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6:1-3)
본문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세아 6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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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는 열왕기 상, 하에 등장하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성경 역사속의 선지자였고, 선지서(예언서)의 저자들 중에서는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 호세아입니다. 호세아와 더불어 아모스와 미가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들입니다. ‘호세아’하면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여 2남 1녀의 자식을 낳은 사건을 기억 하실 겁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입니다. 예수님 관련 영화에서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을 부를 때 “예슈아! 예슈아!”라고 부릅니다. 이 예슈아가 호세아, 혹은 여호수아라고 기록된 이름하고 똑 같이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타락한 북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럼에도 그 음란한 여인과 결혼한 호세아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미리 보이는 징조) 합니다. 더럽고 불결하고 지독한 악취가 풍기면 가까이하기 힘든데, 예수님은 그 역겨움을 참으시고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이 감사한 사실에 언제나 머리 숙여 겸손하게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남편의 마음도 몰라주고 여전히 음란한 생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예 가출을 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 음란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시 호세아에게 말씀 하십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나 주가 그들(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3:1, 표준 새번역)아멘.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도 순종하기 힘든데, 결혼 후에도 아예 대놓고 집나가서 다른 남자와 지내는 여인을 다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고 순종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참으실 수 있다지만, 호세아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참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분노하여 미칠 지경이었을 겁니다. “환장하겠다”라는 말이 있죠. 환장(換腸)은 문자 그대로는 창자의 위치가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제정신이 아닌 듯한 상태로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영어로는 become mad, 미쳐 버리는 것, go off one's mind, 제정신을 잃는 것, 이런 상태를 멘탈이 붕괴되다, ‘멘붕’이라고 합니다. 호세아의 심정이 이러했을 겁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너 죽고 나 죽자 아마 큰 일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겁니다. 음란한 여인이 바로 우리고(나고), 호세아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참지 못하고 터져 버릴 지경으로 우리 죄악이 흉악하기 그지없지만,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고, 또 참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참고 계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러한 부당한 것 같은 명령에 온전히 순종을 했습니다. 그는 묵묵히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아내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 그 물품과 여인을 교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많은 날을 나와 함께 살면서, 창녀가 되지도 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도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그 동안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소”(호 3:3) 좋게 보면 일편단심 순애보의 마음 같기도 하지만, 바보 천치 같고, 미련하고, 간도 쓸개도 없는 줏대 없는 인간처럼 보입니다. 아마 지금 세상에서 이런 기사가 공론화 되었으면 아내와 남편을 싸잡아 비난하는 댓글이 무수하게 달렸을 겁니다. 호세아의 이 고백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호세아가 돈과 물품을 가지고 간 것은 아내의 몸 갚을 치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값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희생으로 치러진 죄의 값입니다. 호세아의 아내가 대 놓고 음란한 짓을 행하였을 때 대가 없이 값을 치러 주었듯이,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경건하지 아니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 하셨느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음란한 과거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미쳐 버릴 듯한 분노의 마음을 감추시고 음란한 우리들과 여전히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피로 사신 죄의 값을 들고 우리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그 기다리심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 1~3절은 이스라엘의 신앙 갱신과 회개 운동에 대한 호세아 선지자의 눈물 어린 호소입니다.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라”(히, 레쿠)는 걸어가는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로, “너희는 걸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더럽고 냄새나는 죄악의 자리, 거짓과 비 진리가 난무하는 추악한 불순종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떨쳐 버리고, 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우리를 번쩍 들어서 하나님 앞에 갔다 놓아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시고, 끝까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기만을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스스로 움직여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1절 후반부에 연 이어서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찢으시고(공동번역, 잡아 찢으시고), 때리셨기(표준새번역, 상처를 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손을 대셔서 찢고, 때리시는데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너무나 부요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가장 풍요로운 번영의 시대였습니다.영토도 넓었고, 국가의 부도 넘쳤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복에 겨워 흥청망청했습니다.
