 자연계에 주신 사명이요 기본질서이다.
그런데 여자가 여자와 부끄러운 짓을 하는 레즈비언과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게이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사람끼리, 동물은 동물끼리 교합하여 후손들을 출산하여 자연계가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본질서인데, 인간이 동물과 부끄러운 짓거리를 하면서 수간(獸姦)하여 하나님의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특정 동물을 반려 동물이라고 하든지, 특정 식물을 반려 식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인본주의 행위이다.
동물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것에 대하여, 각종 식물을 키우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도 식물들을 키우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러나 한번도 식물들을 나의 반려식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애완용으로 얼마든지 동물들을 키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실 때 그대로 식물이면 식물로, 동물이면 동물로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범주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반려(伴侶)라는 용어는 오직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배우자를 반려자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생 동일한 뜻과 꿈과 이상을 가지고 한 길을 걸어가는 동료들을 평생 동지 또는 반려자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이 없는 동물이나 식물을 일컬어 반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반려동물이라든지, 반려식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이념이나 사상을 만들어내는 인본주의에 의해서 만들어놓은 극히 사탄에 속한 프레임에 불과하다.
반려동물이라든지, 반려식물이라는 용어는 인본주의 사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용어에 불과하다.
젠더라든지, 제3의 성이라든지, 동성애라든지 하는 용어들도 인본주의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의해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러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66권을 삶의 표준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고 따라가는 신본주의 신앙인들은 인본주의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기본질서와 인간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하려고 하는 몇몇 정신 이상자들인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에 유황불로 심판하신 재앙을 오늘날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에 동성애를 유황불로 심판하셨듯이 분명히 하나님의 기본질서와 인간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동성애자들과 이들을 옹호하려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이들에게 하나님께 반드시 심판하고 징계하시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동성애자들이나 수간자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동성애자들과 수간자들에게는 조금의 긍휼이나 자비를 베풀어주지 말고 매우 단호하게 처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롯의 가정을 통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실까?
하나님께서 롯의 가정을 보여주시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기를 원하고 계실까?
D4.
① 도망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죄악, 동성애의 죄악을 직접 목격하고는 소돔과 고모라성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기로 결단하고 롯의 가정들을 구원하려고 하신다.
아브라함의 애절한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의 가정만은 유황불의 심판에서 구원하시려고 하신다.
소돔성에 도착한 하나님의 사자들은 롯과 롯의 아내와 두 딸을 구원하시려고 작전을 수행하신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동편 하늘에서 먼동이 떠오를 즈음에 롯에게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어서 속히 소돔성을 떠나라고 재촉하신다.
그런데도 롯은 무엇이 그리도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하나님의 사자들이 재촉함에도 불구하고 미적미적거리면서 지체한다.
지금은 미적미적거리면서 지체할 때가 아닌데도 롯의 식구들은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때로는 미적미적거릴 때도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신속하게 빨리 움직여여 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 죽음의 쓰나미가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는데 미적미적거리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2011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쓰나미의 참상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얼마나 참혹했던가?
지금 롯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쓰나미가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미적미적거릴 여유가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뭐가 그리 태연한지 빨리빨리 서두르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너무나 다급해진 하나님의 사자들은 양손에 롯과 아내를, 다른 하나님의 사자는 두 딸의 손을 붙잡고 소돔성에서 이끌어낸다.
이들을 억지로 이끌어 낸 하나님의 사자는 롯의 식구들에게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빨리 도망가라고 말씀하신다.
머뭇머뭇거리면서 지체하던 롯의 식구들을 소돔 성밖으로 이끌어냈지만, 이제 도망가야 하는 것은 롯의 식구들이 직접 해야만 되는 일이다.
비록 하나님의 사자들에 의하여 성밖까지는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에 내리는 유황불의 여파로 성밖에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빨리 도망가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심판받는 자리에서는 더 이상 머뭇머뭇거리거나 지체하지 말고 빨리 도망가야만 살 수 있다.
심판의 자리를 떠나야만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신앙인들은 죄악의 자리에서 빨리 떠나서 도망가야만 살 수 있다.
아무리 성밖으로 구원받아 나왔더라도 도망가지 않으면 심판의 불에 맞아 불타면서 죽을 수 있다.
아무리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죄악의 무리들과 섞여 있으면 곧 그들의 죄악에 물들어서 그들과 함께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눈꼽만큼이라도 동성애에 미련이 남아 있거나 관심이 있는 신앙인이 있다면 단 1초라도 빨리 빠져나가야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죄악의 자리에서 단 1초라도 빨리 도망가는 길만이 살 수 있는 길이다.
