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하라 (삼상7:12)
본문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하라 (삼상 7:12-)
설날이 주일이 되니, 뭐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인들은 휴일을 많이 빼앗겼다고 억울해 하고, 귀성하시는 분들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아우성인 것 같구요. 설 대목을 노렸던 시장 상인들은 경기침체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으시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서민들은 특히 춥고 눈이 많았던 날씨 영향이 겹쳐 더욱 힘들어 하시는군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는 기쁨을 힘들고 팍팍한 일상의 삶에 활력소를 삼는 것 같습니다.
설 명절의 의의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가족 친지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음식을 나누며 웃고 즐기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반성과 각오를 통하여 새 해에는 복된 날들로 만들어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겠죠. 지난해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그 이유를 분석하고 파악하여 고난의 원인을 제거해야 될 것입니다. 만약 지난해가 축복이 가득한 시간이었다면, 그 축복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가족은 이러한 명절 때에, 특히 고통의 때와 축복의 때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명절을 지내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겠습니까?
I.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하라.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인도 하에 해방이 되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자신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을 점점 잊어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점점 고통스러운 상태가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세우셔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을 도모하셨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행복한가 하는 질문의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설 명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는 자들이 생각하여야 할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을 어떻게 잃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셋째는, 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2. 복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사무엘 선지자는 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복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씀이죠. 우리나라에 ‘우물가서 숭늉을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속된 말로 ‘번지수가 틀렸다’고도 말합니다. 즉, 복을 받으려면 복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받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복의 근원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요. 원주민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츰차츰 보이는 우상에게 더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복을 빌기 위하여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 숭배자들과 같은 행동으로 타락해 가는 현상이 만연하게 된 것이죠.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불행을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즉, 축복의 통로를 막고 오히려 저주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형편과도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믿지 않는 나라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칫, 그들의 사상과 생각을 따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은 특별하게 설 명절에 폭죽을 요란하게 쏴댑니다. 가족을 해롭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복을 받기 위해 폭죽을 쏘아 올리는데, 어떤 사람들은 일 년 수입의 절반을 폭죽 구입비로 사용하기도 한답니다. 싸구려 폭죽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시력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기도 하지만, 이 우스꽝스러운 일을 15억 인구가 멈출 생각을 안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전도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도 설날에는 꼭 이 폭죽을 쏴야 안심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른 나라의 코미디 같은 일을 보면서 웃기에는 우리나라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을 하기 때문에, 웃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복을 받기 위해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조상이 후손들을 지켜주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즐거운 명절에 교통사고가 평소보다 200%로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통량이 많아지는데 따라는 자연적인 현상도 있지만, 사고의 내용을 보면,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 TV에서 교통전문가가 그 원인을 제사 때 음복한 술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더군요. 조상에게 복 달라고 술을 마셨는데, 교통사고로 일가족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은 폭죽이 귀신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조상이 복을 주지도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는 조건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는 유일한 조건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 복을 어떻게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우상을 따르고, 세상 풍속을 따르는 것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웃고 즐기자는 것인데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조상의 믿음 때문에 많은 복을 상속 받았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마땅히 지켜야할 몇 가지 약속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때문에, 애굽의 노예였던 그 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원주민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쫓아 낼 수는 없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400년입니다. 왜 400년입니까?
창15:16을 보면,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죄가 가득차서 부패하게 되는 때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즉, 가나안 족속은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을 본받아서는 ‘아니, 아니, 아니 되오!’ 이래야 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이 축복의 약속을 잘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들의 풍습을 따르며, 복을 받기 위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따라했다고 뭐가 그리 크게 달라지겠습니까? 그렇지만, 생각이 변하면 행동은 자연히 따라서 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을 따라서 타락했고, 더불어 이스라엘 사회는 혼탁해져 갔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했는지 심지어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삼상2:12-17). 사회가 부패할 때, 건강한 신앙공동체는 타락한 사회를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와 제사장 족속이 함께 타락한 것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원인이었습니다.
삼상2:12를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당시 대제사장이고, 아들들은 권위와 직책의 상속자들이었습니다. 그들마저 타락해 버렸다는 것은 종교 자체가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바람에 블레셋과 아말렉 등 이방 민족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것이지요.
오늘 날도 많은 교회들이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당하다고 항의할 수 없을만큼 우리의 교회들과 본문 상의 이스라엘의 형편이 너무 비슷해서 두려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이들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당장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크기 때문이죠.
4. 그렇다면 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성품에 우리는 기대를 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고리는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만을 축복의 약속이 회복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유 없이 복을 주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복의 길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즉, 집 떠나 방황하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도록 계속해서 종을 보내시는 거에요. 이마져도 별 소용이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신 신실한 종은 선지자 사무엘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삼상7:3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는 약속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합니다. 축복의 통로를 회복하는 길은 버리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미스바라는 곳에 모여서(삼상7:5,6)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부흥회를 개최한 것이지요. 7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단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마치 데모대를 해산하려고 전경대를 파견하는 것처럼 강력한 군대를 보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두려운 블레셋은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니은 큰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승리와 영광은 우상이 줄 수 없습니다. 잠깐의 쾌락은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지만, 진정한 기쁨과 영원한 복락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형식적인 종교행위도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민족은 조상들의 잘못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즉, 예배가 형식이 된 것입니다.
요7:3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받으시고, 비록 힘들고 어려운 때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예배가 회복되고, 믿음이 회복된 자들에게는 다시금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승을 기념하여 사무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기념으로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돌아오면 받아주시고,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기적적인 승리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승리했고, 14절 말씀처럼 평화를 누렸던 것입니다.
5. 결론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에벤에셀의 돌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16:33에서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가슴에 세긴 사람은 평안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에벤에셀은 바로 이 성경, 즉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자를 도우십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믿음을 잃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에벤에설의 하나님은 믿음을 회복하면 축복의 통로를 다시 열어주십니다.
2017년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더욱 큰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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