당장 징계 받아 아픈 것보다 현실적으로 누리는 부요함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즐기고, 먹고, 마시고, 노느라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풍요를 누리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며 일하고, 또 일하느라 바빠서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 잊어 버렸습니다. 흥청망청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부럽고, 하늘의 큰 복을 받은 자의 여유로움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영적으로는 가장 빈곤한 상태였습니다. 세상과 화목하면 할수록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어 갔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한다”, “돈은 일만 악의 근원”이라는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부자 되기 싫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돈의 무서움을 경고한 것을 알고 있다면, 돈 많이 버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백이면 백이, 돈이 많아지면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그나마 먼지만큼 남아있던 믿음의 바닥마저도 싸그리 잃어버리게 됩니다. 겉으로는 번들번들 윤이 나지만(때깔 좋지만), 속으로는 물기 하나 없어 뿌리까지 썩어 들어가는 영적 소멸 상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재생 불가가 된다는 말입니다. 재생 불가 제품은 분리수거 재활용이 아닌, 완전 소각이나 매몰 처리하는 폐기 대상입니다.
이스라엘은 폐기 직전이었습니다. 회생불가 진단이 내려질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급한 상황임에도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낫게 해주신다(고쳐 주신다), 싸매 주신다(아물게 해 주신다)고 약속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회복을 뛰어넘어 영혼을 온전하게‘소성켜 주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소성시킨다”는 것은 까무러쳤다가 깨어나거나, 중병에 걸렸다가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삼 1:2)는 말씀처럼, 영혼이 잘 되어야 하는 일도 잘 풀리고, 육체도 건강함을 얻는 두루두루 형통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현실적이라고 하더라도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돈으로 이것 저것 수월하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일 수 있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는 불경건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없다고 불평하고 근심하지 마시고, 조금 있다고 자랑하고 쓰는 데에 시간 허비 하지 마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영적 빈곤을 영적 풍요로 바꾸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권면을 들으시고 재물(돈)보다 하나님을, 겉면의 치장과 즐김 보다 내면 영적 충만을 간구하며, 몸과 마음과 영혼이 여호와께로 완전하게 돌아가는 00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말씀 합니다. 이틀, 셋째 날은 구속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조속한 회복을 예고 하시는 말씀입니다.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빠르게 회복 시켜 주십니다. 그 회복은 어느 한 두 가지의 회복이 아니라, 전 인격의 일체적이고 완전한 회복입니다.
덧붙여 설명 드리면 하나님은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킨 그 능력으로, 우리 삶의 모든 미해결된 고민과 걱정의 문제들, 질병으로 인한 여러 가지 육체적인 연약함의 문제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답답함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시에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시고 여호와께로 나아가 보세요. 믿는 자에게 회복의 역사가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회복의 주인공이자, 안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절 마지막에 “우리 그의 앞에서 살리라”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회복하였다면,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영혼의 회복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합니다. 이번에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굳게 결심하시고, 동시에 내가 이번에 여호와께로 돌아가게 되면, 영원토록 그 앞에서 떠나지 않고 살겠다는 새로운 각오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백하시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큰 기쁨으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3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아멘.
여호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열심을 내는 일을 행동으로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행동이 바로 3절에서 나온 것처럼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와, “여호와를 힘써 알자”는 호세아서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면서, 오늘 날 우리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토록 가슴에 새겨야 하는 존귀한 말씀입니다.
3절 말씀 그대로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어김없이 나타나 주십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영광으로 임하여(임재 하여) 주십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는 것은, 만남의 시간을 계속 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를 통하여 응답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써 알아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함이 곧 기쁨이요 즐거움이라는 것을 진하게 체험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알아감으로 인해 영혼의 풍요함과 부요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로 나아오기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각오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 여호와를 알려고 할 때, 곧 만남의 빈도를 늘려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반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의 앞에서 살리라, 여호와를 힘써 알자” 이 세 가지가 신앙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말씀이 아니라 본문에서는 오히려 불성실한 회개를 다루는 말씀 이었다는 것입니다. 4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개탄하시는 말씀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좋은 말씀, 호세아 선지자의 애타는 호소의 소리를 듣고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도, 행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듣는 체만 하고, 하는 체만 하는 거짓 흉내로 하나님을 속이고 모독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듣는 자에게 나타나지 않고, 듣고 행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돌아오라, 내 앞에서 살아라, 힘써 나를 알아가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오늘 이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귀에 들렸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결말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가족이,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와 민족이 이스라엘의 길을 가지 않게 하려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내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그의 앞에서 영원히 살아가며, 힘써 여호와를 알아 가는데 최선을 다 하셔서, 영혼이 풍성해지는 믿음의 거부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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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시대의 음란함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믿음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그의 앞에서만 살아가고, 힘써 여호와를 알아 가는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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