시편1;1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니 빨리 죄악의 자리에서 의의 길로 도망쳐 나와야 살 길이 열리는 것이다.
② 희생양으로 삼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자들은 각각 양손에 롯과 아내, 두 딸을 붙잡고 소돔 성에서 끌어낸다.
소돔 성밖으로 이끌어낸 하나님의 사자는 롯의 식구들에게 돌아보지도 말고 들에 머물지도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돌아보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은 앞으로 달려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롯의 식구들의 요청에 따라서 소알성까지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
23-25절에 보면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6절에서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롯의 아내가 언제 뒤를 돌아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소알성에 도착하기 전에 소알성으로 가던 중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싶다.
모세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봄으로 인해서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롯의 아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는 여러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롯의 아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 뒤를 돌아본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과연 롯의 아내만 뒤를 돌아보고 롯이나 두 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함께 소알성을 향하여 뛰어가던지, 함께 소알성으로 들어가든지 하고 있는데, 한순간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내가 왜 보이지 않지? 아내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엄마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엄마가 안 보이는 거야?” 하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겠는가?
우리 신앙인들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달려갈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롯과 두 딸도 뒤를 돌아보았을 것 같다.
그러면 왜 이들은 아내처럼, 엄마처럼 소금기둥이 되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롯의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를 설명하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심판받는 장면을 인용하여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롯과 두 딸에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롯의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롯과 두 딸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만, 오직 삼위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신앙생활하라고 경고하시기 위해서 롯의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님은 종종 희생양을 선택하여 사용하시곤 하신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정복 전쟁을 진행하고 있을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여리고성에서 물건을 몰래 숨겨놓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때 하나님은 아간이라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고 아골 골짜기라고 부르면서 절대로 가나안 땅의 물건들을 탐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아간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경고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도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려고 하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 본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예루살렘 교회도 사단의 시험으로 타락한 교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먼저 희생양으로 징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희생양을 찾으실 수 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거룩성과 완전성과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유명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는다.
그를 징계하심으로 본보기, 모델이 될 수 있는 유명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야만 경고의 메시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름께나 있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③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롯의 아내는 희생양이 되어 소금기둥이 됨으로서 후대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어준다.
롯과 두 딸이 자신들이 소돔을 선택하여 이주하여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삼촌 곁으로 돌아갔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롯은 아브라함 삼촌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
곧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롯과 두 딸은 가까스로 소알성에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았지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까스로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구원을 받았고, 깊은 산속 동굴로 들어가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떠난 민족, 모압과 암몬족을 양산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모압은 그모스신을 섬기고 암몬족은 몰렉신을 섬긴다.
공교롭게도 그모스신과 몰렉신은 인신제물을 제물로 받는 신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들어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면서 생령이 되게 하신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신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앙인들에게 롯의 가정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롯의 가정이 뒤를 돌아보고 지난 삶에 미련을 두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지 않음으로 인하여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불행을 보여주었듯이, 신앙인들은 불행한 신앙인, 신앙인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불행한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동료들과 지인들에게 신앙인의 참다운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L4 & B4.
롯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신앙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삶을 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신앙인들은 지나간 2020년 한해를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찾아올 2021년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지난 2020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미련을 가지고 후회하면서 뒤를 돌아 본다 하더라도 절대로 2020년은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며칠 남아 있는 2020년을 미련없이 보내야 하고, 우리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2021년을 새롭게 믿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지난 2020년에 대하여 갖가지 미련을 가지고 후회하며 뒤를 돌아보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돌이켜서 오직 앞으로 다가오는 2021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 워싱턴 성광교회 이희돈이라는 장로님이 계셨다.
2001년 미국에서 가장 끔찍하게 일어난 9.11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희돈 장로님은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수석 부총재와 세계 이사회 부의장을 지냈고, 1998년 WTCA 사상 최연소 세계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희돈 장로님은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학과를 졸업한 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지역전문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희돈 장로님은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중남미 지역 경제학으로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고등 연구원 과정을 이수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 교수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초빙교수와 미국 최대 인명사전에 미국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로 등재되기도 한 사람이다.
이희돈 장로님이 스페인으로 유학갈 때, 부모님은 달랑 비행기 표 한 장만 사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봉투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비행기 안에서 장로님은 어머니가 돈을 얼마나 주었을까? 생각하면서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봉투 안에 돈은 하나도 없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울 것이다.”라는 글이 써진 종이만 들어있었다고 한다.
공항에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유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평생 교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미국 세계무역센터에서 지원하여 1993년부터 일하게 되었다.
이희돈 장로님은 1998년 칠레 산티아고 총회에서 WTCA 사상 최연소 세계 이사로 선출되었고, 아시아계에서는 최초로 WTCA에서 부총재가 되었다.
