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할례 (롬2:12-29)
본문
마음의 할례(롬2:12-29절)
1. 디아트리베(diatribe)
제자선교회 밴드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이 가지고 있는 일곱 가지 덕목을 배우자는 글이었습니다.
첫째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을 배우자고 합니다.
둘째는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정물까지 받아주는 포용력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다섯 번째는 어떤 바위도 뚫는 인내와 끈기
여섯 번째는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
일곱 번째는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다 받아서 포용해야 하는 물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풍부에도 비천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던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물의 지혜를 교회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바위도 뚫어 버리는 변함없음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물의 속성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로마서를 공부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디아트리베라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 전개방식입니다. 영어에서 디아트리베는 통렬한 비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디아트리베'는 한국어로 정확히 번역되기는 어렵지만 대화 논법, 강화, 세미나, 짧은 논설 등 여러 가지로 번역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디아트리베는 없는 대상을 세워 놓고 가상 질문을 던지면서 답변해 나가는 형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18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진노, 즉 심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에게 있고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이 보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2장에 들어가면서 사도 바울의 디아트리베가 빛을 발합니다. 그런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지 당연하지를 연발하고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던지는 신랄한 말씀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이런 사도 바울의 디아트리베를 잘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7:1절도 디아트리베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그럽니다.
이 질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6장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하여져서 죄로부터 자유를 얻은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이 주제를 율법과 관련하여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주제의 전환을 위하여 던져진 질문이 바로 7:1절인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여기 형제들, 법아는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대상입니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대인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을 취하다보니 로마서는 어떤 측면에서 교리문답서의 구조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진리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이 제시되는 구조가 로마서 전체에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가상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진 대화체를 디아트리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왜 유대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펼치는 디아트리베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로마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로마서의 주제는 누가 뭐래도 1:16-17절입니다.
뭡니까? 복음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삶으로만 나타나는 의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냥 한 순간 신앙고백이 아니라 평생을 삶으로 열매 맺어야 하는 그런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갑자기 주제가 확 변합니다.
1:18절부터 3:8절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문맥에서 디아트리베는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요? 1:16절에서 복음은 누구에게 능력이 됩니까? 모든 믿는 자들에게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8절 이하에서는 왜 인간이 복음을 믿어야만 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1:18-32절까지는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히 보여 알 수 있는데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진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치명적인 죄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지, 그렇고 말구.”하면서 맞장구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사도 바울은 2장을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만큼 절박하게 하나님의 의의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할례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2:1-11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의 기준, 곧 하나님은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자기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이 말씀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저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은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 못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볼 2:12-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소유가 그 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생각에 대해서 절대 그렇지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2:17-24에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에 대해서 그 허구성을 낱낱이 지적합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그들이 뒤에서 하는 행위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2:25-29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할례는 무익하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할례 받았다는 것으로 자랑을 삼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마지막으로, 3:1-8에서는 자신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의 항의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 항의도 예상된 것입니다. 결국 이 단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선포에서 종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복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사람을
앞 단락, 즉 2:1-11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2:11)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모라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신분, 우리로 말하면 모태신앙이라든지 혹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유대인이라고 해서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입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전체를 끌고 가는 핵심 요절은 역시 1:16-17절입니다. 끊임없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1:18절로 가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즉 심판이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심판에 대해 당연시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서 다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12-16절입니다. 죄는 누구에게나 심판을 가져옵니다. 율법이 없이 범죄한자, 즉 이방인은 또한 율법이 없이 멸망에 넘겨질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 말씀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바로 이어서 말합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율법이 있고 범죄한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해주는 표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유대인을 심판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13절).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으려면 율법을 행해야 합니다. 율법을 가졌다는 것이나 율법을 듣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서 알고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삶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한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심판하시는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본성에 따라 율법이 명령하는 바를 때때로 행함으로써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이것은 2:15에 나타난 것과 같이 율법의 요구가 그들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들의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자, 거두절미하고 이 단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4. 마음의 할례
그런데요? 이런 사도 바울의 논리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 잘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쏟아 부은 노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취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다시 질문과 답변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만약 네가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합당한 유대인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단락은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스스로 믿으니”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괄호에 들어가 있는 내용들은 유대인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굳게 믿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율법의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유대인이라 불린다는 말은 그들의 자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결론을 내리기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율법을 소유한 것과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두 번째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우리는 율법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이 믿음은 그들 스스로 믿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선생이 되었습니다.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자부심이 어떤 부작용을 낳습니까?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사람들로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교사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들이 유대인들이 가진 자부심입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출석하다보면 저절로 귀에 딱지가 앉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교사요 선생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음악 이론을 기막히게 잘 안다고 해서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유창하다고 해서 그가 곧 좋은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명한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곧 내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교회를 출석하면 괜히 어깨에 힘을 주면서 나 어느 교회 출석한다고 말하는 것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근거 없는 자부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이런 근거없는 자부심에 대해서 신랄하게 성경의 잣대를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을 가진 것도 맞고 지식이 있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인 것도 맞지만 과연 그 율법이 삶이 되어 열매를 맺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어지는 질문들을 들어 보십시오. 어쩌면 이 질문은 바로 제게 하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을 그래도 오래 했고 나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사, 전도사, 목사들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입니다.
첫째 너희는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할 때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할 대상이 바로 설교자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도전을 받습니다. 과연 내가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혹은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은 그들이 가르친 내용과 다르게 사는 그들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도둑질을 하고,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간음을 하고,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르치고 지키는 율법은 마음이 없는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삶을 움직이는 율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율법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인해 그들이 자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지만 우리가 이들처럼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가운데 모욕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 율법을 가졌다는 특권의식은 충만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그들의 이중적인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유대인인데 하는 자부심만 강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이 이와 같을까 두렵습니다. 목사처럼 살지도 않으면서 목사입네 자부심만 강할까 두렵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없이 살아가면서 그래도 내가 목사라는 생각에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일까 두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어른이기 때문에, 오래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교사이고 선생이며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늘 남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사람일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5. 마음의 할례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할례입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 곧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서약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출19:8). 이 할례를 은밀한 곳에 한 것은 이것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한 것 자체가 공로가 되거나 믿음의 표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되려면 율법을 잘 지키면서 할례를 받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서 할례만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까? 그것은 참된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 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 인 것처럼 할례도 마음의 할례를 행한 사람이 진정한 할례를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표면적이라는 말은 빛나는, 분명한, 공개적으로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유대인으로서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율법을 잘 지키고 할례를 받고 가르치고 금식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으로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면적이라는 말은 감추어진, 혹은 사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속에서 진정한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표면적인 육신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마디를 더 첨부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마음에 하는 할례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프뉴마는 성령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령으로 마음에 한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는 것입니다.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할 바를 다 했다고 말하는 것은 노예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야 한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표면적 할례, 표면적 유대인들의 관심은 모두 사람들의 인정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칭찬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할례, 즉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단락은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현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수많은 신앙적인 행동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행과 예배와 헌금이 마음의 할례로부터 시작된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신앙생활이냐는 것입니다.
은근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대토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까? 그래서 배우는 일에 인색하고 판단하는 일에 열심 내는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 단락은 로마서의 주제에 닿아 있습니다. 뭡니까? 복음의 능력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신앙생활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자리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저는 가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판단 자가 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신앙적인 행위들로 경건의 표지를 삼으려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면적인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의를 밖으로 드러난 경건의 모양에서 찾지 말고 매일매일 말씀 가운데서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명절 주간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이면적인 삶에서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마5:13절 이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할례가 가는 길입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되는 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외형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셔서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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