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하나님의 심판 (민1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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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하나님의 심판 (민 14:11-12)
2020년 2월 대한민국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땅에 확산되고 있는 전염병은 하나님의 심판인가?
우리는 이 전염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나 큰 두려움이었다.
서양의 흑사병은 대표적인 전염병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의 무기가 아니라 서양에서 온 바이러스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염병이라는 욕을 자주 들었다. 이 염병이 전염병이다. 얼마나 지독하면 욕에 담긴 말이 되었을까! 여하튼 장티푸스나 콜레라 등의 전염병은 미개한 사회로 갈수록 흔히 발견된다. 나도 어렸을 때 이런 병에 대해서 주의하라는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화장실이 현대화되고 상하수도 시설이 잘 갖춰지자 위생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자연히 수인성 전염병들은 점차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60년대나 70년대만 해도 그런 전염병은 흔한 질병이었다. 그런데 과거로 가면 어떨까? 조선시대와 그 이전 고려시대 그리고 삼국시대로 가면 어떨까?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로 돌아가면 전염병은 더욱 흔한 질병이며 매우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겪게 될 두려움 몇 가지를 소개 한다:
(시 91:5~6)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전쟁의 공포와 함께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으로부터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격려한다. 전염병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어두움의 세계에 있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공포였기에 하나님이 내리는 벌로 여길 정도였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하면서 전염병도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닫으시기 때문에 비가 오기도 하고 가뭄이 들기도 한다고 그 시대 사람들은 믿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160년 전 프랑스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발효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백신을 개발하여 광견병이나 양떼에게 나타나는 탄저병, 그리고 닭콜레라를 치유하였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전염병을 어두울 때 퍼지는 두려운 재앙으로 여길 따름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가 전부 아니었을까? 그 시대에는 전염병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은 가뭄이 든다고 해서 기우제를 지내 하늘을 감동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부덕하여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죄를 지어 이런 일이 생긴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비가 오지 않는 것을 환경의 불균형을 초래한 온난화 현상에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가뭄이 심해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물론 병들었을 때 병 낫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기도만 하고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과거에 병들었을 때는 병원에 가기보다는 기도하여 낫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때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것은 불신앙의 표시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며, 병든 사람은 기도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병원에 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신앙은 맹목적이며 경우에 따라서 매우 심각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전염병의 원인도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한 것이며 병에 걸렸을 때도 병원에 가서 고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자리 잡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고 그 결과로 짐승과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어갔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여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이스라엘 전역에서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성경은 그 대목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한다:
(삼하 24: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화를 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 한다.
(민 14:11-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 금방 하나님이 전염병을 내리시는 분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구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에게 언제 왜 기록되었는지를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그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고 오해하게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문서설(文書說)이다. 문서설은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신학교 강단에서 배척되어 왔다. 나도 신학대학원(M.Div)에 재학 중이었을 때 문서설을 배격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신앙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성경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자 나는 자연스럽게 문서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성경을 좀 더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다.
구약백성의 상황과 신약백성의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고 구약성경 안에서도 종교개혁에 견줄 만한 혁명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 발전은 신약성경 안에서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면서 성숙해지듯, 종교도 그 태동기에서 시작하여 점차 발전하고 성숙하게 된다. 태동기의 언어와 사상은 매우 직설적이고 회화적이라면, 종교가 점차 성숙하면서 은유적이며 포용적이 된다. 그리고 성경의 각 책이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감안한다면 성경의 각 부분을 좀 더 거시적이고 통전적인 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 세대에게 등불이 되는 길을 찾고 걸림돌이 되는 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처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애굽에 재앙이 내리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기록하여 청중에게 들려준 세대는 누구일까?
어느 시절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을까? 누가 성경을 썼을까? (Who Wrote the Bible?)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인가 아니면 포로기 이후의 세대인가? 위에서 언급한 문서설에 의하면 최종 편집자는 포로기 이후의 세대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민족적 재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과 삶의 목표를 위해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구약성경이 기록된 방식과 전달하려는 주제를 살핀 학자들은 본문의 특징을 잡아 분류했다. 그렇게 해서 어떤 부분은 신명기적 문서들이라고 명명되고, 다른 부분은 역대기적 문서들이라고 분류되었으며, 사제문서와 야훼문서, 엘로힘 문서들도 각각 그 본문을 배당 받았을 것이다. 일명 JEDP 가설이다. 그리고 최종 편집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그렇게 만들었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민족적 재난과 위기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게 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기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위대한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의 절실한 필요를 생각하면 본문을 더 바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지어낸 것 아니냐? 그렇게 불경스러운 말을 해도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있다. 사실 그 사람도 그처럼 분노하는 까닭은 자신이 그 이야기에서 생명을 얻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본래 누구에게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된다면 지금 자신이 그 이야기로부터 받은 유익과 의미보다 더 풍성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일연은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참조했다고 한다. 위서는 중국의 고전으로 주전 386년에서 주전 265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남아 있는 발간본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신채호 선생은 이 이야기를 단군신화라고 명명하고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각 시대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던 사람들에게 영감과 유익을 주었다. 단지 과학적 역사적 사실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놓칠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의 본래 가치가 아닐까!
나는 성경의 이야기가 이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서양 역사는 이 이야기에서 영감과 의미를 모유처럼 받아서 성장해오지 않았나? 세상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 그리고 민족의 운명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밝혀주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그 민족이나 개인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성전제사와 절기 준수를 통해 민족적 단결과 일체감을 갖게 했으며, 다른 시대에는 이 이야기가 발전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 이상 제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 절기도 지키지 말라.
제물이 불에 타는 냄새에 내가 질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많은 제물이 아니라 단지 세 가지뿐이다.
너희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나와 동행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는 헤렘의 명령을 주셔서 여리고성의 모든 생명을 죽이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민족정기의 순수성을 고취시켜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화의 시대에 타민족과 더불어 살아야 생존이 가능한 시절에는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러 가야 했던 요나의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나라, 아니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시금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고수하면서 문자에 얽매이기보다는 그 이야기의 의미와 그 이야기가 태동된 배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시대를 이끌고 갈 등불과 같고 우리 시대를 하나로 묶어주고 연대하게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다는 이야기와 다윗의 인구조사 시절에 7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전염병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시고 건지신다는 의미와 감동을 주며, 다윗 이야기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삶에서 떠나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그런데 이 이야기로부터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성경에 수없이 반복되는 구절인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분열적인 신을 섬기게 되고 그 결과 우리들도 한편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무례한 말을 서슴지 않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기독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다.
즉, 어떤 설교자들이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호 침몰사건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일본의 재난이나 태국의 지진 등을 보면서 비인격적인 발언을 하게 된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본래 악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한때는 생각하기를,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는 것은 신앙심이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으며, 지옥과 천국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기도 했고(심지어 나는 펄시 콜레에게 안수기도를 받기도 했다), 문서설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신학대학원 졸업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했으니까. 우리 안에 어떤 이야기가 있으며, 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세상과 사건을 달리 평가하고 받아들인다. 그처럼 이야기는 중요하다.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해 본다. 더 단순하고 명쾌하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코로나19는 전염병이며 우리가 함께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하나님은 결코 전염병을 내려 어떤 민족을 죽이시는 분이 아니며, 중국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박해에 대해서 보복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효가 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그러면 우리가 핍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 대신에 그들에게 보복하시는 분인가!
도리어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서로 짐을 지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준행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할 본분이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이야기가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정말 아름답게 만들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꿀 수 있는 힘을 갖추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는 자라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간직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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