이희돈 장로님은 2001년9월11일, 새벽에 일어나서 뉴욕행 7시 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으로 가기 전에 커피 생각이 간절하였다.
하지만 바로 어제 커피를 끊겠다고 아내와 약속한 말이 생각나서 차마 마실 수가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여 평상시 같으면 바로 탑승할 터이지만 집에서 마시지 못한 커피를 사러 잠시 편의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이전엔 전혀 마시지 않던 얼음 채운 딸기주스를 대신 사게 되었다.
갈증도 심하고 기내까지 가져가지 않으려고 몇 모금 더 마시자 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하였다.
세계금융을 의논하며 세계 경제의 주축을 움직이는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세계무역센터는 쌍둥이 빌딩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곳에는 지구촌 101개국 320여 개 도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기지와 75만여 기업회원들을 관장하는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본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뉴욕 공항에 예정대로 8시에 도착한 장로님은 바로 차편에 올라야 했지만, 워싱톤 공항에서 마신 딸기주스 때문에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하게 되었다.
9시까지 도착해야 할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늦을까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18분 이상을 지체하고 차에 올랐다.
부하직원에게는 ‘오늘 회의가 있고,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나오지 말라’고 전화를 걸었다.
UN본부를 지나 세계무역센터(WTC) 본부에 가까워지자 조금 늦기도 하고 또 점검할 사항도 있어서 수석부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탄 차는 브루클린 브리치를 거쳐 막 터널을 빠져나가는 찰나였다.
통화 중이던 부총재가 갑자기 “불이야! 나가야 할 것 같아”라고 외치며 전화를 끊는 것이다.
가끔 있는 훈련이나 오보려니 생각할 동안 차는 이미 WTC 북쪽 건물에 접근하고 있었다.
무슨 소동인가 싶어 잠시 윗쪽을 올려다보는 순간 조그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희돈 부총재는 유럽에서 온 세계 이사들이 걱정돼 그들의 숙소인 WTC 다섯 번째 빌딩인 호텔에 접근해 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했다.
순간 연기만 보이는 것 같던 불길은 끈적한 화염이 되어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치솟아 번져나갔고 고층에서 잔해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장로님이 탄 차는 갑자기 몰려든 소방대원들과 장비로 WTC 첫 번째 건물과 네 번째 건물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
바로 이 순간 머리 위로 한 대의 대형 여객기가 낮은 고도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니 두 번째 WTC 건물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얼마나 낮게 날았던지 장로님의 눈에는 비행기 배면에 새겨져 있는 작은 글씨까지도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피격된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장로님은 ‘이것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구나’라는 생각에 “여보, 안녕!”이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였다고 한다.
다행히 철근 구조물로 만들어진 WTC 건물이 빨리 무너지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버텨주었다.
덕분에 장로님이 탄 차는 소방시설 때문에 통제되고 있던 반대편 차선을 넘어 조금 전에 나왔던 터널 속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파편들이 뒤따라 덮쳤으나 차는 안전하였다.
이어 터널을 빠져나와 일정한 거리를 벗어나자 WTC 건물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터널에 남아 있던 차들도 모두 부서지고 말았다.
WTC 북쪽 건물을 쳤던 비행기는 이희돈 부총재가 모임을 위해 올라가려던 바로 그 장소를 공격한 것이었다.
만일 이희돈 장로님이 공항 화장실에서 15-20분 정도 지체하지 않았다면, 장로님은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었을 것이고,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9∙11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적같은 일은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 두 번째 이야기이다.
이희돈 장로님은 “세계무역센터에서 처음 일할 때 머리 위로 무언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는데 알고 보니 폭탄이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폭발 당시 현장에 있던 내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번에 9•11테러 때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의 작은 불편함까지도 이용하셔서 당신의 자녀를 돌봐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라고 고백한다.
이후에 이희돈 장로님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가끔 우리에게 불편을 통해 돌아온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수 있었다.
테러 당일 일어난 작은 소동이 아니었다면 무너져 내린 WTC 건물 속으로 자신은 물론 부하직원까지 묻힐 뻔했던 참사에서 죽음의 사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건져주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신앙생활하던 이희돈 장로님은 올해 2020년9월3일에 위암으로 61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돌아가셨다.
이희돈 장로님은 살아생전에 늘 “하나님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기도의 자리에 앉아서 기도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이희돈 장로님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지나간 2020년에 더 이상 미련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신앙인들도 오직 삼위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 섭리를 따라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사도바울은 빌립보서3: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들 앞에 펼쳐질 2021년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2021년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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